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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고려 시대의 시간으로는 사경四更 축시丑時 말末.
무장들에 이어 무승들을 상대하느라 난 꽤 지쳤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거처로 들어서자, 뜰에 서 있는 이세연과 조연이 시야에 들어왔다.
날 기다린 모양이다.
“나리.”
“나리.”
이세연과 조연이 날 보곤 동시에 외치며 반색했다.
속내가 훤히 보인다.
최송이와 서혜.
두 여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여인을 살려둘 수는 없다.
서혜는 군령장을 위조하였으며 나주 목사의 관인을 무단으로 사용하였다.
그것만으로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할 수 있다.
서풍이 데리고 간 선부와 83척의 배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천만다행이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선부들 중에서 사상자가 나오거나 배가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죽음과 피해를 누가 책임질 거냐?
난 머리에 떠오른 그런 상념에 격한 감정이 일었다.
가까이 걸어가자, 이세연과 조연이 마주 다가와 섰다.
아니나 다를까?
“나리.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의 연금을 풀어주세요.”
“둘째 형님이 큰 잘못을 하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나, 그래도 저희와 함께 나리를 모시는 신분이니.”
봐 달라.
이세연과 조연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랬다.
난 모르는 척 하며 옆으로 돌아섰다.
시야에 보이는 내 거처를 향해 걸어가며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야심한 시각이오. 이제 그만 가서 쉬도록 하시오.”
“나리.”
이세연과 조연이 동시에 날 불렀다.
난 매몰찬 목소리로 언짢은 속내를 내비쳤다.
“관여하지 마시오!”
이세연과 조연은 냉랭한 내 태도에 움찔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그새 거처 섬돌에 이르러, 올라서며 신을 벗었다. 곧바로 툇마루에 올라서며 곧장 방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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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연과 조연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려 서로 마주보았다.
“형님.”
“나리께서 어찌.”
이세연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민호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아 황망해했다.
조연이 그 눈치를 읽고 이세연을 다독였다.
“형님. 둘째 형님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셨잖아요. 상공께서 도저히 용서하시기가 어려우신 듯 하니. 우리 이만 돌아가요. 설마 상공께서 두 분을 죽이시기야 하시겠어요.”
“상공이 저리 차가운 분이 아니신데.”
이세연은 닫힌 방문을 쳐다보며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띠었다.
최송이와 서혜의 구명을 위해 이민호에게 선처를 호소하려 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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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나주목은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1천여 명의 군병이 나주목을 인근 고을들과 철저하게 단절시켰다.
그 누구도 나주목을 드나들지 못했다.
군병들의 무기를 손질하고 군량미의 재고를 파악하며, 포구에 정박한 배의 상태를 살폈다.
출정을 위한 군병들의 재편성과 지휘할 무장의 임명 등등.
일련의 군무가 숨 가쁘게 처리되었다.
병참은 맡은 나 영감은 몸에 탈이 생길 정도로 연일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그 사이.
석포병들은 항아리와 기름 등. 일련의 물자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차,
“나리, 출정했던 배들이 돌아옵니다.”
“83척 모두냐?”
난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한 황곤에게 물었다.
“그것이…….”
황곤은 말끝을 흐렸다.
난 83척에 이르는 배들이 온전치 않음을 알아챘다.
“포구로 지금 들어오는 배가 모두 몇 척이냐?”
내 물음에 황곤은 대답하지 못했다.
성냈다.
“묻지 않느냐?”
황곤은 몸을 움츠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겨, 겨우 16척 밖에 안 됩니다.”
난 기막혀 할 말을 잃었다.
출정 나갔던 배는 83척이다. 그런데 16척이 돌아오다니. 나머지 67척의 배는…….
눈앞이 아득하다.
머리가 멍하고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렸다.
“내, 내가 어떻게 건조한 배인데. 선부들을 키우기 위해 내가 얼마나 정성과 공을 들였는데. 그걸 모두 한순간에 날려버리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뒤이어 살의가 무럭무럭 일었다.
“이노오오옴. 서어어어푸우우우웅.”
내가 없는 사이에 서혜를 꼬드겨, 배와 선부를 강탈하여 출정하고서는 기껏 16척 밖에 돌아오지 못하다니.
“황산해”
같이 동조한 항산해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면, 당장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어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최충헌이 보낸 자라 하여, 유일하게 해전을 알고 있는 수군 장수라, 항로를 알아 선단을 무사히 왜로 이끌 사람이라 믿어, 무던히도 참고 참으며 남다른 배려를 해주었는데.
“이리 날 배신해!”
치가 떨렸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살의에 난 격렬히 이를 갈았다.
빠드드드드.
황곤이 나를 보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히익.’
쳐다보는 눈동자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어렸다.
황곤은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싸늘한 냉기가 등골을 훑어 내리는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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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척의 배가 차례대로 포구에 접선하였다.
선체를 옆으로 돌린 배에서 잔교가 내려졌다. 잔교는 포구에 닿으며 충격에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출렁거림이 잦아들자,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군병, 선부들이 잔뜩 풀 죽은 모습으로 잔교를 지나 포구로 내려섰다.
다들 매우 의기소침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걸음만 내딛었다.
저벅저벅.
패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진하게 묻어난 광경이었다.
군병과 선부들은 포구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비록 패전하긴 하였으나 살아 돌아왔다. 환영과 환호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왔으니 가족들의 마중과 위로는 받고 싶은데.
“다들 어디 갔지?”
“그러게 말이야.”
