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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5화 (2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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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런 상황에서 체스를 두고 싶겠냐!’

라트는 당장이라도 엘리에게 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사뭇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어쩔래?”

굳은 목소리에 라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보다 훨씬 영특한 공녀님의 말이다. 분명 저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있겠지.

“체스는 둘 줄 알아?”

“룰은 알고 있어. 스승님하고 몇 판 뒀었거든.”

스승님하고만 체스를 둬봤겠는가. 성격상 온라인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라트는 신작 게임이 나오기 전에는 항상 체스를 뒀었다. 월드 세리아라는 최고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주된 일과 중 하나가 체스였을 정도다.

“그래? 그럼 할 만하겠네.”

엘리는 의자에 앉은 후 탁자에 체스판을 두고 그 위에 말들을 놓기 시작한다. 라트는 걷잡을 수 없었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고 엘리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내가 흑을 잡을게. 괜찮지?”

“마음대로 해.”

엘리의 모양새를 보니, 그녀는 케이네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기 위해서 이 체스에서 무조건 이겨야했다.

“단판으로?”

“어.”

지구에서 살 당시, 체스에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라트는 체스판이 펼쳐지자 자연스럽게 분노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냉정해지자. 체스에서 이기려면 냉정해져야한다. 흥분한 상태로는 상대방의 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당하고 만다.

이렇게 내기가 걸린 게임에서는 더더욱 침착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급하게 이기려고 들다가 실수를 반복해서 무력하게 지고 마니까.

“담배 좀 피고 둬도 될까?”

“어, 음. 창문 쪽으로 가서 피면 허락해줄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기에 라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활짝 열더니 인벤토리에서 담배대를 꺼낸 후 책상 위에 있는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후우.”

흡연자에게 있어, 담배는 스트레스 해소제다. 특히나 지금처럼 불안한 심리 상태일 때도 담배를 피우면 조금이나마 냉정을 되찾을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흡연자들의 생각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라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후우우우.”

라트는 파이프 담배를 타고 흐르는 담배 연기가 폐를 찌르는 고통, 아니 쾌감을 즐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이 떠지자, 아까까지 분노로 번뜩이던 두 눈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좋아, 준비 완료.’

심리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라트는 담배를 끄고 겸허하게 엘리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준비 됐어?”

지금부터 완전히 짓밟을 상대에게 대답은 필요치 않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뜻을 알릴뿐. 라트의 모습에 엘리는 미소를 지으며 폰을 옮겼고, 그것을 신호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5분이 지나자, 엘리는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스맹 후작님이랑 몇 판 둬봤다고?’

고개를 살짝 들어 라트를 쳐다본다. 그는 체스에 완전히 집중한 듯, 그녀의 시선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겨우 5분밖에 흐르지 않았으나, 엘리는 완벽하게 열세에 몰려있었다. 라트는 본인이 차례일 때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을 움직였다. 마치, 엘리가 말을 이렇게 움직이면 이렇게 두는 것이 최선의 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님의 가신들조차도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했는데.

“좀 봐주면서 해.”

“즐기려고 두는 거면 그럴 수 있지만, 지금 이건 즐기려고 두는 게 아니야.”

라트가 냉정하게 거절을 표하자, 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평민 출신이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도 천재라는 건가?

케이네 언니가 하던 말이 이해가 됐다. 재능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근소한 차이 뿐이라면 질투를 할 수 있고 시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면, 질투고 뭐고 그냥 동경할 수밖에 없다.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찌 질투를 보일 수 있으리.

“체크.”

그러나 이대로 무력하게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엘리는 발악을 하듯, 체크를 선언했다. 그러자 라트의 입가에 냉정한 웃음이 지나갔고.

“체크메이트.”

퀸을 이용해 엘리의 룩을 잡아버린 라트가 체크메이트를 선언하여, 체스는 5분 만에 라트의 승리로 허무히 종료되었다.

“기느투스 후작님하고 몇 판 둔 게 끝이라는 거, 거짓말이지?”

“거짓말 아닌데.”

