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44화 (24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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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철은 머리 숙인 이민호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큭큭큭.’

일종의 길들이기라고 할 수도 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머리를 들라 말해야 한다.

상대하는 이민호는 권력을 쥔 무신 정권의 새로운 집권자다.

아닌 말로 밉보였다가는 폐위되기 십상이다.

하나, 황제로서 최소한의 권위는 세워야 한다. 황재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릴 수는 없다.

단상 아래에서 머리 숙인 이민호라는 자는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임을 인증 받으러 와 있는 것이다.

자신과 황실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존중을 이끌어내자면 어느 정도는 뻣뻣하게 굴 필요가 있다.

왕철은 나름 머리를 굴리며 계산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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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윽.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머리를 발딱 들었다. 왕철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히히히.’

용상에 앉은 왕철은 당황했다.

얼굴이 이지러지고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속내가 한 눈에 다 보인다.

날 내려다보는 눈에서 당혹, 역정, 분노 등. 다수의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킥킥. 기분 더럽다. 이거지.’

왕철의 속내가 빤히 예상된다. 짐짓 못 본 척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전하.”

지칭에 힘주었다.

“폐하일세.”

“…….”

왕철은 날 깔보는 듯한 기색을 띠며 말을 이었다.

“아직 황실 예법에 서툰 모양이네만.”

마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왕실을 상징하는 용봉기를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왕철은 썩은 계란을 씹어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흔한 말로 우거지상을 지었다.

기분 더럽다.

왕철은 얼굴 표정을 통해 내게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용봉기는 짐과 황실을 상징하는…….”

의도적으로 짐과 황실이라는 말에 힘주었다.

날 황제로 불러라.

왕철의 속내는 모르는 척 하며 말을 이었다.

“내주십시오.”

“…….”

왕철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역정 내는 얼굴 표정을 지으며 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얼굴과 시선에서 적의가 엿보였다.

그러던가 말던가.

“내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제가 꺼내 가겠습니다.”

내 말에 왕철이 당황했다.

“자, 자네.”

“덧붙여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폐위를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확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수가 있어. 알겠어.

무언의 협박을 날렸다.

왕철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옆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날 곁눈질했다.

“알겠네. 가져가시게.”

“그럼.”

말과 함께 뒤돌아섰다.

‘너 따위가!’

왕은 무슨 왕.

최충헌이 세운 허수아비 주제에. 뭐, 기분 더럽겠지. 하지만 원망을 하려면 날 원망하지 말고 머저리 같은 의종에게 하라고.

무비라는 미녀에게 푹 빠져 황음무도한 치태와 덜 떨어진 멍청이처럼 국가 대사를 농단한 의종 때문에 이의방과 정중부와 같은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으니깐 말이야.

‘가마솥에 집어넣어져 연못에서 익사한 의종 이후의 고려 왕들은 정통성이 없어. 왕? 놀고 계시네. 왕이 왕 같아야 인정하지.’

웃긴다.

왕 같지도 않으면서 왕으로 대접 받기를 원하니 말이다.

무신들이 제 맘대로 세운 왕이 어디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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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철은 닫힌 회경전 문을 바라보며 격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양손으로 앉은 용사의 팔걸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다. 역대 무신 정권의 권력자들 중에서 조금 전 이민호와 같은 무엄한 언행을 한 자는 단연코 단 한 사람도 없다.

“날 폐위하겠다고 협박하다니.”

왕철은 분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어금니를 악물며 닫힌 문을 성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어디 두고 보자. 네 놈이 얼마나 가나?”

왕철은 이민호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신 정권의 지배자 중 가강 오래 권세를 누린 자는 최충헌이다. 하나 그 최충헌도 종국에는 죽었다.

이민호가 최충헌처럼 장기 집권할 리는 없다. 최충헌의 우봉 최 씨 가문에 고려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깐.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민호를 제거하고 자신이 무신 정권의 권력자를 꿈꾸는 자는 꽤 있을 것이다.

왕철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형형한 안광을 번쩍였다.

9 장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들 양쪽에 진을 친 카즈오 번의 왜병과 혼성군의 병사들은 다시금 대전 준비에 들어갔다.

벌써 보름 넘게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의외로 왜병들은 강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무력이 혼성군 병사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런 이유로 왜병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병사 네다섯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그로인해 실질적인 전력 차이는 거의 없었다.

개인 무력 차이를 사람의 숫자가 상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천이 조금 넘는 왜병들과 5천여 명에 이르는 혼성군은 그간 한 치의 밀림도 없는 맹전猛戰을 거듭했다.

감당하기 벅찬 사상자와 중상자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여전히 대전을 거듭했다.

