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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는 맹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상공의 수하인 주제에 상전의 부인을 업신여기는 것이야!”
성난 일갈이 터졌다.
군병들은 서혜의 기세에 눌려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보았다.
맹우는 무장답게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혜를 똑바로 응시하며, 조목조목 따지듯 설명했다.
“마님께서 오라비인 서풍에게 내준 배는 군선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야말로 나리의 심혈과 피땀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막대한 재물이 들어갔습니다. 그런 배를…… 나리의 허락 없이 그 누구도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는 없음입니다.”
서혜는 맹우의 말에 잔떨림을 흘렸다. 당혹이란 이름의 진한 감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분이는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아, 은연중에 맹우와 서혜를 번갈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여차하며 몸을 던져서라도 서혜를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선부들은 군선에 타는 순간, 군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즉 군문에 적을 둔 군병이나 마차가지란 말입니다. 나리의 명 없이 배를 움직이고, 움직이는 배에 올랐다는 것은 곧 군문의 이탈을 뜻합니다. 탈영이지요. 군문에서 탈영은 붙잡힐 경우 그 즉시 목을 베어 효수하는 중죄 중의 중죄입니다. 나리의 명 없이 움직인 순간부터 선부들은 죽은 목숨이었던 겁니다.”
“…….”
서혜는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맹우는 착잡한 심중을 담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서풍과 함께 움직인 선부들은 군령에 의해 모두 주살되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둘째 마님.”
순간.
비틀.
서혜의 몸이 양쪽으로 휘청거렸다.
털퍼덕.
분이는 서혜가 툇마루에 주저앉자 놀라 소리쳤다.
“마님.”
황급히 서혜에게 다가갔다.
맹우는 딱하다는 시선으로 서혜를 봤다.
“둘째 마님은 군문에 적을 두지 않았음에도 무단으로 나리의 인장과 명령서를 발부하셨습니다. 또한 선부들을 움직이는 데 앞장 서셨습니다. 군부의 무장이 아님에도, 나리의 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군무에 관여하신 것은 수십여 번 죽어도 부족함이 없는 중죄 중의 중죕니다. 군부의 무장이라고 할지라도 명령 없이 독단으로 휘하 군병들을 움직이면 그 즉시 군령에 의해 즉참되어 그 목이 효수됩니다. 군문에 적을 둔 무장이 그러할진대…… 마님은 스스로 죽기를 자처하신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디 나리께서 마님을 선처하시기를 바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맹우는 차마 뒷말을 이를 수 없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서혜는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한 얼굴로 하염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섬돌을 보았다.
군령軍令!
목에 걸면 목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다.
하나 절대 불변의 것이 몇 있으니, 병兵에 관한 사항은 철저한 지휘계통에 따라 내려온 명령에 따른다는 것이다.
군에 적을 두지 않았음에도 무단으로 명령 계통에 끼어듦은 죽기를 자처하는 행위다.
만약 이민호가 서혜를 용서할 경우, 향후 휘하 군병을 통솔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기강도 기강이지만 이 일이 선례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항한 83척 중 겨우 16척이 돌아왔다.
남은 67척의 배와 그 배들에 타고 있던 선부들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엄청난 재정의 손실은?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에게 응당 그 책임을 묻고, 행위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
맹우는 서혜를 지켜보며 얼굴빛을 흐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요?’
안타깝다.
모시는 나리 이민호의 성정으로 봐, 서혜를 살려둘 것 같지가 않다.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도에 넘어선, 일정 선을 넘어서버린 일에 추호도 용서라는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상시 엄중하고 준엄한 기강과 자세를 중시하는 나리 이민호이니.
4 장
코펜하겐에 있는 해양 역사 박물관에 전시된 중세 유럽의 범선의 경우, 2, 30여 명의 선원이 승선하여 범선을 운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이민호가 건조한 배와는 크기와 규모 그리고 톤 수 등.
다수의 차이가 있다.
이민호가 건조하여 타이라노 번의 정벌에 사용한 배들은 한 척당 선부가 최소 20여 명씩 승선했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따져보면 돌아온 16척에 탄 선부들은 모두 320여 명이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다.
선부들의 가족은 몰살이라는 공포에 눌려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무자비한 이민호의 처결에 나주목의 이들은 공포라는 감정에 젖어들었다.
매사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양민과 천민들 중심으로 다스려 왔던 나주목사 이민호의 무시무시한 진면모에 다들 벌벌 떨었다.
그 누구도 뭐라 말하지 못했다.
선처라는 자비는 일절 없어, 다들 이민호를 무슨 저승사자 보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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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형장.
둥…… 퉁, 퉁.
낮은 대고大鼓의 울림이 장중함이라는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금줄로 경계를 친 널따란 공간 중앙.
서풍, 최송이, 서혜.
세 남녀가 맨땅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은 맨땅바닥이라 땅에 박힌 돌부리가, 굴러다니는 자잘한 돌멩이들이 꿇은 다리를 파고들었다.
세 남녀의 머리에 벙거지가 씌워지고, 입에는 천 뭉치가 틀어박혀 마음대로 말하지도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없었다.
양손은 허리뒤춤으로 돌려져, 굵은 동아줄에 단단히 묶였다.
‘으, 우읍.’
최송이는 입을 틀어먹은 천 뭉치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머리와 몸을 번갈아 흔들고 뒤적이며 버둥거렸다.
