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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대문은 교전을 이용해 몇몇 수하 병사를 대동하고 동료 승조, 배후와 조우했다.
승조, 배후, 대문은 휘하 병사들을 둥글게 모이도록 하여 원진을 구성한 후 몰려드는 왜병들을 상대하게 하였다.
“언제야?”
“나리가 오시면 바로 그 때.”
“애들은?”
“미리 다 말해 놨어. 최대한 죽거나 다치는 상황은 피하라고 말이야.”
“정찰, 전령 역할을 하는 애들은?”
“걱정하지 마. 미리 다 포섭해 뒀으니깐. 그 자식들. 은병을 몇 개 쥐어줬더니 껌뻑 죽던데.”
“암튼. 나리가 오실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들 무사해야 해.”
“알았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조심해.”
“그나저나 왜병 짜식들. 되게 악바리네. 아주 기를 쓰고 달려들어.”
조승이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하 병사들이 몰려드는 왜병들을 힘겹게 막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심중 조마조마하다.
조승은 배후와 대문을 쳐다보았다.
“자아, 이만 헤어지자. 다들 조심해. 알겠지.”
“알았어. 다음에 또 보자, 개죽음 하지 말고.”
“큭큭. 염려 붙들어 매셔.”
조승, 배후, 대문은 웃으며 뒤돌아섰다.
각기 대동한 병사들에게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와아아아아아아.”
“돌격! 앞으로.”
“왜병들을 죄다 쓸어버려라.”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조승, 배후, 대문, 각기 대동한 병사들.
그들은 동쪽을 돌아봤다.
지휘부가 있는 진중에서 수백여 명의 병사가 쏟아지듯 나왔다.
병사들은 다들 손에 노궁을 들고, 호호탕탕浩浩湯湯 하게 사위로 퍼졌다.
그와 함께 진중에서 길게 이어지는 다수의 파공과 함께 무엇인가가 대규모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슈, 슈, 슈우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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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서쪽.
카즈오 번의 카즈오 이토와 타이라노 류켄을 비롯한 다수의 왜 무장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안장에 앉아 전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돌아가는 전세戰勢를 살폈다.
노궁을 수백여 병사들이 넓게 퍼져 왜병들을 향해 단전을 연거푸 쏘아댔다.
멈추지 않고 3번에 걸쳐 발사되는 연발노.
그 효과는 지대했다.
노궁병 주위에 있던 왜병 수백여 명이 삽시간에 지면에 쓰러지며 공간이 텅 비어지듯 휑해졌다.
한편.
하늘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진 항아리들이 지면에 닿으며 산산이 깨어졌다.
깨어진 파편들이 주변에 있는 왜병을 덮치고, 지면에 쏟아진 기름에 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붙어, 인근은 한 마디로 말해 작은 불바다였다.
여남은 명의 왜병이 불바다에 갇혀 창졸간에 불덩이로 화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인근에 있는 왜병들이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일부는 가능한 불바다에서 멀어지려는 듯 황황급급히 뒤와 옆으로 돌아서더니 마구잡이로 뛰었다.
“피해.”
“저, 저어…….”
그로 인해 왜병과 혼성군이 맞부딪치는,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전열은 무질서해졌다.
그런 가운데 혼성군의 병사들이 주도권을 잡고, 전열에서 왜병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노궁과 석포에 힘입은 바가 큰 맹진猛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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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을 지켜보는 카즈오 이토는 낮은 침음을 흘렸다.
“으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심중이 드러나는 침음에, 주변에 있는 무장들이 몸을 흠칫흠칫거렸다.
무장들은 카즈오 이토를 돌아보며 조심스런 기색을 띠었다.
카즈오 이토 왼편에 서 있는, 안장에 앉은 타이라노 류켄.
“번주.”
류켄은 이토를 돌아봤다.
이토는 류켄을 향해 고개를 들렸다.
평이한 얼굴이었다.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가장된 얼굴은 마주보는 이를 알게 모르게 긴장시켰다.
류켄은 눈짓으로 들 정중앙을 가리켰다.
“두고 보실 참이오?”
이토는 류켄의 말에 살며시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씩.
미소는 매우 흐릿해 보일락 말락 했다.
