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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라아아아. 단 한 척의 배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다 수장시켜라.”
타이라노 류켄은 손에 뒨 왜검을 머리 높이 치켜들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극렬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살의가 물씬 어린 외침이었다.
류켄의 우측에 서 있는 장년인 카즈오 번의 번주 카즈오 이토는 류켄을 힐끔거렸다.
‘허어.’
안타깝기도 하지만 진한 꺼림칙함이 먼저 일었다.
류켄이 아내와 아들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것 같아 이토는 걱정스러웠다.
류켄은 그간 고려라는 말과 연관이 있는 모든 것에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쏟아내곤 했다.
이토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원한과 복수라는 감정이 골수에까지 미친 류켄이라, 다른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터라, 류켄을 지근에서 지켜보며 심중 조마조마했다.
돌발적으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심히 우려되고 우려되었다.
‘휴우.’
이토는 그 사이 서너 걸음을 내딛는 류켄을 곁눈질하며 마음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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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
류켄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카즈오 번의 선단에 속한 배들을 향해 목이 터져나가 고함쳤다.
“죽여! 죽여 버리란 말이야!”
한 맺힌 고성이었다.
안제부터인가 류켄의 망막에 뿌연 물기가 끼었다.
눈앞애서 죽은 아들 아키마루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으아아아아. 죽여라. 죽여어어어.”
류켄은 가슴에서 터져 오르는 슬픔을 머금은 분노에 쉼 없이 진득한 살심을 머금은 외침을 계속 내질렀다.
외침은 주변 전역戰域으로 울려 퍼졌다.
고려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분노가 드러나는 류켄의 고성에, 카즈오 번의 번주 카즈오 이토와 주변에 있는 몇몇 무장들의 이목은 류켄을 향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류켄은 면전에 고려군이 있는 듯, 손에 쥔 왜검을 마구 휘둘렀다.
“죽여.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다 죽여 버려.”
극악하다!
이토와 무장들은 류켄의 모습에 슬쩍 머리를 가로저었다.
쩔레쩔레.
그러면서도 다들 류켄을 만류하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그 때문이다.
그들도 돌아가면 가족이 있고, 자녀가 있기에 십분 류켄의 발광(?)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토의 우측에 서 있는 갑주를 걸친 지긋한 연배의 노인 카즈오 번의 가로家老 스미야시 이노무라는 불안한 눈빛을 띠며 이토를 흘낏거렸다.
“도노との.”
매우 작은 목소리로 이토를 불렀다.
이토는 흠칫거리며 이노무라를 돌아봤다.
왜 불렀느냐?
무언의 반문에 이노무라를 류켄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괜찮겠습니까?
이노무라는 동일한 무언으로 이토에게 물었다.
이토는 류켄에게 시선을 돌리며 오른손을 어깨로 들었다.
내버려둬라.
이노무라는 이토의 손짓에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그 모습에서 번주에게 충성을 다 바치고자 하는 노 가신의 마음이 우러났다.
그 사이.
주변에 서 있는 카즈오 번의 가신인 무장들은 번주 이토와 이노무라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번주와 가신들이 우두머리 가로의 심상치 않는 무언의 대화에 다들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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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은 카즈오 번의 승리로 굳어졌다.
카즈오 번의 선단은 그런 류켄의 마음을 대변하듯, 황산해가 지휘하는 83척에 이르는 선단을 사실상 괴멸 상태에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남은 배들을 향해 득달 같이 달려들었다.
상처 입어 초지에 몸을 뉜 가엾은 한 마리 양을 향해 주위에서 수십여 마리의 늑대가 떼로 몰려드는 장면이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모여. 모여서 대형을 갖추라고.”
황산해는 필사적으로 남은 배들을 모아 선단을 재구성, 대형을 갖추려 하였으나 현실은 그런 바람을 철저히 외면했다.
선단을 이뤘던 배들 중 소수의 몇 척이 더는 카즈오 번의 선단이 가하는 공격을 견딜 수 없다고 무언으로 외치는 듯, 전역戰域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직선으로 물살을 가르며 전역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몇 척의 배를 본 다른 배들이 너나없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살고자 무질서하게 흩어져 허둥지둥 달아나는 수십여 척의 배.
카즈오 번의 선단은 그 배들을 뒤쫓지 않았다.
도주하는 배보다 아직 전역에 남아 있는 배들이 더 많은 까닭에, 전역에 남은 배를 모조리 다 수장水葬시키려 하였다.
그에 카즈오 번의 선단들은 사나운 맹수가 되어 먹잇감으로 전락한 전역에 남아 있는 나주목의 배들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갔다.
