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43화 (24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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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용李藏用.

자는 현보顯甫라 한다.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6세손으로, 부친 이경李儆은 일찍부터 청렴하고 검소하여 사람들의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

또한 이경은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음은 물론 업무 처리가 매우 깔끔하여 관직이 추밀원사樞密院使까지 이르렀다.

이장용은 한 마디로 문벌 귀족 중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여타의 다른 가문이나 관료와 달리 청빈하고 왕과 왕실에 충성을 다 하는 골수 복왕 파라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 보면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장용은 무신들로 말미암아 추락한 왕과 왕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자다.

게다가 머리가 보통 영민한 것이 아니다.

업무 처리 역시 매우 유능하여 경험과 연륜만 쌓인다면 능히 한 시대를 경략해 볼만한 그릇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릇 자체가 여느 문벌 귀족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중앙 관제는 2성 6부로 그 근간은 당나라다.

백관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오늘날 국무총리와 비슷한 직위다.

소위 말하는 준비된 국무총리.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이장용이다.

문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무신 못지않은 용맹과 한 무술 하는 자로, 문무겸전의 인재 중 인재라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왕과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골수 복왕 파 중의 복왕 파라 무신들에 대해 상당히 까칠하다.

하지만 사람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내가 읽은 기록들 중 이장용을 비판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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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는가?”

해심이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아, 아닐세.”

난 해심의 물음을 급히 얼버무리며 이장용을 바라보았다.

향후 내겐 가장 강력하고 큰 라이벌이자 적수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죽여 버릴까?

‘으음.’

심중 이는 충동에 침음을 흘리며 갈팡질팡했다. 솔직히 선뜻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치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반칙이지 않은가?

당장 나부터가 고려 시대에는 없어야 하는 사람인데.

‘너무 아까워.’

죽이기에는 이장용이란 한 사람이 가진 출중한 능력과 범인과 확연히 다른 그릇이 너무 탐난다. 하지만 살려두면 향후 나와 끝없이 대립하며 갈등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우라질!’

역시 아니다.

충신을 죽이는 것은 정말 꺼려진다.

사리사욕에 물든 자라면, 이루 큰 물의를 일으키거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모를까?

‘만약 여기서 내가 이장용을 죽여 버리면.’

머릿속에 이후의 고려 역사가 떠올랐다.

‘곤란해.’

최대한 원 역사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원 역사 그대로 흐르도록 놔두고 싶다.

최우와 최향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려의 모든 권력을 내 수중에 쥐지 않으면 새로운 고려란 있을 수 없으니깐.

가능한 원 역사를 유지하는 것이 변수를 줄이는 첩경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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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심과 승병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민호와 이장용을 위시한 내시들을 번갈아보았다.

‘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다들 의문을 느꼈다.

승려 출신이라 불교계의 인맥을 통해 왕궁에 들었다. 이민호와 왕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왕철을 경호했다.

‘안다?’

해심은 슬쩍 이민호를 흘겨봤다.

돌아가는 사정으로 봐, 이민호가 내시 이장용을 아는 것 같다.

이장용이 은연중에 의문의 얼굴빛을 띠며 이민호를 주시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장용은 이민호를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한편.

‘무슨……?’

이장용은 영문을 몰라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마주선 이민호가 자신을 아는 듯 순간 놀라 한 발 물러났다.

한데 자신은 이민호를 본 적이 없다. 지금 이렇게 마주선 것이 첫 대면이다.

‘대관절?’

이장용은 심중 의문에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반짝였다.

가만히 이민호를 주시하며 생각했다.

본 적은 없으나 들은 적은 많다.

아디서 나타났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자로 한미한 지방 호족 가문의 사람이라 들었다.

몇 해 전 양광도에 대거 왜구들이 침습하여 분탕질을 칠 때 두각을 드러냈다.

최충헌의 눈에 들어 남다른 총애를 받았고, 그에 힘입어 장자 최우의 무남독녀 외동딸을 부인으로 맞는 행운을 누렸다.

이미 다른 세 여인이 있음에도 이해되지 않게 최우의 외동딸을 얻은 이면에는 최충헌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전해 들었다.

한 때 이해하기 어려운 최충헌의 각별한 총애로 다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민호가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권력 승계의 선상에 놓여 있다. 여긴 적이 있다.

한데 황도 개경에 있지 않고 나주목으로 가더니, 이렇게 고려라는 천하의 권력을 한 손에 걸머쥔 집권자로서 그 위용을 드러냈다.

‘흠.’

이장용은 이민호를 보며 역대 무신 정권의 집권자들을 생각했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이겠지.’

그리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던 무신 정권의 집권자는 적어도 황실만큼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으니깐.

이장용의 입장에서는 황실이지만 이민호의 입장에서는 그저 왕실일 뿐이다.

이민호, 해심, 이장용.

삼자는 동상이몽 하듯 각자 다른 상념에 푹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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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왕철.

그가 높다란 단상에 앉아 있었다. 잘 먹어 그런지 다소 살찐 모습이었다.

건장한 체구와 꽤 잘 생긴 얼굴로 봐서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몸에 걸친 누런 용포, 오직 황제만이 머리에 쓸 수 있는 황관.

제법 황제다운 면모가 우러났다.

뚜벅뚜벅.

곧바로 왕철이 앉아 있는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걸으며 앉은 왕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이규보의 시 중 대농부음이수가 무심코 떠올랐다.

시퍼런 새 곡식 아직 밭에 있는데.

현 서리들은 벌써 조새를 거둬가려 하는구나.

부자 나라 힘껏 일한 우리에게 달렸는데.

어찌 이다지도 빼앗기며 살마저 벗겨가려 하는가.

기록에 남아 있는 고종 왕철은 한 마디로 말해 밥 맛 없는 개 싸가지다.

겉으로는 최충헌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척하며 뒤로는 호박씨를 까듯 적극적으로 몽고를 고려 내부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몽고라는 외세를 이용해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것은 왕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권력욕으로 볼 수도 있다.

봉건 국가에서 왕은 절대 권력을 쥔 지배자이니깐 말이다.

단상 바로 아래에 이르러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나주 목사 이민호라고 하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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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철의 짙은 검은 눈썹이 역 팔八로 일그러졌다.

폐하.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한데 이민호가 전하라 하였다.

전하라는 호칭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너 역시도!’

왕철은 머리 숙인 이민호가 역대 무신 정권의 권력자처럼 황실을 업신여긴다. 생각했다.

기선 제압을 하듯 호칭을 전하로 함으로서 자신이 왕실보다 우위에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 같아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왕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숙인 이민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음을 무언으로 드러내듯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어쭈!’

왕철이 머리를 들라 명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머리를 드는 것은 소위 말하는 불경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있을 수는 없다.

‘날 골탕 먹이겠다. 이건가?’

왕철의 속내를 어림짐작했다.

‘하긴. 전하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다들 폐하라고 부르니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래도 아무 말이 없으면 까짓 거 내 맘대로 고개를 들지 뭐.

내가 저 자식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잖아. 칼은 내가 쥐고 있는데. 확 휘둘러버려.

충동을 느꼈다.

이참에 무력으로 왕철을 폐위시켜 버릴까?

‘아니지. 아니야. 그럼 다른 놈을 또 왕위에 앉혀야 하는데.’

이래저래 꽤 시끄럽고 자잘한 골칫거리들이 상당히 많을 것 같다.

나중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구태여 골치를 썩일 일은 가급적 안 만드는 것이 장수에 이르는 지름길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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