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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중앙군은 혼성군의 후미를 들이쳤다.
“투항하라.”
“저항하는 자는 누가 되었건 죽는다.”
“머리 숙이고. 땅에 엎드려.”
중앙군에 속한 군병들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혼성군에는 병사가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꽤 떨어진 곳에서 함성을 지르며 내달려오는 군병을 본 혼성군의 무장들은 매우 당황했다.
“무, 무슨?”
“중앙군이 왜에에 여기에 나타나?”
“허억. 요, 용봉깁니다. 장군.”
“멈춰라. 멈추라고.”
무장들은 다가오는 군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상대가 아군이라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다.
그들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박개광은 함성에 뒤돌아보며 살며시 웃었다.
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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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다.
재물이나 비단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전술.
싸우는 방법을 일컫는 그 전술이 화려하고 변화무쌍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군병에 의해 배후를 공격당한 카즈오 번의 진형이 붕괴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차 한 잔 마실 일다경이었다.
카즈오 번의 번주 카즈오 이토와 타이라노 류켄 그리고 가신들은 어, 어. 하다가 이민호가 지휘하는 군병들에게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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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혼성군 내에서는…….
푸우우우.
서양헌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바닥에 무릎을 굻었다.
털퍼덕.
서양헌은 가슴 깊이 박힌 검과 빈손으로 서 있는 박개광을 번갈아보았다.
“어, 어찌.”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몸을 경련했다.
눈을 연방 껌뻑거리는 것이 몸에서 힘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모양이다.
박개광은 비아냥거렸다.
“그대가 이리 불운한 것은 나주 목사 이민호를 적으로 돌렸기 때문이니. 원망치 마시오. 서 장자.”
“무슨…… 끄륵.”
서양헌은 입에서 꾸역꾸역 선혈을 흘리더니 맨땅바닥에 엎어졌다.
박개광은 엎어진 서양헌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묵이라고 했던가? 세작치고는 너무 어설펐소. 이공이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깐 말이야. 애초에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아들과 딸을 잃고 이리 단명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쯧쯧.”
박개광은 몸을 떠는 서양헌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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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걱.
감문위 상장군 우장은의 목을 중랑장 손두홍이 베었다.
목에 베인 우장은은 바닥에 그대로 꼬꾸라졌고, 튀는 피가 손두홍의 얼굴과 상체에 튀었다.
손두홍은 우장은의 피가 주룩 흘러내리는 검을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 잘 들었으면 좋았잖아. 왜 상장군의 명을 안 따라.”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우장은이 박개광에게 늘 반발하며 맞서려 해, 동일한 상장군임을 항시 내세워, 박개광의 지휘를 사사건건 걸고 넘어져, 이참에 박개광이 없애라 손두홍에게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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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군 내에서 천우위를 주축으로 일부 감문위 소속 병사가 합세하여, 양광도 호족 연합군을 이민호가 이끄는 군병과 함께 척살해버렸다.
그들은 빠르게 전장을 장악, 신속히 정리에 들어갔다.
“너. 일루와아아아.”
대문이 열을 받을 대로 받아, 피가 철철 흐르는 검을 오른손에 쥔 채 뛰었다.
앞쪽에서는 봉두난발의 별장 김우평이 죽어라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미친놈이 상관을 죽이려 합니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주변에 있던 군병들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피식, 피식.
군병들은 죄다 고소를 머금었다.
시야에 보이는 별장 김우평은 감문위 복장을 하고 있었고, 뒤를 쫓는 대문 역시 감문위 복장을 하였지만, 이마에 하얀 광목천을 두르고 있어 아군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적인 감문위에 속한 별장을, 아군인 대문이 죽이려는 광경이라 다들 가만히 지켜 서서 구경만 했다.
이미 전장은 정리에 들어간 터라, 살아 움직이는 자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 다들 간만의 구경거리에 박장대소하며 소리쳤다.
“이봐. 살고 싶으면 죽어라 뛰라고.”
“어여. 따라 잡아. 그래야 죽이지. 하하하하.”
“뭐 빠지게 잘도 뛰는데 그래.”
더 이상의 살육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민호의 명이 떨어져, 다들 상관하지 않았다.
대문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 이 개에에세에에키이이이. 거기 안 서어어.”
그간 받은 열불을 풀 수 있는 기횐데. 별장 김우평이 살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사람 살려요. 부하가 상관을 죽이려고…… 사람 살려요.”
