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10화 (210/247)

<-- 210 회: 8-11 -->

5 장

최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그 사람의 병략이 뛰어나다 듣긴 하였으나, 이처럼 일신의 무예가 탁발할 줄이야.…… 규영.”

“예, 나으리.”

조규영은 다소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민호를 놓친 것에 심중 자책하는 속내가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그대는 일찍이 폐하를 지근에서 시위한, 고려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무장이거늘.”

최향은 조규영이 이민호를 놓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속내를 밝혔다.

일부러 놔준 것은 아니냐?

최향의 말에서 그런 속내가 드러났다.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은 최향의 말에 움찔움찔했다.

그들의 이목이 무릎 꿇은 조규영을 향했다.

최향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닐까?

이목에서 그런 속내가 진하게 묻어났다.

조규영은 몸을 움칫거리며 머리를 번쩍 들어, 최향을 올려다보았다.

“나으리! 저는 천종장군이었습니다.”

불연怫然한 대답.

명예!

조규영은 은연중에 강하게 반발했다.

나는 명예로운 무장입니다.

일부러 놔준 것이 아닙니다.

불연한 대답은 그런 심중을 담고 있었다.

최향은 조규영의 대답에 흠칫했다.

‘허!’

심중 당혹스러웠다.

죽은 권호렴 대신 자신이 조규영을 거두었다.

오랜만에 인재다운 인재를 곁에 두게 되었다. 그리 여겼다.

한데,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내심 골머리를 썩였다.

조규영은 유송절이나 지윤심처럼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은혜를 입어 그 은혜를 갚으려 할 뿐.

최향은 그런 조규영 태도에 마음속으로 언짢아했다.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규영을 마주보았다.

‘이 놈이.’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이 영 심기가 불편하다.

주변에 이목이 많아, 화낼 수 없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끙끙거릴 수밖에.

조규영을 내치자니 아깝다.

그렇다고 곁에 계속 두자니 자신을 뭐로 생각하는지 지금처럼 자신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다.

아닌 말로 계륵과 같아, 속이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거렸다.

그런 속을 터트릴 수 없어, 심중 상당한 부아가 일었다.

최향이 지그시 조규영을 보며 상념에 젖은 사이.

조규영의 언동에 발끈해 보리는 유송절이 말하고 나섰다.

“이 무슨 무례요? 조 장군.”

딱 부러지는 어조로 조규영을 엄중히 질책했다.

조규영이 주군인 최향에게 무례를 범한다.

유송절은 그리 생각한 듯 하다.

제법 무장으로서의 위세가 풍기는 모습이었다.

조규영은 유송절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동일한 직위인 정 4품의 장군이다.

2군 6위의 중앙군에서 1령. 그러니깐 병 1천여 명을 통솔하는 사실상 부대장이다.

하지만 자신과 크나큰 차이가 있다.

유송절은 6위에 속한 장군이지만 자신은 응양군의 천종장군이다.

그 차이는 중앙군에서는 하늘과 땅이다.

황제 폐하의 지근에서 시위하는 장군과 최정예군이긴 하지만 6위에 속한 장군은 비교 대상 자체가 되지 못한다.

조규영은 불쾌한 낯빛을 띠었다.

말하고 나선 유송절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초리에서 격한 감정이 물씬 우러났다.

그 눈치를 읽은 지윤심이 재빨리 말하고 나섰다.

“송절. 조 장군은 주군께 충정을 바치는 사람이네. 그런 조 장군이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는가? 조 장군은 최선을 다 했을 것이네. 그 사람이 조 장군 못지않은 무예를 가졌다는 것을 나나 자네나 심지어.”

지윤심은 말을 흐리며, 안장에 앉아 있는 최향을 돌아보았다.

섬기는 주군 최향도 몰랐다.

지윤심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유송절은 흠칫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

주군 최향이 지윤심의 입에 올랐다.

유송절은 내심 조심스러웠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최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군.”

목소리는 저음이었으나 힘이 실려 또렷했다.

최향은 나지막한 침음을 흘렸다.

“으음…….”