카즈오 번은 타이라노 류켄의 강경함과 이참에 고려에 일종의 거점을 만들려는 카즈오 이토의 꿍꿍이에, 혼성군은 고려를 침습한 왜구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강한 적의에 대전을 중단할 수 없었다.

카즈오 이토는 연일 주위로 몇몇 정탐병을 보내 나주목의 군병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주적인 그들은 인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내라.”

카즈오 이토의 명에 다수의 정탐병들이 나주목을 포함한 인근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나주목의 군병은 보이지 않았다.

나주목의 군병을 찾으려는 시도는 혼성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주목 군병 3천을 상대하려고 왔다가 왜구라는 엉뚱한 적과  조우한, 보름이 넘게 대전을 이어온 것에 다들 분통을 터트렸다.

“분명 나주목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상장군.”

딸과 아들의 목수를 하고자 하는 서양헌은 눈에 불을 키고 이민호와 3천여 군병을 찾았으나, 마찬가지로 그 어디에서도 이민호와 3천여 군병은 보이지 않았다.

카즈오 번과 혼성군은 싸우려는 이민호와 3천여 군병을 놔두고 전혀 엉뚱한 적과 보름 넘게 싸우며 막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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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양측은 함성을 지르며 상대방을 향해 내달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서로를 향해 성난 파도인 양 달려 나가는 카즈오 번의 왜병과 혼성군의 병사들.

최소 5천여 명이 넘는 이들이 들을 가로지르며 물밀듯이 앞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는 광경은 꽤 볼만했다.

노궁과 활 그리고 석포는 침묵했다.

그간 싸우며 모두 소진한 까닭에 며칠 전부터 다들 근접전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달려가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며 상대와 싸우는 단병접전이 대전의 중심이 되었다.

격렬하고 사나운 교전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다.

“죽여.”

“와아아아아.”

양측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천지가 떠날 것 같았다.

차, 차, 차앙.

무기가 서로 격렬히 부딪치는 소성들이 끊임없이 울렸다.

왜병과 병사들은 서로 뒤엉켜, 멀리에서는 적아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왜병과 병사들은 온통 한데 뒤섞여 모든 것이 혼란 그 자체였다.

죽고 죽이는 사나운 공방이 반 시진 남짓 이어졌을까?

돌연 카즈오 번의 왜병들 후미에서 일단의 왜병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들은 안쪽으로 휘어들어간 곡선마냥, 매우 빠른 동선을 그렸다.

날렵하게 신속하게 내달렸다.

일단의 왜병은 치열하게 싸우는 혼성군의 후미로 이동했다.

후미 좌우에서 조이듯 파고드는 왜병들의 움직임에 전장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후미 좌우에서 치고 들어오는 왜병들에 의해 혼성군 병사들은 매우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니, 온통 왜병들뿐이라 병사들은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뭐, 뭐야?”

“설마 포위된 건?”

덜컥 겁먹었다.

병사들의 적극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후미에 있는 병사들은 급히 좌우에서 치고 들어오는 일단의 왜병들을 향해 돌아섰다.

맞아 싸우려는 모습이었다.

그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지고 예상 밖의 상황이 전개되자 박개광은 혼성군을 한 명도 남김없이 내보냈다.

“막아라. 왜병들이 후미를 파고들게 해서는 안 된다.”

앞뒤에서 왜병들이 군병을 공격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혼란과 자칫 지휘 체계가 붕괴될까?

박개광은 저어했다.

병사들과 지휘부 사이에 왜병이 있다는 것은 병사들이 고립된다는 것을 뜻하는 까닭에 급거 남은 모든 병사를 전장으로 밀어 넣었다.

예비 병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장에 투입했다.

“빨리 가라!”

“어서 움직여.”

지휘 무장들의 닦달에 재차 투입되는 병사는 빠르게 전장으로 뛰었다.

창졸지간에 전장에서 오가는 공방은 격렬에 격력을 이어나갔다.

서서히 총력전의 양상을 띠었다.

“크아아아악.”

“우아아악.”

비명이 전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죽어 나가는 자들이 전역 곳곳에서 속출했다. 삽시간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체들이 전장의 지면을 온통 뒤덮였다.

왜병과 병사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어지럽게 뒤섞였다.

“뭐야?”

“나야. 나.”

“제기랄.”

적아의 혼동이 발생할 정도로 모든 것은 혼란의 도가니로 치달았다.

“죽여.”

“왜놈들 쳐 죽여라.”

지난 보름 넘게 죽고 죽이며 사투를 이어온 까닭에 서로 원수 보듯 했다.

그런 상태에서 총력전 양상을 띠자, 왜병과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こうげき.”

“命 がねえぞ.”

오직 적을 죽이고 죽이는 것에만 전념하며, 심중 이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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