몰려가는 기세가 몹시 사나웠다.
전역에 남아 있는 나주목의 배들은 그저 수면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변변한 대응을 아예 하지 못했다.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임이 확연히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
이민호가 지난 몇 년 동안 그야말로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 건조한 배들이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통분이라는 감정이 절로 이는 광경이 전역 곳곳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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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 다수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최송이, 서혜, 이세연, 조연을 비롯한 시녀들.
그녀들 뒤로 오용섭, 이웅, 장갑윤, 나 영감을 비롯한 나주목의 수뇌인 무장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무장들 너머에는 나주목의 관아에 속한 향리와 아전들이 모여, 낮은 목소리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소곤소곤.
그들 모두의 이목은 빠르게 포구로 들어오는 한 척의 배로 쏠렸다.
이민호.
그가 지금 돌아오고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터라 다들 만사를 제쳐놓고 포구에 모였다.
시야에 보이는 배는 빠른 속도로 포구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 오래지 않아.
포구에 다다른 배에서 수면으로 닻을 내렸다. 닻은 수면을 때리며 물기둥을 튕겼다.
풍덩.
닻은 삽시간에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배의 선부들이 신속히 포구로 잔교를 내렸다.
터엉.
잔교는 잠깐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포구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잔교로 향했다.
뚜벅뚜벅.
낮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와 주형이 잔교를 밟았다.
잠시 후.
나와 주형은 포구에 내려섰다.
“오셨습니까? 나리.”
“어서 오세요. 상공.”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하며 머리를 숙였다.
뒤따라 포구에 내린 주형은 내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다소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주형은 주춤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옅은 꺼림의 얼굴빛을 띠는 것이 낯선 사람들이 꺼려지는 모양이다.
난 그 사이 나 영감을 바라보았다.
나 영감은 최송이, 서혜, 이세연, 조연의 뒤줄 왼쪽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나 영감.”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내 목소리에 모여선 이들이 흠칫흠칫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예에에. 저 여기 있습니다. 나리.”
나 영감이 급히 대답하며 뛰어왔다.
후다닥.
나 영감은 곧 내 면전에 이르렀다.
난 고개를 돌려, 눈짓으로 타고 온 배를 가리켰다.
“실린 은괴 내리고 엄히 지키도록 해.”
“네, 나리.”
나 영감이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시선을 돌려 오용섭과 이웅을 보았다.
“오용섭, 이웅.”
내가 부르자.
“예,”
“나리.”
오용섭과 이웅이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하며 뛰어왔다.
타다다.
나 영감은 그 사이 옆으로 비켜났다.
주형은 아는 것이 없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
눈동자를 말똥말똥거리며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조심, 조심 살폈다.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죄다 나리 이민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연중에 그들에게서 긴장이란 감정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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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연은 의문을 느껴, 왼편을 돌아보았다.
왼편에 서서 이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세연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상공께서 이상하시지 않아요?”
이세연은 흠칫했다.
미미하게 몸을 양쪽으로 움직이며, 조연을 돌아봤다.
“자네.”
간결하게 대꾸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었다.
이세연은 조연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여겼다.
“형님.”
조연은 주변 이목을 살피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상공께서는 오래 동안 밖에 나가 계셨잖아요. 한데 돌아오셨으면 응당 가족을 먼저 챙기셔야 하는데.”
상식에 어긋난다.
조연의 속내에 이세연은 가지런히 입을 다물었다.
“…….”
침묵하는 이세연의 눈동자에 당혹감이란 감정이 나타났다.
뭔가 이상하다.
그 사이.
조연은 이민호를 힐긋거렸다.
“보세요. 형님. 상공의 얼굴에 찬 바람이 쌩쌩 불어요. 웃음기가 없으세요. 게다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군무軍務부터 챙기시잖아요.”
불안해하는 목소리였다.
조연은 느끼고 있었다.
뭔가 상례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조연의 말에 이세연은 심중 이는 당혹감을 주체하지 못했다.
살며시 왼쪽을 곁눈질했다.
나란히 서 있는 서혜, 최송이.
두 여인의 뒤에 시녀들이 서 있었다.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댔다.
“이상하지?”
“응. 간만에 돌아왔는데…… 마누라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 남정네들이잖아.”
“나리가 어딘가 모르게 찬 바람이 쌩쌩 부시는 게. 엄청 화나신 것 같은데.”
“암튼 다들 조심해. 뭔가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깐.”
시녀들 역시 조연과 동일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민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최송이와 서혜의 얼굴에 의문과 불안 이라는 두 감정이 맴돌았다.
뭔가가 어긋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