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29화 (22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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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시간이 꽤 흘렀다.

2천여 명에 이르는 군병은 포구가 공격권에 들어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섰다.

일사불란하고 정연한 대열이었다.

대열 정중앙.

나는 오용섭과 이웅을 비롯한 무장들을 대동하고 오연히 섰다.

탄 말이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며 투레질했다.

히힝.

굳은 얼굴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서풍이 조규, 이정찬, 황산해를 거느리고 마주 서 있었다.

그들의 뒤쪽에는 양광도 호족 연합군의 병사와 선부들이 모여 무리를 지었다.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이 엿보였다.

난 천천히 좌에서 우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무기를 버려라.”

근엄한 어조로 외쳤다.

웅성웅성.

병사와 선부들이 당황하며 서로 돌아보았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당황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묵어났다.

“매제.”

서풍이 앞으로 서너 걸음을 걸어 나오며 친근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외침에 담았다.

“지금부터 셋을 센다. 그 전에 무기를 버린 자는 뒤로 멀찍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어라.”

“매, 매제!”

서풍이 목소리를 높여 날 불렀다.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지 않는 자는 싸우겠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지극히 차가운 내 외침에 선두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나, 나리.”

“저희들입니다. 나리.”

“왜 이러십니까? 나리.”

선부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행여 자신들이 교전에 휩싸여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죽지는 않을까? 다들 두려워했다.

“나리. 접니다. 저 황산해입니다!”

황산해가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난 황산해의 모습에 왼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활!”

“예에.”

왼쪽 지면에 서 있는 주형이 재빨리 들고 있던 활을 내게 내밀었다.

양손으로 활을 바쳐 올리는 주형이었다.

착.

왼손에 활을 쥐자마자, 망설임 없이 안장 우측에 매달린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빼들었다.

왼손에 움켜쥔 활의 시위에 화살을 쟀다.

쭈우우우우.

시위를 잡아당기자, 보름달 같은 둥근 원이 나타났다.

거침없이 시위를 놓았다.

팅.

시위를 떠난 화살이 빛인 양, 한 줄기 광선이 되어 뻗어나갔다.

순간.

쌔에에에에에에에에에.

무의식적으로 눈살이 찡그려지는 강렬한 파공이 울렸다.

화살은 삽시간에 달려 나오는 황산해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창졸간에 이루어진 궁사.

“…….”

황산해는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자신에게 화살을 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퍽.

알아듣기 어려운 소성小聲이 울렸다.

황산해는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미간에 박히는 화살이 준 충격에 뒤로 나가뒹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 걸음 떨어진 지면에 이르러 꼬꾸라졌다.

맨땅을 구르는 황산해의 모습에 서풍을 비롯한 포구에 모여 있는 이들 모두 아연실색했다.

“아악.”

“허어억.”

다들 창황蒼黃하는 모습이었다.

난 활을 내리며 고성을 질렀다.

“하나!”

고성은 사위로 메아리쳤다.

“둘!”

내가 마지막 남은 셋을 내뱉기 전.

“매제 이 무슨 참람한 짓인가?”

서풍이 내게 소리쳤다.

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오른손을 어깨로 들며 고성을 질렀다.

“셋!”

마지막까지 세자마자, 뒤에서 오용섭과 이웅의 외침이 들렸다.

“공격!”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감정을 배제한, 죽이겠다는 살심만이 그득한 명령이 2천여 군병에게 전파되었다.

@

서풍은 경악실색했다.

“미, 미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민호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시선이 부지불식간 죽은 황산해를 향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황산해의 시신.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는 광경이다.

서풍은 부친 서양헌이 이민호에게 준 활을 상기하며 얼굴빛을 흐렸다.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좌우에 서 있는 조규와 이정찬이 서풍을 돌아보았다.

“이 무슨!”

서풍은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놀라고 있을 겨를이 없건만, 서풍은 자신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주군.”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조규와 이정찬은 매우 큰 위험이 닥치기 직전임을 알아챘다.

황산해를 이민호가 죽였다.

무기를 버리라는 이민호의 경고.

조규와 이정찬은 이민호가 이성을 잃고, 포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려함을 깨달았다.

미친!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단 말인가?

조규와 이정찬은 자신들이 나주목에 와, 패전한 후 포구에 이른, 일련의 모든 행위가 이민호의 살심을 무지막지하게 돋았다는 것을 직시했다.

피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 죽는다!

조규와 이정찬은 그런 위기감을 느꼈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서풍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황이었다.

@

그 사이.

슈, 슈, 슈우우우우.

긴 파공을 흘리며, 다수의 항아리가 허공을 지나쳤다.

수백여 개에 이르는 완만하게 굽은 곡선.

돌 대신 가벼운 항아리를 실어 쏨으로서 상대적으로 사정거리를 늘리고, 화공이란 대단위 인명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인명 살상용 대인 병기로 화한 석포의 공격.

