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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휴우.”
한숨을 쉬는 혹두에게 내가 주형에게 따로 말한 것이 있음을 언급하며, 한시라도 빨리 관련 준비를 하라 명했다.
“나리. 번개 불에 콩 볶아 드실 참이십니까?”
“무리라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리고…….”
혹두에게 최향이 곧 거병할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주었다.
“네에에에.”
놀라는 혹두에게 툭 말을 던졌다.
“일전에 너도 말했잖아. 최향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한 것 같다고.”
“나리.”
“아무튼 대비해둬. 난 하루라도 빨리 나주로 돌아가 봐야 하니깐.”
“나리. 저희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혹두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내가 말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네.”
혹두가 날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귀!
“네.”
혹두는 내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게 왼쪽 귀를 들이댔다.
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몸을 숙이듯 내밀어 혹두에게 낮은 목소리로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내 말에 혹두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려 날 돌아봤다.
“나리!”
언성을 높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할 말을 잃고 날 망연하게 쳐다보는 혹두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절대 끼어들지 마라. 모른 척해. 중요한 것은 뒷골목 세력을 보전하는 것과 관련 정보를 빠짐없이 모아 내게 보내는 것을 절대 잊지 않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나리. 그런데 최 부사 어른은 나리의 장인이시잖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다.”
“…….”
내 말에 혹두는 입을 따악 벌렸다.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하긴 장인인 최우를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으니 그럴 법도 하다.
난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착 깔았다.
“혹두.”
“네, 네에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 누가 들을까? 주의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혹두에게 내가 생각하는, 내가 원하는 바를 넌지시 말해주었다.
혹두는 아연실색했다.
전율이 일고 소름이 도는 듯, 경악이란 감정을 얼굴과 눈동자에 담았다.
얼굴빛이 새하얗게 변하고, 몸이 은연중에 떨렸다.
부르르.
충격이 엄습한 듯,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난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난, 이 나라 고려를 먹을 것이다!”
혹두는 내 말에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지, 일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
철퍼덕.
난 주저앉은 혹두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잔미소를 머금었다.
씩.
매서운 안광을 번쩍였다.
“지금부터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둬라.”
난 싸늘한 어조로 말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9 장
자정을 한 시진하고도 반을 남겨둔 해시亥時 초初.
안화문.
인근에 안화사와 9재 학당이 있고, 바깥에는 송악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해가 떨어진지 오래라 사방은 어두웠다.
화르르.
성문 좌우에 놓은 큼지막한 화톳불에서 장작이 타고 있었다.
장작은 스스로를 사르며 주변을 환히 밝혔다.
타타탁.
화톳불에서 크고 작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튀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동선은 불규칙했다.
성루에는 창을 쥔 군병들이 좌우를 오가고 있었다.
화톳불 주변에는 여남은 명의 군병이 정연하게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문에서 좌측으로 여덟아홉 걸음쯤 떨어진 한편.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갑주를 걸친 수문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인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듯, 가까이 붙어 나직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 글쎄. 지금은 안 된다고 하는데도 그러네.”
“처남. 우리 사이에 왜 이리 빡빡하게 구시는가?”
수문장은 동갑내기인 매제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허, 안 된다고 그러는데도 매제는 왜 이리 날 못 살게 구는가?”
“처남. 나 좀 살려 주시게. 지금 도성에서 양곡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네. 내 이참에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밖에서 양곡을 들여오지 않으면 빌린 돈을 갚을 수가 없네. 그리되면…… 난 길바닥에 나 앉아야 할 처지일세. 그러니 제발 좀 날 좀 살려 주시게.”
“어허. 이거 참.”
수문장은 난감해했다.
옆으로 머리를 돌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띠었다. 주저하는 속내가 한 눈에 보였다.
매제인 중년인은 눈을 반짝였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처남인 수문장이 흔들린다는 것이 한 눈에 훤히 보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재물을 모아,’
중년인은 재빨리 수문장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처남. 내가 잘못되면 내자와 아이들은 어찌 되는 줄 아시는가? 우리 가족의 목숨이 처남의 손에 달려 있네. 그러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응. 처남. 한 번만 도와주시게.”
중년인은 수문장에게 매달려 통사정했다.
수문장은 곤혹스러운 낯빛을 띠었다.
중년인이 언급한 내자와 아이들.
여동생과 조카들이 아닌가?
명색이 오빠이자 외숙부인데 모른 척하기가 그렇다.
‘이거 참.’
수문장은 매우 난처해하며 흘낏 성문과 성루에 있는 군병들을 흘겨보았다.
군병들은 짐짓 모른 척했다.
하나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중년인의 편의를 봐주고 수문장이 뒷돈을 챙겼다.
챙긴 뒷돈은 수문장도 먹지만 자신들도 얼마간 챙기는 터라 심중 기대하는 바가 적잖다.
가외로 생기는 짭짤한 부수입이라, 일을 끝내고 술도가에 들러 한잔하기에 쏠쏠하다.
그런 까닭에 다들 마음속으로 수문장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자신들에게 분배해주기를 바랬다.