별장 김우평은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했으나 그 누구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뒤쫓는 대문의 이마를 감싸고, 뛰는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광목천이 별장 김우평의 간절함을 가로막았다.
“너만은 내가 기필코.”
대문은 눈이 뒤집혔다.
이민호의 명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지 그간 받는 차별과 불만에 대한 살의만이 그득했다.
그래도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우인데, 김우평 저 놈은 적인데.
날 죽이기야 하시겠어.
대문의 마음 한구석에 그런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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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타이라노 류켄을 필두로 다수의 이가 목이 잘려 차디찬 시신이 되었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이 원한을 꼭 갚을 것이다.”
류켄은 그렇게 소리치며 죽었다.
전장 정리는 하루 이틀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들을 뒤덮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시신을 치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삼일은 걸릴 것 같아 이민호가 지휘하는 군병들과 중앙군의 군병은 서두르지 않았다.
들 한쪽에 수많은 군막이 서고 군막 사이, 사이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모닥불이 지펴졌다.
나 영감이 필사의 노력을 다한 물자가 풀어지고, 승자가 된 군병들은 모닥불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았다.
다들 이른 끼니를 챙겨 먹었다.
“참 바쁜 하루였어.”
“끄응. 그래도 크게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잖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야.”
“그나저나 똑같은 아군인데. 마음이 영 그래. 다 같은 고려 사람들인데.”
“휴우. 누가 아니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모닥불에 둘러앉은 군병들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안타까워했다.
이민호의 명으로 적아 가리지 않고 전장 전역을 대상으로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로 말미암아 혼성군에 속한 병사들이 상당수 죽었다.
비참하고 무의미한 죽음들이라, 다들 마음이 무거웠다. 왜병들의 죽음에는 별 감정이 일지 않았다.
군병들에게 왜병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0 장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부족에게 쫓김을 당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생존이었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모른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깨달았다.
막막하다고, 포기한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 죽기 직전에서 살아남았다. 독화살에 사경을 헤매면서도 나는 살아났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나는 내게 대항하는 자들을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다. 내 친동생마저 죽였다.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늘 열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난 몸부림쳤다.
기록을 뒤져 찾은 칭기즈칸 테무친이 남긴 말들이다. 왠지 모르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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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공략한 후 칭기즈칸은 몽고로 돌아왔다.
1226년 가을.
칭기즈칸은 서정西征, 이슬람 정벌의 참가를 거부한 서하에 대한 응징을 결의하며 군을 일으켰다.
다음 해 1227년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를 포위하여, 마침내 서하를 무너뜨린다.
이어, 금을 멸망시키기 위해 재차 군을 일으켜 본격적인 중원 정벌에 나선다. 하지만 감숙성 청수현淸水縣 서강西江 강변에서 낙마와 더불어 허망하게 병사하고 만다.
일세 영걸답지 않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 해 나이가 66.
세계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잔학무도한 정복왕 중의 정복왕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그들에게 칭기즈칸이 정복한 영토가 분할 상속되었다.
몽골 본토 및 중국은 대 칸의 직할령으로, 남러시아의 킵차크한국, 서아시아의 일한국,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한국, 서북 몽골의 오고타이한국이 훗날 탄생하는 근간이 된다.
본래 몽골의 풍습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런데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대 칸의 지위에 올라, 사실상 부친 칭기즈칸의 후계자로서 그 적통을 잇는다.
이후 대 칸의 지위는 오고타이,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에게 이어진다.
몽골은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비로소 원 황조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그 때까지 치열한 내부 권력 다툼을 이어나갔다.
칭기즈칸의 사후 오고타이는 무시무시한 조치를 내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부친 칭기즈칸의 피임을 증명한다.
수천에 이르는 몽고 기마를 동원, 부친을 매장한다. 그 후 일을 마치고 귀환하는 수천의 몽고 기마를 미리 매복하고 있던 수만에 이르는 몽고 기마로 하여금 모두 죽이게 한다.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그것이 오고타이의 밀명이었다.
오고타이는 부친 칭기즈칸의 유언에 충실히 따랐던 것이다.
“내 무덤을 세상으로부터 감춰라. 수많은 피를 뿌린 나를, 죽은 나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자들이 필히 있을 것이다.”
오고타이는 그렇게 부친 칭기즈칸의 무덤을 역사 저 편에 있는 어둠속에 깊이, 깊이 묻어버렸다.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