간단한 생각의 전환만으로도 그 결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달라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전쟁을 아는 자와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의 차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굽은 곡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포구 곳곳에 떨어졌다.

와장창창.

바닥에 떨어진 항아리는 충격에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졌다.

휘, 휘, 휘익.

주변으로 깨지고 부서진 파편들이 서 있는 병사와 선부를 덮쳤다.

“으아아아아.”

몸에 박히는 크고 작은 자잘한 파편에 병사와 선부들은 비명을 질렀다.

한편.

깨지고 부서진 항아리에 담긴 기름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항아리의 마개를 막은 불붙은 천 뭉치가 쏟아진 기름에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화염이 일었다.

화르르르.

화염은 주변에 모여 있는 불운한 몇몇 병사와 선부들을 덮쳤다.

살아 있는 뱀인 양.

병사와 선부의 몸을 부지불식간에 휘감더니 한 입에 집어 삼켰다.

“끄아아아아.”

“살려줘. 아아악.”

온몸에 불이 붙은 병사와 선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불이 붙은 채 양쪽으로 휘청거리며 거칠게 몸부림쳤다. 몸부림은 잠깐이었다.

불이 붙은 병사와 선부들은 바닥으로 엎어지고 쓰러졌다. 불은 순식간에 병사와 선부들의 몸을 뒤덮었다.

“크아아아아악.”

“제, 제발…….”

죽어가며 내지르는 외침과 비명으로 주변은 떠들썩했다.

그 사이.

공중에서는 항아리들이 계속 떨어졌다.

양광도 호족 연합군 병사들은 직면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선부들은 아는 바가 있어, 고함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피해.”

“모여 있으면 다 죽어.”

일부 선부들은 뒤돌아, 포구 너머에 있는 바다로 뛰었다.

뒤이어.

기존의 활을 든 궁병대들이 시위에 화살을 재었다. 삽시간에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수많은 화살이 연이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삼시연발법에 의해 쏘아진 화살들은 수많은 포물선을 그리더니 포구를 향해 급전직하했다.

퍼퍼퍼퍼퍽.

화살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포구 바닥에 꽂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포구에서 우왕좌왕하는 병사와 주위로 흩어져 달아나는 선부들을 덮쳤다.

고심도치마냥.

몸에 화살이 박힌 병사나 선부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우아아악.”

선부들은 기절초풍할 듯 놀라 당황했다.

왜 자신들은 이민호와 군병들이 공격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아군인데.

선부들은 자신들과 이민호가 이끄는 2천여 군병이 한편이라 생각했다.

“나리이이이이!”

“왜  저희를 죽이려 하십니까?”

“멈춰!”

“나라고. 나란 말이야아아아.”

선부들은 흩어지며 이민호가 이끄는 2천여 군병에게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전에 각기 지휘하는 십인장, 백인장을 통해 무지막지한 이민호의 명령을 전달받은 2천여 군병은 무표정했다.

반복적으로, 훈련받은 대로.

묵묵히 각자 소지한 무기로 포구에 모여 있는 병사와 선부들을 공격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아무 말 말고 명령에 따르라.”

“나리께서는 그들을 모두 배신자로 간주하신다.”

“배신자는 추호의 용서도 없다는 것이 나리의 생각이시다.”

“애초에 그들은 그리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리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안다면 말이다.”

“너희들이나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리의 분노가 하늘을 짜르니.”

“명심해라. 죽이지 않으면 너희가 명령 불복종으로 군령에 따라 죽을 것이다.”

“어설픈 감정 따윈 버려라. 그들은 우군이 아니라 이젠 적군이다.”

“주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음을 잊지 마라.”

십인장과 백인장은 휘하 군병들에게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에 군병들은 한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고 충실히 명령에 따랐다.

가슴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슴이 아파도 너무 아프지만,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에에!’

‘그렇게 나리를 배신하지 말지.’

‘다들 그렇게 말렸는데.’

2천여 군병은 다들 마음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석포에 이은 궁병대의 공격이 포구를 직격하는 사이 노궁병대가 전진했다.

노는 기존의 활보다 사정거리가 짧지만 관통력은 오히려 배 이상이다.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노궁이 본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노궁병대는 앞으로 움직였다.

노궁병대와 함께, 앞뒤에서 장창병대와 검병대가 함께 움직였다.

한편.

황곤이 이끄는 기마병대는 포구 좌우로 이동, 포구를 빠져나오는 일부 병사와 선부들을 무자비하게 척살하고 있었다.

일련의 상황은 매우 숨 가쁘게 이어졌다.

지켜보는 이민호의 휘하 무장들은 가슴 아팠다.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못 볼 것을 보는, 한때 우군이었던 선부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다들 참담해했다.

그에 안색이 몹시 어두웠다.

도저히 지켜볼 수 없다는 속내를 드러내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거나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암담이란 감정이 서 있는 무장들에게서 진하게 우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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