지구에서는 모를까. 이곳에서는 스승과 몇판 둔 것 말고는 정말로 체스를 둔 적이 없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귀축!”

“하아?”

뜬금없는 엘리의 비난에 라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게임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열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렇지, 귀축이라니. 고작 게임 한판 졌다고 듣기에는 너무 심한 말이다.

‘뭐, 어때.’

“이겼으니까, 사저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려줘.”

심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당장은 케이네가 최근 들어 까칠해진 이유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역시 너는 그런 모습이 어울려. 앞으로는 화가 나도, 차갑게 화를 내.”

엘리의 말에 라트는 퍼득 정신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압도적으로 체스를 졌단 이유 때문에 분개하던 엘리가 지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트는 그제야 정신없이 체스를 두느라, 분노가 사그라진 것을 깨닫고 엘리를 바라보았다.

“게임은 핑계였구나.”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면, 화가 전부 가라앉았나보네.”

역시나. 처음부터 체스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냉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체스를 두자고 권유한 것이다. 라트가 체스에서 졌다고 해도, 그녀는 케이네가 라트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려줬을 거다.

“제대로 한 방 먹었어.”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체스에서 이겼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설마 엘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엘리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염려해서 이렇게 해준 것이다.

“자, 그럼. 내 예상을 말해줄게. 아마, 맞을 거야.”

엘리는 차근차근, 자신의 예상을 이야기해줬고 조용히 엘리의 말을 경청한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녀는 라트가 셀룬의 연금술사 길드 마스터, 나아가 모든 연금술사의 머리 꼭대기에 위치하는 하이 마스터 자리를 역임했으면 했으나, 라트가 계속해서 거부하자 강경책에 나선 것이라고 한다.

이 말대로라면 케이네가 갑자기 라트를 차갑게 대한 이유가 맞아 떨어졌다. 일부러 자신에게 미움 받아서, 라트가 길드 마스터 자리를 뺏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겠지.

어쩌면 자신에게 미움 받은 후에는 길드를 떠날지도 몰랐다. 그녀가 길드에서 떠나면, 자연스럽게 후계자 자리는 라트에게 쏠릴 거니까.

‘바보 같은 누나. 내가 그렇게 사양했는데.’

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당장 케이네를 찾아가서 언성을 높였을 게 분명했다. 만약 그랬다면 케이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라트와 마찬가지로 언성을 높였겠지.

“고마워.”

“고맙긴. 사실은 할 말이 있어서 온 건데. 오늘은 일찍 갈래.”

“할 말?”

“내일 이야기하자. 케이네 언니랑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그래. 잘 가라. 배웅은 안한다.”

내일은 케이네가 평소처럼 라트의 방이나 공방에 있기를 희망하는 엘리의 말에 라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방에서 나가자 라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누나한테도 확실히 말을 해놨어야 했는데.”

2년 후에 떠나야하는 것을 스승에게만 말했기에 이런 사단이 벌어진 거다.

지금까지는 케이네에게 감히 2년 후에 길드를 떠날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동생같은 라트가 2년 후에 떠난다고 하면, 그녀가 울면서 라트를 붙잡을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정리해야지. 어차피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자주 들릴 거니까. 그렇게 말하면 케이네도 이해해줄 거다.

“읏샤.”

자리에서 일어난 라트는 방문을 열었다. 이 시간쯤이면 케이네는 공방에 있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라트의 목적지는 케이네의 공방이었다.

“사저, 나 들어간다.”

라트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공방 문을 열었고, 당황한 케이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방에 있는 물품은 거의 다 사라져있었고, 책상 위에는 가죽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공간 확장 주머니.’

“뭐하는 짓거리야.”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이성이 끈이 끊겼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라트는 싸늘하게 분노하며 케이네를 노려보았다.

“니가 뭔데 내 공방에 함부로 들어와. 당장 나가지 못해?”

“내가 먼저 물었어. 뭐하는 짓거리야. 대답부터 해.”

한 걸음, 케이네에게 다가서면서 그녀를 다그친다.

“알 거 없잖아. 니가 뭔데 참견을 하려고 들어!”

