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30화 (23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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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도살이 포구를 휩쓸었다.

석포, 궁병대, 노궁병대로 이어진 중장거리의 타격이 행해진 포구로 장창병대와 검병대가 들어섰다.

장창병대와 검병대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와 선부들을 눈에 띄는 대로, 닥치는 대로 주살했다.

중, 장거리의 타격에서 살아남아 혼비백산한 양광도 호족 연합군의 병사와 선부들은 주살하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투, 투항할게.”

“나야. 나라고.”

“우린 같은 편이잖아.”

장창병대와 검병대는 애원을 못 들은 척 했다.

굳을 대로 굳은 얼굴과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손짓으로 병사와 선부들을 몰살이라는 현실로 몰아넣었다.

포구 너머에 있는 바닥에 빠진 병사와 선부들은 잠시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상황이 종료됨과 동시에 움직인 노궁병대에 의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포구에 있던 이들을 몰살 시키는데 걸린 시각은 고작 한식경이었다.

가공이란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력에 양광도 호족 연합군의 병사와 선부들은 결국…….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민호의 독랄함과 잔인함 그리고 분노가 실로 처참지경이란 말이 절로 떠오를 참극을 낳았다.

살아남은 세 사람.

서풍, 조규, 이정찬은 포구 외곽에서 황곤이 이끄는 기마병단에 생포되었다.

황곤은 그들을 이민호에게 끌고 갔다.

안장에 앉은 이민호의 맞은편 지면에 무릎 꿇은 세 사람은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서풍은 비분강개했다.

“나와 그대가 남인가? 처남배부지간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서풍은 침묵한 이민호를 질타했다.

“이공李公!”

조규는 평상시의 냉정함을 잃고 눈을 부릅떴다.

“우리 서가는 이공의 처가가 아니오. 한데 이 무슨 참람한 짓이란 말이오!”

격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정찬은 분노라는 감정을 입을 통해 쏟아냈다.

“서 장자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분노하실지, 정녕 모르시는 게요.”

이정찬은 서양헌이 결코 이 일을 묵고하지 않으리라, 필히 보복하리라,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그런 속내가 담긴 어조로 고함쳤다.

세 사람의 악다구니에, 이민호의 주변에 서 있는 무장들은 한결 같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이민호를 바라보며 불안이라는 감정을 내비쳤다.

하나.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침묵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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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만히 주절대는 서풍, 조규, 이정찬을 바라보았다.

피식.

비아냥거리는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서풍, 조규, 이정찬은 안장에 앉은 이민호의 작은 미소를 보곤 움찔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풍은 서혜와 함께 참형장에서…… 조규와 이정찬은 지금 당장 죽여, 그 목을 관아 정문에 걸어라. 나주목의 이들에게 내 분노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똑똑히 알게 하라.”

모골이 송연한 이민호의 목소리.

서풍, 조규, 이정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잔떨림을 흘렸다.

덜덜.

이민호가 무슨 악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서풍, 조규, 이정찬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멀거니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뭘 잘못들은 것은 아닐까?

서풍, 조규, 이정찬의 얼굴에 그와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그 사이.

고삐를 당겨 우측으로 말을 몰아가는 이민호를 오용섭과 이웅이 지켜보았다.

“추호의 용서도 없다? 휴우우.”

오용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호의 무시무시함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지난 날 양광도에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민호는 최충헌의 가병들이 자신의 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본보기로 서너 명의 목을 베려하였다.

그 때 이미 이민호의 독심을 엿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혜가 요구한 군병의 출병을 한사코 반대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나리가 한 번 분노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올는지 이 사람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귀에 두려움이란 감정에 사로잡힌 이웅의 말이 들렸다.

“흠.”

오용섭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무릎 꿇은 서풍, 조규, 이정찬을 돌아봤다.

“어리석은 자들.”

그 사이.

이웅이 주변에 서 있는 하급 무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들 하고 서 있는 게야. 당장 나리께서 명하신대로 하지 않고서.”

“네, 네에에.”

하급 무장들이 화들짝거리며 황황급급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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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의 거처.

“뭐라고?”

고성을 지르며 서혜는 앉은 원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녀 분이는 몹시 황망해했다.

“나리께서 조규, 이정찬 두 분의 목을 베시고 서풍님을.”

포구에서 이민호가 명한 것을 빠르게 서혜에게 말했다.

서혜는 망연자실했다.

“…….”

말을 잃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급변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격앙된 감정이 가감 없이 얼굴에 나타났다.

부르르.

서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 어찌!”

믿을 수 없다 중얼거리며 서혜는 몸을 휘청거렸다.

“마님!”

분이가 휘청거리는 서혜를 급히 부르며 원탁을 돌아갔다.

