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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막대한 피와 희생이 불가피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신분제와 화폐 제도 그리고 교육 제도 등. 일련의 모든 것을 하려면,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모두 없애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유지하려는 자들.
십중팔구는 문벌 귀족 가문, 지방 호족, 대소 문무 신료로 대표되는 집단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지배층이니.
변화는 두려워하고, 자신들이 누리던 이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배척할 터.
필시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띨 것이다.
그들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며 고려라는 나라를 탈바꿈시키자면 백년이라는 시간도 모자를 것이다.
최단 시간 내에 고려를 최강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내가 생각하는 체계에 순응하지 못하고 저항하려는 자들을 일괄 숙청할 수밖에.
새로운 고려라는 집에 새로운 인물들을 채워 넣어, 국력의 신장을 꾀해야 한다.
기존의 것을 새로운 집에 담으면 내가 생각하는 바는 요원할 터.
만월을 보며, 난 눈을 반짝였다.
“고리타분하고 현실 감각이 없으며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중화를 떠받들려는 못된 습성을 키우는 유학자 따윈 이 나라에 필요 없어!”
확고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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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 연 성리학.
중국에서 유교라 불리는 성리학이 한반도로 들어온 시점부터 내가 살던 21세기까지 모든 것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취적인 기상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되는 근대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어 성리학은 방해밖에 안 된다.
유교라 불리는 성리학은 겉으로는 충과 효를 강조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필연적으로 중화라는 뿌리에 닿을 수밖에 없다.
위대한 중화!
그 징검다리에 놓인 것이 바로 공자, 맹자, 주자로 대변되는 성리학 유교다.
그들의 완벽하고 깔끔한 논리에 현혹되어 버리면 자연스레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아무 비평이나, 비판 없이,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유학은 주장하는 충효의 밑바탕에 중화라는 무서운 늪이 감추어져 있다.
중화로 대변되는 중국이 주변 국가와 타 민족을 자신들의 영향권 내로 편입시키고 자신들을 떠받게 만드는 첨병이 바로 유교, 성리학인 까닭이다.
베트남과 조선이 그 가장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조선을 둘째 치고 베트남은 조선 못지않게 성리학을 받아들여 공자묘를 세우고 중국의 것을 답습하여 국가 체계를 세웠다.
그 결과 잠시 흥했으나 종국에는 프랑스에 먹혀버렸다.
안으로는 매우 폐쇄적인 쇄국으로 일관했으며 밖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조선이 해금령을 내려 바다로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아갔더라면 유럽과 조우하였을 것이고, 과학 문명과 접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으니깐.
과거 19세기 서구에서 제국주의가 태동하고 세계 각지에 식민지라 이름의 약탈지를 만들 때 그 첨병을 한 것이 바로 기독교다.
서구의 기독교.
동양의 유교.
그 본질은 똑같다.
백인은 신으로부터 미개한 야만인들을 교화시키라는 천명을 받았다!
중화는 천자의 나라다.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세상 유일 무일한 나라이니 모든 열국은 신하국인 제후국으로서 중원의 천자를 섬겨라!
선민주의가 기독교와 유교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지만, 과거에는 분명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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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한 기독교와 대 중화주의의 근간일 이뤘던 유교를 생각하며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
지금 당장 고려에 접목시킬 수 있는 기초 교육 제도를 생각하며 머릿속을 뒤졌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뇌리 깊이 저장된 지식들.
문득 고구려의 교육 제도 중 하나인 경당이 생각났다.
“문무를 동시에 가르쳤었던 경당을 초중등 교육 과정으로 잡고 전문적으로 특정 과목만을 가르치는 단과대 성격의 고등 과정을 거쳐, 폭넓게 다양한 학문을 다루는…….”
머릿속으로 내가 권력을 잡은 이후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하아아아. 어렵다 어려워.”
화폐 재도도 정착시켜야 하고, 무엇보다도 신분제는 반드시 철폐해야 하며, 몽골과의 전쟁을 대비해 각종 무기를 개발해야 하고, 일련의 군사 편제도 짜야 하며, 관련 각종 교전 교리와 전술을 정립해야 하고, 경제로 필히 활성화시키고 크게 북돋워 성장시켜야 한다.