아직까지도 발뺌할 셈인가. 라트는 피식 웃어버렸다. 물품이 사라진 공방, 공간 확장 주머니. 그리고 당황한 케이네의 모습. 예상대로 케이네는 라트에게 미움을 받은 후 떠나려고 했었다.

단지, 예상과 달리 오늘 내에 떠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행동력이 좋은 누나였었나?

“나한테 미움받았으니까, 이제 계획대로 길드를 떠나시겠다?”

“무, 무슨 소리야.”

말을 더듬으면서 모르는 척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라트가 다시 한 걸음 케이네에게 다가섰고, 케이네는 그런 라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사저 아니, 누나. 정말로 그래도 괜찮아? 잘 생각해야해. 누나는 지금 나한테 미움 받고, 할아버지 같은 스승님 곁을 떠나려고 하는 거야.”

“떠나긴 누가 떠나. 공방을 옮기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역겨우니까, 누나라고 부르지 마.”

거짓말. 진짜로 공방을 옮기려고 했다면 어째서 계속 뒤로 물러서는 건가. 어느 사이에 케이네의 등은 벽에 맞닿았고, 라트는 싸늘하게 물었다.

“끝까지 발뺌할 셈이야?”

“저리 비켜!”

짜증난다, 그녀가 발뺌하려는 상황이 짜증나서 돌아버릴 거 같다. 그리나 이런 짜증나는 상황을 만든 원인은 나이지 않은가.

내가 확실하게 말하지 않아서, 내가 이곳에서 찾아와서 벌어진 일이다.

“케이네뤼카흐 폰 글란츠!”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기에 케이네는 라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 라트는 밀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라트는 두 팔로 벽을 치면서, 케이네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양옆을 가로막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난 누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떠나지 마. 누나는 여기 있어. 떠나는 건 나야.”

“헛소리 하지 말고, 비켜. 네가 왜 여길 떠나. 내가 떠나면 모든 게 해결되잖아. 나는 예정대로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것뿐이야.”

아직도 발뺌인가. 뭐가 예정대로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뿐인가.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그녀는 본래 약속받은 자리를 포기하려는 처지가 아닌가.

당장 그녀의 입을 막고 싶다. 입을 막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벽에서 팔을 때면 당장이라도 그녀가 도망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떠나면 너는 길드 마스터가 되고, 모든 게 우웁!”

현재 상황에서 최선책을 생각해내고 실행으로 옮긴다. 입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다시는 건방지게 말하지 못하게 입술을 탐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키스가 끝나고.

“하아, 하아.”

케이네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화도 내지 못하고 숨을 내쉬면서 라트를 바라보았다.

‘라트가 언제 이렇게 컸지?’

항상 내려 볼 줄 알았던 꼬마가, 어느 사이에 이렇게 커서 이제는 자신이 그를 올려다봐야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 누나.”

키스의 여파 때문인지 케이네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다. 언제까지고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어른이 돼버렸다.

“난 모리아의 계시를 받은 몸이야, 누나.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2년 후에는 내가 할 일을 찾아 떠나야해.”

“모리아의?”

모리아의 이름이 거론되자 케이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응. 그래서 길드 마스터 자리를 거부한 거야.”

“그,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모리아의 계시는 세리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알기에 라트는 스승에게 떠날 이유를 설명할 때 모리아의 이름을 팔았고, 이번에도 모리아의 이름을 팔았다.

보아라, 단지 이름만 언급했을 뿐인데, 케이네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했는지 깨닫는 중이지 않은가.

“방금 내가 키스한 걸로 서로 잘못했다고 치면 되잖아.”

키스로 쌤쌤 하자니 얼토당토 않는 소리이지만, 케이네가 모리아의 계시라는 말에 당황한 덕분에 먹힐 수 있었다. 아마 나중에 케이네가 제정신을 차리고 이 일을 기억해내면 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다시 평소처럼 지내자, 누나.”

“으, 응.”

어린 양처럼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네의 모습에 라트는 미소를 지었다. 남은 건 공방을 원상복구 시키는 거다. 안 그래도 바쁜 스승의 골머리를 썩히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라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덕분에 케이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드문드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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