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38화 (238/247)

<-- 238 회: 9-15 -->

병사들은 긴장감을 느끼는 듯 얼굴을 경직했다.

이틀 전 최충헌이 죽었다.

한데 최향이 뜻하지 않게 장례를 서둘렀다.

형 최우를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부친 최충헌의 장례를 빨리 끝내고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행보를 밟았다.

다들 최향이 권력욕에 눈이 멀어도 엄청 멀었다고 수군거렸다.

“소리가 가는 것을 보면 수창궁쯤에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내 귀에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봉은사쯤에 있는 것 같은데.”

“에이. 자네들 둘 다 틀렸어. 지금쯤이면 십자가에 있을 거야.”

병사들은 저마다의 추측을 입에 올리며 선의문 안쪽을 힐끔거렸다.

왕궁 동문인 광화문을 나오면 좌우에 관청들이 있는 거리가 나온다.

그 앞쪽에는 한일자 형태의 번화가와 시전이 있는 남대가가 있고, 남대가를 따라 우측으로 쭉 가면 십자대로인 십자가가 나온다.

십자가 남쪽으로 돌아서며 시야에 한 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쭉 따라 이동하면, 그리 오래지 않아 길 끝에 자리한 선의문이 눈에 들어온다.

선의문에 이르는 길에는 별궁인 수창궁, 봉은사, 미륵사, 사직단 등이 있으며, 선의문을 나와 우측으로 돌아서면 지네산이 한 눈에 보인다.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사이.

별장, 산원, 위, 대정들이 선의문 곳곳을 뛰어다녔다.

“정렬!”

“제 자리를 지켜라.”

“반듯하게 서.”

별장, 산원, 대정들은 목청을 높여 서 있는 병사들을 다그쳤다.

병사들은 은연중에 못 마땅히 여기며 엉거주춤 자세를 고치는 척 했다.

상관들이 날뛸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뭔가 하는 척! 하는 것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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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위 누각에는 다수의 고위 무장이 모여 있었다.

중후한 인상을 주는 신호위 중랑장 정방영을 위시해 낭장과 별장 등.

중급 무장들이 나란히 서서 선의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에 성문 주변을 바삐 뛰어다니는 하급 무장들이 보였다.

“송 낭장.”

중랑장 정방영은 선의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네. 중랑장.”

우측 뒤에 서 있던 낭장 송재구가 재빨리 정방영의 곁으로 다가섰다.

중랑장 정방영은 송재구를 힐끗 돌아봤다.

“한 치의 허술함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나?”

걱정스런 목소리.

낭장 송재구는 자신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는 정방영을 향해 힘찬 어조로 대답했다.

“심려 마십시오. 중랑장. 제 목을 걸고 자신 있게……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낭장 송재구는 자신감에 충만한 표정을 지었다.

“훗.”

중랑장 정방영은 살며시 잔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운을 떼듯 말하며 돌아섰다.

정방영의 동작에 정렬한 중급 무장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상관에 대한 예.

“모든 채비를 다 마쳤습니다. 중랑장. 심려하지 마십시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머리를 드는 낭장들의 얼굴에는 강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정방영은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흡족해.

그런 감정을 내비치며 선의문 안쪽 저 머리를 봤다.

시야 가득.

요란뻑적지근한 장례 행렬이 선의문을 향해 느릿느릿 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흠.”

정방영은 낮은 어조로 단발의 침음을 흘렸다.

죽은 상국 최충헌의 장례는 국상으로 치러졌다.

황제가 죽어도 저렇게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존 시의 권력과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례 행렬이다.

“으음.”

중랑장 정방영은 재차 침음을 흘렸다.

시야에 보이는 장례 행렬에는 신호위의 상장군 손홍민과 대장군 오병준이 끼어 있다.

두 사람뿐 아니라 2군 6위에 속한 거의 모든 무장과 조정 문무 대소 신료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지금 자신이 있는 선의문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아닌 말로 시야에 들어오는 장례 행렬은 고려 조정이라고 말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저들만.’

