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4화 (24/229)
  • 0024 / 0229 ----------------------------------------------

    1부

    감히 스승의 앞이었기에, 그가 이런 표정을 보이면 스승이 슬퍼할 것을 알고 있기에 표정관리를 했지만, 공방에서 나왔으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하아.”

    혹여나 스승이 들을까봐 아주 작은 한숨을 내뱉은 라트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으나, 고생하고 있을 스승의 모습을 눈에 아른거리자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스승님이 전쟁에 관여하시는 원인이 나였다니.’

    제스맹은 젊을 적 꿨던 꿈이 떠올랐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꿈을 떠올리게 한 원인은 라트에게 있었다. 내가 스승에게 부담을 줬다. 내가 스승을 무리하게 만들었어.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스승이 있는 공방에서 멀어진다. 죄책감에 몸이 휘청거린다. 만약 라트가 이 세계를 단순히 게임으로 생각했다면, 제스맹은 NPC로 취급했다면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거다.

    “제기랄.”

    그러나 라트는 이 세계를 게임이 아닌 현실로 생각하고 있었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애정을 베풀어준 제스맹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죄책감은 타당했고, 자신이 혐오스러워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라트!”

    케이네가 나타났음에도 인사조차 하지 못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자기혐오에 빠져, 케이네의 모습을 미처 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라트의 모습을 본 케이네는 여자의 직감 덕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자괴감에 빠진 슬픈 모습이 모성애를 자극한다. 당장이라도 그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라트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면서 그런 생각을 지운다. 지금이야말로 라트에게 밉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가 슬퍼할 때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착한 라트라도 감정이 저렇게 꼬여있을 때 건드리면 화를 내겠지.

    “이젠 사저를 보고 인사도 안하네? 아주 잘났어.”

    모성애를 씹어 억눌렀다. 차갑게, 최대한 차갑게. 부드러움을 감추고 날카로움을 사칭한다. 이 아이를 위해서, 이 아이의 찬란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서.

    “아, 미안해 사저.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못 봤어.”

    라트의 입에서 사과가 나오자, 케이네는 순간 한숨을 내쉴 뻔했다.

    ‘역시 라트는 너무 착해.’

    타인에게는 냉정할지 몰라도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착한 아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심술부리는 거잖아. 네가 사과할 상황이 아니라고.

    ‘어떻게 하면 라트가 화를 낼까?’

    영특한 머리를 굴려, 라트가 화를 낼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해본다. 복도를 살피던 케이네는 라트가 스승을 만나고 왔다고 예상했다. 아마 이렇게 침울해진 이유도 스승님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첫 번째 키워드는 스승님.

    “스승님을 뵙고 오는 길이야?”

    “응.”

    “두 번째 제자 주제에 나보다 스승님을 자주 뵙네?”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평상시 라트라면 지금 케이네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꼈겠지.

    그러나 라트는 현재 스승의 일 때문에 머리가 죄책감에 마비된 상태였기에 케이네에게서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케이네의 말에 조금 몸을 떨었다.

    “마음에 안 들어. 스승님은 이런 게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아끼시는지.”

    라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본 케이네는 더욱 표독스럽게 그를 대한다. 소설책에서나 등장할법한, 주인공을 매몰차게 대하는 악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연기한다.

    “사저. 혹시 내가 사저한테 무슨 실수를 했어? 말해주면 고칠게. 아까 함부로 방문을 연 거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라면 다시 사과할게.”

    최근 들어 케이네가 까칠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라트는 재빨리 케이네에게 사과했다.

    케이네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준, 애정을 준 사람이다. 그러니까 미움 받고 싶지 않아.

    “실수? 실수라.”

    라트의 말을 비웃으며 케이네는 눈을 가늘게 만들고 라트를 살펴보았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내 욕심이야. 아니 전부 널 위해서야. 그러니까 지금은 날 미워해주렴.

    이런 말을 꺼내는 날 용서하지 마렴.

    “네가 천한 출신인 것부터가 실수지.”

    차가운 목소리가 라트의 심장을 얼렸다. 그 뿐 아니라, 말을 꺼낸 케이네의 심장도 얼어붙었다. 당장이라도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라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뒷짐을 진다. 등 뒤로 돌아간 손을 피가 날 정도로 쌔게 쥔다.

    ‘약해지지 말자, 케이네뤼카흐.’

    언젠가 라트도 이해해줄 거야. 아니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길드 마스터가 되지 못한다면 아버님은 분명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을 다른 가문으로 시집보낼 것이다.

    예정된 희생양. 그렇다면 가문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라트를 위해 희생하는 편이 기뻤으니까.

    “너 같은 애가 제자로 들어와서 스승님이 고생하시는 거야. 주제를 좀 알고 바쁜 스승님은 좀 내버려둬.”

    “말이 너무 심하잖…….”

    “어딜 평민이 귀족한테 말대답을 해!”

    케이네는 이를 악물고, 뒷짐을 지던 손을 앞으로 빼내 라트의 뺨을 때렸다. 메마른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따귀를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라트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케이네는 가슴이 두 조각으로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과하고 싶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를 껴안고 싶어.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여기서 더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지금까지 한 행동은 전부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변해버린다.

    “스승님과 공녀님한테 예쁨 좀 받는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나본데!”

    “그 입 다물어!”

