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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6화 (2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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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다음 날, 어제 말했던 대로 엘라자넷 공녀가 라트의 공방에 찾아왔고, 케이네와 라트의 사이가 호전된 것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오늘 저 말을 꺼낸 몇 번째더라? 적어도 10번은 넘어갈 거다. 엘리가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왜 했던 이야기를 계속하느냐면.

    “그 이야기는 제발 꺼내지 말아줘, 엘리. 응? 언니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 말을 할 때마다, 케이네가 답지 않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을 놀리면서 밝게 웃던 케이네가 역으로 당하는 모습이라니.

    ‘새롭네.’

    케이네가 당하는 모습은 굉장히 새롭게 느껴졌기에 라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케이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평소같으면 여자들은 차를 마시라고 내버려두고 수련에 열중했겠지만, 엘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있고, 그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왜요? 저는 순수하게 라트랑 언니가 다시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뿐인데.”

    “으으으으! 계속 흑역사를 언급해서 괴롭히고 있잖아!”

    “아버님 가라사대, 비온 뒤에는 땅이 더 단단해진다고 했어요.”

    엘리의 말은 동문서답이었으나, 케이네의 멘탈을 박살내기에는 너무나도 적절한 말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왜 괴롭히는 고야! 으앙!”

    케이네는 귀족답지 않게 버릇없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저러는 이유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겠지. 기실 어제 라트와 화해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겠으나.

    고개를 살짝 올려 슬쩍 라트의 얼굴을 쳐다본 케이네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으, 안 돼. 라트는 동생이야.’

    라트의 얼굴만보면 어제 나눈 키스가 떠올라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지경이다. 엘리가 사이가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말할 때마다, 라트의 입술이 닿았던 촉감이 생생히 떠올라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슬슬 폭발할 거 같은데.’

    케이네가 자신을 쳐다본 이유가 도와달라는 신호라고 착각한 라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엘리, 어제 할 말이 있다고 했었잖아. 슬슬 듣고 싶은데.”

    “아, 맞다.”

    엘리는 마치 깜빡했다는 듯, 귀엽게 혀를 내밀었으나 그녀는 라트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단지 케이네의 반응이 너무 참신해서, 평상시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놀리는데 치중했을 뿐이다.

    ‘이만큼 놀렸으니 슬슬 그만둘까?’

    이 이상 케이네를 놀렸다가는 그녀가 폭발해버릴 지도 모른다. 지금도 언제 얼굴이 펑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지 않은가.

    “아버님이 개인적인 일로 널 부르셔.”

    “루아타 공작님이 무슨 일로 나를?”

    라트의 말에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시더라고. 아, 최대한 간편한 옷을 입고 오고, 혹시 모르니까 무장은 준비해놓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어.”

    루아타 공작이 간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고? 분명 전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거치적거리는 옷을 입었지 않았던가.

    “무장? 루아타 공작님께서 라트한테 위험한 일을 시키시려고 하시는 거야?”

    “그건 아닐 거예요. 위험한 일이라면 가신을 보냈겠죠. 아. 며칠 걸릴 수도 있으니까 짐도 싸오라고 했어.”

    짐까지 싸오라고? 그 말은 들은 라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엘리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위험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무장을 챙겨오라고 언질을 준 거 보면 혹시 모르지.

    라트는 축제 때 엘리를 구하려다가 치명상을 입은 일을 떠올렸다. 졸개한테 그런 상처를 입다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혹시나 무슨 일이 터질 수도 있으니 포션도 챙겨가기로 마음먹었다.

    인벤토리를 열어서 그동안 만들어놨던 포션을 깡그리 쓸어담았다. 아, 최근에 안 사실인데 인벤토리에 뭘 담거나 꺼낸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포션은 전부 챙겼고.’

    “스승님께 말씀드리고 올게.”

    며칠이나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으면 당연히 스승에게 말을 남기고 가야했다.

    “스승님께 말씀드리고 올게, 라고 말하시면 이미 기느투스 후작님께는 언질을 해두었으니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셨어.”

    “그럼 조금만 기다려. 옷 좀 챙겨올게.”

    공작님이 스승님에게 미리 말을 해뒀을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 거지? 딱히 예상이 가는 일이 없다. 공작의 부름이니 거부할 수도 없기에 라트는 옷을 챙기기 위해 공방을 나갔다.

    “진짜로 위험한 일 시키려고 하시는 거 아니지?”