“설마 우리가 패전했다고 나와 보지 않는 건 아니겠지?”
그들 중 일부가 꺼림칙한 속내를 내비쳤다.
“설마?”
“후우우우.”
“또 모르지.”
그들은 서로 돌아보며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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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과 선부들이 서 있는 포구 중앙.
서풍은 착잡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주변에는 황산해, 조규, 이정찬이 흩어져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얼굴에 의문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괴이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가 있는가?
황산해, 조규, 이정찬은 두리번거리는 포구가 휑한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
서풍은 심중 이는 일말의 불안감에 얼굴빛을 흐렸다.
‘혹?’
이민호가 그새 돌아온 것은 아닐까?
돌아와 자신이 서혜의 도움을 받아 배와 선부들을 데리고 출정한 것을 안 것은 아닐까?
이미 배는 선부들을 태우고 망망대해로 나간 뒤라, 돌아온 이민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분통을 터트리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한데 패전하고, 태반에 이르는 배와 선부들을 잃고 돌아온 까닭에 이리 냉대하는 것은 아닐까?
서풍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이민호가 화났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필경 이민호가 성낼 것이나 여동생 서혜가 잘 말했을 것이고, 부친과 자신이 장인이고 처남이니.
이민호는 꾸욱 눌러 참을 수밖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서풍은 그리 생각했다.
명백한 오판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 이민호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음이다.
돌아가는 개경의 정세가 매우 급박하며, 이민호가 배와 선부에 들인 심혈이 어느 정도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패전한 장수, 패전지장인 까닭에 서풍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숙였다.
시야에 포구 바닥이 들어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패전지장은 유구무언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패전은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해전을 수행할 수 있는 수병이 없어서, 휘하의 호족 연합군 3천은 육전 전문이라 해전 경험이 없어서, 하필 츄코쿠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난데없이 기습을 받아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서풍은 그리 생각하곤 마음속으로 강경하게 중얼거렸다.
‘난 패전하고 싶어 패전한 것이 아니란 말이야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기습을 받지만 않았어도, 아니! 황산해가 제대로 지휘만 해줬어도! 패전 따윈 하지 않았을 거야.’
서풍은 분한 마음에 고갤 좌로 돌렸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황산해가 보였다.
해전 경험이 풍부하다 하여, 이민호가 남달리 아끼는 최충헌이 보낸 수군 장수.
그것이 세인의 평가라, 재물을 아끼지 않고 황산해를 구슬렸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며 그리 재물을 풀지 않았을 것이고, 황산해를 어렵사리 회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풍은 치미는 분기에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
마음 깊은 곳에서 당장 칼을 빼들어 황산해의 목을 치고 싶은 강한 충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주, 죽여 버리고 싶다!’
서풍은 격렬한 살의에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황산해는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이민호에게 속한 자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건 이민호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자신에게는 그리 할 권한도, 권리도 없는 까닭에 눌러 참을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차라리!’
서풍은 격정적인 눈빛을 띠며 황산해를 노려봤다.
해전에서 죽어 벼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심 그런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서풍이 생각하는 사이.
드드드드.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다수의 뭔가가 구르는 소리였다. 소리는 차츰 또렷하게 들렸다.
포구에 서 있는 이들은 흠칫흠칫거렸다.
영문을 몰라 하며, 소리가 들리는 언덕을 쳐다봤다.
포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언덕.
하나둘 석포와 중무장한 군병들이 나타났다.
웅성웅성.
포구에 서 있는 이들은 당황했다.
“뭐, 뭐지?”
“무슨?”
다들 의아해하며, 마음 한구석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언덕에 나타난 석포와 군병.
혹시 자신들이 공격받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
석포는 엄연히 공성 병기이자, 성을 지키는 방어 병기다. 그런 석포를 대인 살상용 병기로 바꾸어 버린 것이 이민호다.
해전에서 살아남은 양광도 호족 연합군의 병사들은 석포의 위력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체험한 적이 없어 무지했다.
하지만 선부들은 병사들과 달리 석포가 얼마나 위력적이며 무시무시한 병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타이라노 번 공략시 보고 들은 바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부들은 잔떨림을 흘리며 본능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서, 설마.”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선부들은 진한 꺼림이 밴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한편.
“주군.”
조규와 이정찬은 서풍의 곁으로 급히 다가가 섰다.
그 사이.
황산해는 언덕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덕에 나타난 석포들은 일렬로 정렬하는 광경이 시야에 보였다.
그 사이사이에서 중무장한 2천에 달하는 나주목 소속 군병이 움직이고 있었다.
긴 철창을 손에 들고, 등에는 큼지막한 사각의 방패를 든 장창병대.
그 뒤를 연결하듯 잇는 혼성 궁병대.
노弩를 든 노궁병대와 기존의 활과 화살이 가득 담긴 전통을 옆구리에 찬 궁병대.
혼성궁병대의 뒤에 정렬한 검을 든 검병대.
일련의 병대들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서 천천히 기동하기 시작한 기마병대.
2천에 이르는 군병은 정연하게 발맞추어 걸으며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척, 척.
내딛는 발이 한둘이 아닌 터라, 지면을 밟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군병들은 한일자의 장사진長蛇陣을 형성하며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은연중에 크게 이는 전운이라고나 할까?
칼날 같은 군기軍氣가 일었다.
군기는 사방으로 짓쳐나가며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황산해는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깊은 불안과 당혹감을 피력했다.
“이, 이것이 다 무슨……?”
나지막한 중얼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