군병들은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수문장과 중년인을 곁눈질하며 기대에 찬 눈빛을 띠었다.
잠시.
수문장과 중년인 사이에 두서너 번의 실랑이가 오갔다.
결국 인정에 호소한 중년인에게 수문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중년인은 은병이 든 전낭을 넌지시 수문장에게 건넸다.
그 후, 중년인은 뒤돌아서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장한들을 쳐다보았다.
“뭐들 하…….”
장한들을 향해 막 말하는데, 난데없이 우레가 치듯 요란뻑적지근한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소리는 특정 한 곳에서 울리지 않았다. 사방팔방에서 울리며 끝없이 메아리쳤다.
중년인은 어리둥절했다.
수문장은 기겁하며 중년인을 향해 고함쳤다.
“어서 빨리 나가게. 매제.”
말하며 군병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문을 열어줘라. 어서!”
“예에에.”
군병들 중 몇이 대답하며 성문을 향해 돌아섰다.
타다다.
그들은 신속히 성문으로 뛰어갔다.
수문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중년인에게 소리쳤다.
“어서 나가게. 그리고 사흘 후에 오게. 알겠는가? 사흘 후네.”
“무, 무슨 일인가? 처남.”
중년인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빨리 나가시게. 더는 말해 줄 수 없네.”
수문장은 몹시 급한 듯 중년인을 재촉했다.
“어서! 나가래두.”
외침이 거셌다.
“아, 알겠네.”
중년인은 대답하며 다시금 장한들을 돌아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한 터라, 중년인은 서둘렀다.
“어서 가자.”
장한들을 채근했다.
“예에에.”
장한들은 대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뒤로 정연하게 대열을 갖춰, 군병들이 여는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주변을 연방 힐끔거리는 모습이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꺼리는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년인은 그새 몇 걸음을 뗀 수문장에게 쪼르르 다가가 말을 붙였다.
“고맙네. 처남. 그런데 사흘 후에 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중년인은 마음에 걸린 듯 물었다.
“일이 급하네. 매제. 자네와 길게 말할 시간이 없네. 사흘 후에 내가 다시 성문을 지키니. 그에 맞춰서 오시게. 어여 나가시게. 어여.”
수문장은 몹시 급한 기색을 띠었다.
양손으로 중년인을 성문으로 돌려 세운 후, 등을 떠밀었다.
“빨리. 가게. 어서 빨리.”
수문장은 과하다시피 중년인을 재촉했다.
“아, 알겠네. 그럼 사흘 후에 보세나.”
중년인은 대꾸하며 그새 열린 성문에 이른 장한들을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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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익.
나지막이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쿠웅.
성문이 닫히자 수문장은 황급히 군병들을 돌아봤다.
“정렬해라.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알겠느냐?”
“예에에.”
군병들은 소리쳐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 때.
두두두.
다다다다.
말이 달려오는 소리와 다수가 뛰어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뒤섞인 소리에 수문장은 흠칫거리며 화들짝거렸다.
수문장은 닫힌 성문을 일별하며, 다행이라는 안도의 눈빛을 띠었다.
수문장은 뒤돌아서며 침착해지려 애썼다.
시야에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병마兵馬가 들어왔다.
“흑.”
수문장은 헛바람을 삼키며 몸을 추켜세웠다.
이윽고.
히이이이힝.
수문장의 면전에 이른 말이 울며 머리를 양쪽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투레질이었다.
뛰어온 병사들은 다소 떨어진 뒤쪽에 멈춰서며 연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수문장은 안장에 앉은, 갑주를 걸친 무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장은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진정시켰다.
“워어어.”
수문장은 안장에 앉은 무장을 향해 민첩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김 대정님.”
정중했다.
무장, 김관수 대정隊正은 안장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날렵하게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휘익.
사뿐히 착지하며 수문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 없는가?”
“예.”
수문장은 머리를 들어 걸어오는 김관수를 마주보았다.
눈동자에서 긴장이란 작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직속상관이라 부지불식간에 긴장하고 말았다.
“드나드는 이가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수문장은 김관수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닫힌 성문을 힐긋거리는 것이, 내심 뜨끔한 눈치다.
“흠, 그래.”
김관수는 평이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뭐들 하는 게냐? 각자 제 자리를 찾아 가거라.”
“예에에. 대정 나리.”
병사들은 대답하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엄히 지켜야 할 것이야. 내 명 없이는 그 누구도 안화문을 드나들 수 없음이니. 어기는 놈은 군령에 따라 참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에에에. 대정 나리.”
병사들은 머리를 바로 들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흩어져라.”
“예에에.”
대정 김관수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응시하며 뿌듯한 기색을 띠었다.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미리 지시를 받은 듯 정해진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그 모습이 정연해 상당한 군기가 엿보였다.
김관수는 사선을 멀리 주어 황도 개경을 바라보았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가지런히 다문 입술 사이로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길고 긴 밤이 될 게야.”
김관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씩.
살며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날이 밝으면 새로운 세상이 자신과 수하 병사들을 반길 것이다.
환하고 밝은 아침 햇살을 기대하며, 김관수는 득의라는 감정을 머금은 작은 이채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