서혜가 원탁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탓에 가까이 가자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

서혜는 손을 옆으로 뻗어 원탁을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닌데.

자신이 한 행위가 이처럼 참혹한 결과를 만들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단 말인가?

남편인 이민호가 밉다!

겨우 배와 선부일 뿐이지 않은가?

그깟 것쯤 처남에게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핏줄 사이에 이리 무서운 일을 벌일 만큼 중차대하단 말인가?

서혜는 탁자로 몸을 돌리며 양손으로 짚었다.

머리를 숙여 어지러움을 이겨내려 하는데, 곁으로 분이가 다가와 섰다.

“마님.”

“날 부축해다오.”

“마님.”

분이가 연이어 안타까운 어조로 자신을 불렀다.

“어서!”

서혜는 고함치며 분이를 돌아봤다.

분이는 화들짝거리며 급히 대답했다.

“예. 예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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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는 분이의 부축을 받으며 방밖으로 나왔다.

방문을 열고 섬돌과 이어진 툇마루를 걷는데, 기척에 뜰에 서 있는 수십여 명의 군병이 뒤돌아보았다.

군병을 통솔하는 맹우 역시 돌아서며 시야에 보이는 서혜의 모습에 잠시 몸을 움칫거렸다.

당혹스러워하는 속내가 엿보이는 움칫거림이었다.

“들어가십시오!”

맹우는 굵은 목소리로 서혜에게 주의를 주었다.

분이는 맹우의 언동에 흠칫거리며 꺼리는 얼굴빛을 띠었다.

“마님.”

슬쩍 서혜를 돌아보았다.

서혜는 분이의 부축을 받으며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감히!”

성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녕 누군지 모르단 말이냐?”

서혜의 외침에 군병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꺼리는 바가 상당한 모습이었다.

맹우는 무장답게 위맹한 어조로 대꾸했다.

“연금을 명하신 분이 나리십니다.”

“닥쳐라!”

서혜는 엄히 소리치며 맹우를 질타했다.

그 기세가 가히 여장부라 맹우는 몸을 움찔거리며 옅은 곤혹스러움이 깃든 작은 눈빛을 반짝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민호의 네 부인 중 서열 두 번째인 서혜다.

여느 여인답지 않게, 웬만한 무장과 견주어도 하등 부족함이 없는 당찬 성정의 소유자라 맹우는 내심 난감해했다.

‘이런 젠장.’

맹우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서혜는 툇마루로 끝으로 다가갔다.

막 발을 떼어 섬돌에 놓인 신을 신으려하는데.

촹.

차, 착.

일련의 낮은 울림이 들렸다.

서혜가 귀에 들린 울림에 몸을 흠칫거림과 동시에.

“꺄아아악!”

분이가 자지러졌다.

맹우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었다.

그와 함께 군병들이 각기 소지한 무기, 창과 노궁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여차하며 쏘겠다!

군병들이 행동으로서 말하는 무언.

“안 돼에에!”

분이가 금방이라도 서혜가 죽는다 생각한 듯, 벼락이 치듯 빠르게 움직였다.

서혜의 앞으로 뛰어가 몸으로 가리며 양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부, 분아.”

서혜는 당황했다.

설마 분이가 몸으로 자신을 막아설 줄은 몰랐다.

맹우는 분이의 행동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슥.

왼손을 어깨를 들었다.

“그만.”

낮은 어조로 말하자.

군병들은 소지한 무기를 내리며 머쓱한 기색을 띠었다.

맹우는 분이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서혜에게 말을 건넸다.

“좋은 시녀를 두셨습니다. 둘째 마님.”

서혜는 손을 들어 분이를 왼쪽으로 밀쳤다.

“비켜봐.”

“마님.”

밀려나며 분이는 서혜를 보았다.

서혜는 힐긋 분이를 돌아봤다.

“네 목숨을 소중히 여겨.”

건성으로 말하는 서혜의 눈동자에 한 줄기 따듯한 정감이 감돌았다.

‘고맙다. 분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시녀 분이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분이는 밀려났지만, 혹여 서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잽싼 발놀림으로 서혜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서혜는 맹우를 응시하며 질책했다.

“비록 나리께서 날 거처에 연금하셨다고는 하지만 나는 엄연히 나리의 부인이다. 내가 상공을 만나려 하거늘. 누가 감히 날 막아선단 말이냐?”

엄히 꾸짖었다.

맹우는 서혜의 말에 답답하다는 얼굴빛을 띠었다.

“아직도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십니까? 마님.”

서혜의 눈가가 미미하게 위아래로 실룩였다.

“…….”

말없이 맹우를 노려봤다.

맹우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완만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님께서는 결코 하셔서는 안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은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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