정방영은 눈을 반짝였다.

장례 행렬을 형성한 자들만 죽여 없애 버리면 사실상 고려 조정은 텅 빈다.

정방영은 정면으로 돌아서며 얼굴을 경직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초조한 것이, 고갤 숙이며 오른손을 들었다.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눈가를 가늘게 떨었다.

바르르.

촉촉이 땀에 젖은 손바닥.

중랑장 정방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꿀꺽.

목숨을 걸어야 한다.

비단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의 목숨이 이번 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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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경 후.

길게 이어진 장례 행렬은 선의문을 멀찍이 지나, 지네산을 끼고 이동 중이었다.

길은 넓고 탁 트여, 장례 행렬이 지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소 상인과 상단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길 양쪽 끝에서 두어 장丈 떨어진 좌우에는 완만한 경사의 능선이 있었는데, 크고 작은 초목이 풍성하게 우거져 푸르른 녹음을 자랑했다.

장례 행렬 중앙에는 말을 탄 최향을 위시해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을 비롯한 측근들이 나란히 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말을 탄 터라, 거의 비슷한 시가에 내딛는 말발굽들이 내는 소리가 제법 컸다.

그 뒤로 엄청난 위용과 입이 쩍 벌어지는 큼직한 상여가 뒤따르고 있었다.

상여는 화려하게 울긋불긋한 종이꽃으로 장식되어, 내걸린 수많은 만장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듯 휘날렸다.

일련의 광경은 보기에 절로 경탄이 나올 것 같았다.

최충헌이 죽어서도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살아 생전 왕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고 죽어서는 왕 못지않은 호사를 누리는 최충헌은 죽음으로서 역사의 저 뒤편으로 이젠 사라졌다.

일순간.

“공격하라!”

난데없는 외침과 함께 길 양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크고 작은 노와 활이 장례 행렬을 향해 단전短箭과 화살들을 쏟아졌다.

단전과 화살이 공중을 섬광처럼 스치는 다수의 파공이 일었다.

파공은 매우 크고 세찼다.

쒜에에에에에에.

돌연한 변고와 같은 상항에 장례 행렬에 속한 이들은 몹시 당황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뭐, 뭐야?”

“누구냐?”

사람들의 고함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고함은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었다.

히이이잉.

별안간의 혼란에 말들이 울며 껑충껑충 뛰었다.

“워어어.”

“멈춰.”

안장에 앉은 이들은 탄 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장례 행렬을 호위하던 응양군의 무장과 병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촌각 동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기습에 다들 당황하여 잠시간 멍했다.

즉각적인 움직임은 일절 없었다.

그 사이 단전과 화살들이 장례 행렬을 덮쳤다.

“으아아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사람, 말, 상여, 지면 등등.

주변 모든 것에 단전과 화살이 박히는 울림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일련의 상황은 불과 두어 호흡의 시간 동안 일어났다. 그야말로 삽시간이었다.

한편.

길 양쪽에서 각기 1,500여 명씩. 모두 3천여 명의 군병이 뛰쳐나왔다.

우르르르.

군병들은 장래 행렬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모두 다 쓸어버려라.”

“죄다 쓸어버려.”

장래 행렬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군병들은 진득한 살의를 담아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외치고 또 외쳤다.

그 뒤쪽.

길 양쪽에서는 각종 노와 화살들 그리고 석포들이 장래 행렬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크고 작은 굽은 곡선들이 허공에 나타났다.

“크아아아악.”

“끄어어억.”

장래 행렬을 이룬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맹공격에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화살들이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몸에 박히고, 항아리들이 땅에 떨어져 깨어지며 화염을 일으켰다.

혼전이었다.

장래 행렬을 이룬 이들은 우왕좌왕 하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당황하며 속수무책으로 맹공을 허용했다.

빠르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한 폭의 지옥도가 그려졌다. 삽시간에 길바닥은 수많은 사람의 시신들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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