    라트가 방을 나서자, 케이네는 걱정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엘리에게 질문을 날렸다. 만약 제스맹이 이 광경을 봤다면 이래야 내 제자답지! 라고 말을 했을 것이다.

    “아니라니까요, 언니.”

    “진짜로?”

    케이네가 계속해서 자신을 다그치자 엘리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라트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에, 내가?”

    엘리의 말대로 케이네는 라트를 과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제 같은 사태가 벌어진 이유도 분명 라트가 확실하게 길드 마스터를 하지 않겠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라트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물론 본인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명확한 과보호였다. 어린 아이는 과보호를 해도 모자르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아이를 과보호하려고 들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네. 라트도 저도 어린 아이가 아니잖아요.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계셔요.”

    엘리의 말에 케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맞아. 라트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이제는 내가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키가 컸는걸. 어제도…….’

    키스 후, 라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광경을 떠올린 케이네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다시금 책상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 언니? 혹시 제 말 때문에 상처받으신 거예요?”

    케이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엘리는 살짝 당황해서 사과를 하려고 했다.

    “아니야. 엘리 말이 맞아. 엘리도 그리고……. 라트도 어린애가 아니야. 얼마 전까지 라트가 꼬마라고 생각해서 과보호 하는 거 같아.”

    엘리는 케이네가 부끄러움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저 자신이 라트를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에 빠졌다고 생각하고는 사과 대신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

    “다녀와, 라트.”

    “내 몫까지 스승님을 부탁해.”

    “……응.”

    ‘뭐야, 이 분위기는?’

    엘리가 케이네의 이상함을 알아차린 것은 라트가 짐을 전부 챙기고 마차에 오르기 전, 케이네와 라트가 인사를 나눌 때였다.

    평소였다면 라트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녀오라고 말했을 케이네가 마치 요조숙녀처럼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외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공녀님. 라트님도 부디.”

    “다녀올게, 누나.”

    “잘 다녀와.”

    마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조신하게 손을 흔드는 케이네의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엘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어제 언니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음. 딱히 없는데.”

    “진짜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

    뭐, 거짓말이야 할 수도 있지만. 라트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라트는 어제 케이네와 나눈 키스가 애정의 키스가 아닌 단순히 입을 막기 위한 키스라고 단정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중이다.

    ‘이상하다, 아까 케이네 언니의 눈은 완전 핑크빛이었는데.’

    그러나 케이네는 라트와는 달리 라트와 키스를 나눈 이후,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기에 둘의 반응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

    “부르신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어서 와라.”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공작의 집무실로 찾아간 라트는 고개를 숙여 루아타 공작에게 예를 갖췄다.

    “딸아이가 항상 귀찮게 하고 있어서 미안하구나. 내가 워낙 바빠서 훈련을 게을리 시키는 바람에.”

    “전혀 귀찮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녀님이 말 상대를 해주시니, 저야 영광이죠.”

    “거봐요. 귀찮게 안한다잖아요, 아버님.”

    뭐야, 왜 공작이 날 언짢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건데. 설마 딸이 귀찮다고 말해주길 바랬던 건가. 당연히 딸이 귀찮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 줄 알아서 그렇게 대답한 건데.

    “크흠, 엘리 라트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잠깐 나가있어라.”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날려버린 공작은 엘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에? 저도 못 듣는 이야기에요?”

    “빨리.”

    “히잉. 듣고 싶어요.”

    “어허!”

    “아, 알았어요. 나가요, 나가.”

    엘리는 끝까지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공작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방을 나가는 와중 그녀의 품에서 손수건이 떨어졌지만, 공작도 라트도 그걸 신경쓰지 않고 서로를 마주본다.

    “나이 먹고 느는 게 어찌 마법이 아니라 애교뿐이니. 쯧쯧. 이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지만, 정작 그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다. 세간에서는 그가 엘리를 혹사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엘리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었다.

    저 웃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니면 보일 수 없는 웃음이다.

    “이리와 앉아라.”

    “제가 어찌 감히.”

    “제스맹의 제자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루아타 공작은 엘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이내 문을 열었다.

    “너는 딸아이의 은인이자 친구지 않던가. 네가 일어서있으면 내가 불편하다.”

    “알겠습니다.”

    딸을 구해준 보답으로 미스릴까지 받았음에도, 그는 아직도 라트에게 빚을 진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선 딸이 납치되려는 것을 구해줬으니, 천만금을 줘도 부족하다고 느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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