기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이 한도 끝도 없다.
“쩝.”
입맛을 다셨다.
“장르 책에서 보면 몇 년 안에 후딱 한 나라를 바꾸어버리던데.”
역시 상상이 빚어낸 허구였기 때문일까?
막상 내가 마주한 현실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바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널리 파장과 영향력이 퍼져나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젠장. 코앞에서 정신없이 사람이 죽고 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천우위, 감문위, 서가.
혼성군이 내가 있는 나주목으로 오고 있다.
“후우우.”
길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알고 있는 현대 기술들을 고려에 재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나 영감을 대상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절망밖에 얻지 못했다.
기초 과학 지식과 기술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도 이해 자체를 하지 못했다.
“나리. 뭐가 뭔지 모르는데요.”
이건 마치 원시인에게 성냥을 설명하는 기분이다.
성냥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용하며, 어떤 때 유용한지. 또한 어떤 제조 과정을 거쳐서 성냥이 만들어지고, 성냥에 깃들어 있는 과학적 원리와 지식 그리고 관련 기술들.
그냥 불을 붙이라면 신기해할 뿐, 이용은 가능해도 제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충 내가 성냥을 쓰는 것을 보고 따라 흉내는 낼망정 만든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제일 급선무야.”
중얼거리며 난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생각했다.
아이들은 백지다.
백지에 어떤 글자를 쓰던, 어떤 그림을 그리던, 어떤 것을 적던, 어이들은 솜이 물을 빨아들인 듯 가감 없이 받아들인다.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데 있어 아이들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단지 단계적인 교육 과정이란 일련의 계단을 밟아야 하고, 이해와 기억이란 과정을 거쳐야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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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대략 260 여 척에 이르는 배들이 포구를 빠져나왔다.
망망대해로 들어서며 배들은 일련의 형태로 대형을 갖춰, 대 선단을 형성했다.
촤아아아아.
대형을 갖춘 배들은 수면을 양쪽으로 가르며 하얀 물거품을 일으켰다.
뒤에 있는 수면에 긴 항적航跡이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선두에서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한 척의 배.
지휘선.
난 선수船首 갑판에 서서 물끄러미 전방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출렁이는 물살과 저 멀리 있는 지평선이 들어왔다.
끝이 없다!
그 말이 실감나는 광경이었다.
힐긋.
뒤돌아봤다.
활짝 펼쳐진 두 개의 돛이 보였다. 두 개의 돛은 바람에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다.
순간.
“풉!”
눈에 들어오는 돛에, 머릿속에 부푼 공갈빵이 떠올랐다. 그것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그 때.
“나리.”
날 부르는 주형의 외침에 멈칫했다. 천천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내 시야에 뛰어오는 주형이가 보였다.
주형은 날 향해 잽싸게 뛰어오고 있었다.
후다닥.
아무래도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가만히 주형이 내게 다가와 설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뒤.
면전에 주형이 이르렀다.
“나리.”
희색이 만연한 목소리였다.
의구심이 들어 물었다.
“뭐냐?”
“됐습니다. 됐다구요.
“뭐가?”
본론은 말하지 않고 들뜬 목소리로 언저리를 빙빙 도는 주형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너. 마음에 안 든다. 응.
그런 속내를 은근 슬쩍 드러냈다. 심중 성이 난다.
‘아우. 진짜.’
성질 같아서는 버럭 고함치고 싶은데, 주형이 놈이 의외로 여린 탓에 그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여간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사람 다루는 거니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능한 부드러운 표정과 분위기를 만들려 애썼다.
‘내가 미친놈이지.’
불과 며칠 전에 최송이와 서혜 그리고 서풍을 죽였다.
그런 내가 주형이 놈을 배려하기 위해 억지로 부드러운 척 해야 하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끓어.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짧은 시간 동안 주형은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서가, 천우위, 감문위 혼성군의 진군 속도가 배로 늘어났음을 알렸다.
“나리. 말씀하신 역정보가 먹혀들었습니다. 히히히.”
주형은 좋아라했다.
내가 신신당부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만면에 가득해 보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씩.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웃자. 웃어. 웃으면 복이 와요다. 젠장.’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다행이다. 아주 다행이야. 잘했어. 네가 아주 큰일을 해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