“상대는 최소 수천이오. 우리보다 배로 많소. 지금 당장 승패를 보려 한다면 우린 상당한 손실과 피해를 감수해야 하오. 아직 그대가 말한, 타이라노 번을 침탈한 자와 그 자가 이끄는 군과 조우하지 못하였소. 만약 지금 승패를 거는 승부수를 띄웠다가 그 자와 그 자가 이끄는 군이 우리 배후나 측면을 치고 들어온다면.”
이토는 말을 끊으며 눈을 반짝였다.
패한다!
류켄은 이토의 무언에 움찔했다.
이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류켄 공. 진정하시오. 서두르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오. 나와 그대가 이곳에 온 목적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왜, 뭐 때문에 고려 나주에 왔는지 그 이유를 상기시키는 이토의 말에 류켄은 침묵했다.
“…….”
이토는 잠시 침묵한 류켄을 보았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노무라.”
“핫. 도노.”
카즈오 번의 가로家老 스미야시 이노무라가 이토를 돌아보았다.
일흔이 넘는 고령임에도 감주를 걸치고 노 무장의 연륜과 풍모를 뽐내는 이노무라였다.
“이쯤에서 병사들을 뒤로 물리도록 해. 그리고 진을 구축하고 푹 쉬도록 해주고.”
“핫!”
이노무라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토는 시선을 전면으로 돌려, 그 사이에도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는 전역戰域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루 이틀에 끝날 대전對戰이 아니야. 적어도 5, 6주야는 걸릴 테니. 마음의 각오를 미리 단단히 해 둬.”
“예, 도노.”
이노무라는 고개를 들며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류켄은 전역을 돌아보며 심중 이를 갈았다.
빠드득.
곧이다.
곧 아들과 아내를 죽인 자와 그 자가 이끄는 군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죽여 버릴 것이야. 기필코!’
류켄은 치미는 살심에 이성을 거의 잃고 있었다.
흔한 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에 매우 조급하여 매사 너무 서둘렀다.
반면 카즈오 이토는 냉철하게 주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모습에서 노련한 지장의 면모가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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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를 논하는 정전, 회경전.
주변에는 무장한 무장들이 정연하게 각자의 자리에 서서 사방을 힐끔거렸다.
척 봐도 엄중한 경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뚜벅뚜벅.
난 큼지막한 섬돌로 이루어진 돌계단을 올랐다.
오용섭과 이웅을 포함한 몇몇 무장이 날 뒤따랐다.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고종 왕철.
그가 회경전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섬돌에 올라서자 해심을 비롯한 승병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들의 뒤에서 서너 명의 관복을 입은 자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내시였다.
난 눈을 반짝이며 멈춰 섰다.
“흠.”
고려의 내시는 조선의 내시와 다르다.
조선의 내시는 거세한 환관이고, 고려에서는 내관이라 부른다.
고려에서의 내시는 왕의 비서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속한 비서관쯤으로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해심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사전 논의는 어떻게 되었나?”
“최향이 죽었다면!”
해심은 말을 짧게 끊었다.
끄덕끄덕.
난 가지런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
최향이 죽음으로서 우봉 최 씨 가문이 단절되었다면 날 새로운 무신 정권의 권력자로 인정하겠다.
그것이 왕철의 답이었다.
모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정사를 행하는 집정자이자 집권자.
나를 그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왕철의 답에 난 실소했다.
“훗.”
보나마나다.
왕철은 날 새로운 무신 정권의 실권자로 보는 것이다.
보현원의 난을 시작으로 장장 100여 년에 걸친 무신 정권은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졌다.
나를 최충헌의 뒤를 잇는 새로운 권력자로 보는 것이리라.
‘아무렴 어때.’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해심이 좌측으로 돌아서자, 승병들은 우측으로 움직여 나란히 섰다.
은연중에 날 새로운 권력자로 인정하고 받들겠다는 속내가 엿보이는 행동들이다.
기꺼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씨익.
그 사이 서너 명의 관복을 입은 이들, 내시들이 내게 이르렀다.
그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이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내게 인사했다.
“내시 이장용이라 합니다.”
일순.
흠칫.
난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이장용!’
머릿속에서 이장용에 관한 것이 주마등처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