풀기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입을 틀어막은 천 뭉치를 하얀 광목천이 덮으며, 최송이의 뒷머리에서 질끈 묶였다.
얼마나 단단히 묶었는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 억울해요.’
최송이는 결박된 몸을 양쪽으로 격렬히 뒤틀었다.
억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아 매우 답답해했다.
쓰, 쓰으으.
어떻게 결박을 지웠는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줄이 더 몸을 조였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난 억울하다고요.’
최송이는 마음속으로 고성을 질렀다.
그 사이.
이민호의 성난 외침이 들렸다.
“참하라!”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라 그리 여겼다. 남편이 자신을 죽이라고 명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안 돼!’
최송이는 곧 다가올 죽음에 몸을 격하게 뒤적였다.
몸부림쳐 죽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쉭.
귀에 들리는 나지막한 단발음單發音.
목에 무엇인가 서늘한 것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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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부刀斧手가 수중에 든 대도를 연이어 휘둘렀다.
최송이, 서혜, 서풍의 목이 차례대로 떨어져 맨땅바닥을 떼구루루 굴렀다.
그와 함께 진홍색 선혈이 분수인 양 사방으로 뿜어졌다. 주변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목이 없는 세 남녀의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스, 스르륵.
그 광경을 본 참형장 주변에 모여 선 이들.
“휴우.”
“쯧쯧.”
“에구머니나.”
그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한숨을 쉬는 사람, 탄식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사람, 머리를 숙여 하염없이 땅을 보는 사람, 머리를 들어 하늘을 물끄러미 보는 사람 등등.
참형장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민호의 무자비함과 독한 결단에 몸을 떨었다.
덜덜.
몸을 떠는 이들의 얼굴과 눈에서 공포라는 감정이 진하게 우러났다.
모두의 시선이 참형장 동쪽에 단상에 앉아 있는 이민호에게 쏠렸다.
앉은 이민호는 몸에 갑주를 걸쳤다.
은연중에 이 모든 것이 군령에 의한 것임을 알리는 갑주차림.
“저분이 이토록 무서운 분이실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리 온화하시고 부드러웠던 분이신데.”
“부인과 처남을 저리 죽이다니.”
“너무 무서워요.”
“허허.”
참형장에 모여 서풍, 서혜, 최송이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 조심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눴다.
다들 몹시 신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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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다.
서풍과 서혜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송이는 저리 죽일 것까지는 없는데.
‘어쩔 수 없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았다.
개경에서의 상황이 최송이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할 밖에.
원 역사에는 없는 최향의 거병으로 최우가 죽었다.
내가 최향을 쳐 없애고 최우의 사위로서 정당한 승계권을 주장하면, 지금쯤이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최충헌의 뒤를 이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난 우봉 최 씨 가문의 정당한 상속권자로서 최충헌과 최우의 추종자들을 규합 하여 세를 구축한 후 새로운 무신 정권 체계를 세울 수 있다.
물론 모든 권력을 틀어쥔 것은 바로 나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새로운 그릇에 구태라는 이름의 물을 담고 싶지 않다.
새로운 그릇에는 새로운 물을 담아야 하는 법!
‘새로운 고려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필요해.’
최향은 얼마든지 처리할 자신이 있다.
최충헌이 내게 건넨 힘을 십분 활용하면, 내가 염두에 두는 전술대로 휘하 군병들이 움직여 준다면, 일련의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흘러준다면
‘정권을 세우고, 내 손아귀에 권력을 쥘 수 있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흠칫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권력욕이라는 이름의 탐심貪心이 꿈틀거렸다.
이건 아니지!
난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윽.
양손으로 좌우 팔걸이를 잡고 눌렀다. 그와 함께 단단히 마음먹었다.
‘새로운 고려를!’
이전의 고려는 피와 죽음이란 매개체로 역사의 저 편으로 흘려보낼 것이다.
역사가들이 사상 최강의 제국이라 평가했던 몽골 제국.
아시아 아니 나아가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몽골 제국과 일전을 겨뤄보고 싶다.
물론 몽골 제국 못지않게 고려를 발전시켜 국력을 키워야 한다.
특히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
몽골은 대규모 기마를 동원할 수 있다.
그들의 전형적인 군사적 특징 중 하나가 점령지의 군사력을 흡수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고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승부욕이 인다.
‘한 번 해 봐!’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돌아서며 칭기즈칸을 생각했다.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는 내 가슴에서 흥분이란 감정이 일었다.
이미 역사는 상당히 뒤틀어졌다.
칭기즈칸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 정벌이 생각 외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 역사에서처럼 나약한 고려는 이제 없을 것이다.
양민과 천민들이 나서서 침략한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강화도에 처박힌 왕실과 문벌 귀족들 그리고 대소 문무 신료들.
‘그들 모두…… 지운다!’
형형한 안광은 번뜩이며 심중 살의를 품었다.
주변에 서 있던 무장들이 걸어가는 날 뒤따랐다.
무장들 모두 얼굴을 굳히며 안색을 흐렸다.
최송이, 서혜, 서풍을 죽임으로서 난 그들에게 군령을 어기면 추호의 용서도 없음을 보였다.
그러니 어설픈 짓 따윈, 처한 정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피부로 느낄 것이다.
군병을 통솔하고 지휘하는데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도 중요하지만‘ 어기면 죽는다!’ 라는 엄정한 군기와 기강도 중요하다.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지 말라는 짓을 할 인간은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