    결국 라트는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케이네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승의 예쁨을 받고 있다니. 스승이 자신을 예뻐하는 바람에 그 고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라트는 이성의 끈을 잡지 못하고 케이네에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디서 언성을 높여!”

    다시 한 번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복도를 때렸고, 정적이 찾아왔다. 두 조각으로 찢어졌던 가슴이 이번에는 갈기갈기 찢겨 먼지처럼 바닥에 흩어진다.

    ‘아파.’

    아니야, 아프지 않아. 지금 아파해야할 사람은 라트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뺨이 부어오르는 중이 아닌가. 귀여운 얼굴에 손찌검을 한 자신을 저주한다.

    가슴이 아려, 너무 아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신을 추스르자,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거야.

    “재수 없어, 내 앞에서 사라져.”

    라트에게 사라지라고 말한 케이네는 정작 자신이 먼저 라트를 지나쳤다. 지금 라트가 고개를 들어 올리면, 분명 슬퍼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럼 영특한 라트는 분명 이상함을 느끼겠지. 그러니까 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고개를 살짝 돌려 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이네의 말대로 사라지기 위해, 힘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라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안……해.”

    혹시나 라트가 뒤를 돌아볼까봐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전한다. 아픈 사람은 라트인데, 왜 정작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 나일까?

    ‘여기서 울 순 없어.’

    혹시나 라트가 뒤를 돌아볼 수도 있다. 지금 눈물을 흘리면 라트는 분명 케이네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쪽으로 올 거다.

    “잘한 거야. 잘, 한 일이야. 전부 라트를 위한 일……이었잖아.”

    그래 잘한 일이다. 그러니까 울 필요가 없다.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지우고,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잠식하려고 드는 슬픔을 억누른 케이네는 당당하게 자신의 공방으로 걸어갔다.

    *****

    방에 도착한 라트는 거울을 통해 부어오른 뺨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사저가 갑자기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분노가 머리를 잠식한다. 입 안에서 케이네를 향한 욕설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사저가 최근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있었나?’

    혹시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게 아닐까? 만약 진짜 그런 거라면 당장 케이네를 찾아가서 분노를 쏟아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케이네와 함께한 지난 1년간의 기억이 그것을 말렸다.

    사저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푸는 성격이 아니다. 이유 없는 분노를 보일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분노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그건 잘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승과 라트는 케이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 소악마 같은 면모가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케이네는 착했다.

    라트가 냉정했다면 그 사실을 상기하고, 케이네가 이상하다고 느꼈겠지. 그러나 안 그래도 스승 때문에 심란했던 머리가 케이네의 분노로 인해 결정타를 먹었는지, 라트는 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누구야?”

    노크 소리가 들리자, 라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럴 때 찾아온 거지?

    “나 왔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엘리자넷 공녀였다. 그녀의 모습을 본 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쁜 일이 있었는지 최근 방문이 뜸했던 엘리가 하필 이럴 때 찾아올 줄이야. 평소라면 어서 오라고 말해줬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라트는 공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근 한 달 만에 방문한 친구한테 반가운 척 좀 해주면 덧나……너 뺨이 왜 그래?!”

    뚱한 표정으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친구를 보던 엘리는 그의 뺨이 부은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서 라트에게 다가갔다.

    “누구야? 어떤 놈이 이랬어!”

    감히 내 은인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다니. 엘리는 분노를 곱씹었다. 만약 길드에 있는 수련생이나 프로보스트가 라트의 뺨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당장이라도 보복을 할 기세였다.

    “사저가 그랬다만.”

    “케이네, 언니가?”

    그러나 라트의 입에서 의외의 인물이 지목되자 엘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타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식어버릴 정도였다. 라트를 동생처럼 생각하는 케이네가 라트의 얼굴을 이런 꼴로 만들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라트의 표정을 보니 그의 말을 전부 사실이었다.

    “도대체 왜…….”

    “나도 몰라. 요 근래 들어 사저가 날 아니꼽게 보더니 이렇게 됐다고!”

    그 질문을 하고 싶은 건 라트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케이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라트는 엘리의 놀란 표정을 보고 입술을 씹었다.

    ‘상관없는 사람한테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다니. 최악이다.’

    “미안.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어.”

    “괜찮아. 친구니까 이해해줄게.”

    엘리는 손사래를 치며 라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라트를 바라보면서 케이네가 어째서 라트의 뺨을 때렸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우. 황색은 아직 모르겠지만, 알베도는 라트가 날 한참 넘어섰네.’

    그러다 문뜩 한 달 전 케이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당시 케이네의 모습은 라트를 질투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라트의 성장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니까 질투나 시기심 때문에 라트의 뺨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닐 거다.

    그 이후에 나눈 대화에서도 케이네는 라트를 질투하지 않았다. 아니, 질투하기는 했으나 그보다 라트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더욱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깐만.’

    라트가 제스맹을 만나러 가고 나서, 케이네와 나눈 대화를 차근차근 생각하던 엘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 케이네 언니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뭐? 네가 어떻게?”

    당장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케이네 언니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이 방해하는 게 타당한지 모르겠다. 게다가 라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요전번에 이야기를 한 게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는 라트와 즐기기 위해 가져온 무언가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케이네 언니는 화를 낼 거야.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친구인 네가 화를 낼 거고.”

    엘리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체스판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게임 한판 하자. 네가 이기면 다 말해줄게. 대신 지면, 난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 작품 후기 ============================

    추천 좀 눌러주시고 가주세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