숙고하려는지 살며시 시선을 지면으로 낮췄다.

지윤심, 유송절, 조규영, 몇몇 무장들, 금오위의 병졸들은 그런 최향을 물끄러미 주시하기 시작했다.

@

3분分쯤 지났을까?

최향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조규영을 보았다.

“그대를 내 어찌 의심하겠는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

조규영은 입을 한일자로 닫고, 묵묵히 머리를 숙였다.

최향과 자신의 궁합(?)이 아무래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은혜를 어떻게든 빨리 갚아야 할 것 같다.

머리 숙인 조규영의 귀에 최향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절, 윤심.”

유송절과 지윤심은 최향의 부름에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예.”

“지금 즉시 금오위, 감문위, 경군, 거경군을 하여금 황도 8대문을 엄히 막으라 하게. 관에서 발부한 신표가 없는 한 그 누구도 8대문을 오갈 수 없네.”

최향은 준엄한 목소리로 황도 개경을 봉쇄하라 명령했다.

감문위監門衛는 궁문 수비를 맡은 6위 중 하나이고 경군京軍은 각 영문營門에 소속된 군사軍士다.

거경군居京軍은 중앙 각 군문에 딸린, 상주하는 군사를 일컫는다.

황도에는 모두 8개의 문이 있다.

선의문, 회빈문, 장패문, 숭인문, 탄현문, 성도문, 안화문, 북창문.

대부분의 문은 송악산 줄기를 따라 나성으로 이어져 있다.

최향의 명에 유송절과 지윤심 그리고 무장들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명!”

다수가 지르는 우렁찬 외침이 주위로 울려 퍼졌다.

머리를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명!”

외침은 낭랑하게 주위로 울려 퍼졌다.

@

도성이자 황도인 개경이 뒷골목은 낮보다는 밤이 더 활기가 넘쳤다.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밤의 정취를 즐기려는 자들로 넘쳐났다.

뒷골목 으슥한 곳에 자리한 낡고 허름한 한 주루.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흉가의 면모를 지난 주루는 고요했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밖에 내걸린 두어 개의 유등이 마치 초상집을 연상시켰다.

입구 좌우에는 꽤 굵은 긴 몽둥이를 손에 든 두 명의 장정이 서 있었다.

송도 뒷골목을 장악한 악소배들의 우두머리 혹두.

그와 따르는 악소배들의 거점이 바로 주루였다.

주루 내부에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주변에는 탁자와 나무 의자들이 아무렇게나 엎어지고 뒹굴었다.

유일하게 반듯한 널찍한 탁자에는 간단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탁자에 둘러앉은 6명의 사내는 웃고 떠들며, 술자리를 즐겼다.

“꺄아아아!”

혹두는 간만에 마시는, 뒷골목에서 만든 탁주에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

바보처럼 웃으며 빈 잔을 앉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왼 소매를 들어 입을 닦으며, 동석한 5명의 사내를 둘러보았다.

심복 중의 심복들이라, 간만에 모여 한 잔 하는 중이다.

“역시 술은 뒷골목 탁주야. 암.”

혹두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탁자에 내려놓은 자신의 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비었다!

혹두의 왼쪽에 앉은, 사팔뜨기 눈을 가진 사내 주형은 잽싸게 손을 놀렸다.

술병을 양손으로 들고, 공손하게 혹두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르.

걸러 만든 걸쭉한 탁주가 가느다란 줄기를 그리며 떨어졌다.

서서히 잔이 찼다.

혹두는 깍듯한 주형의 시중(?)에 잔미소를 머금었다.

그윽한 정감이 그득한 눈으로 채워진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얼마 만에 누리는 여유냐?’

혹두는 기분이 좋았다.

그에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빛을 띠었다.

@

탁주濁酒는 무척 오래된 술이다.

일반적으로 탁주는 빛깔이 탁하고 알코올 성분이 적다. 또한 맑지 못하고 탁하다 하여 탁배기, 탁주, 백주, 농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탁주를 일러 미온美醞, 지주旨酒, 요례醪醴라 지칭한 기록이 남아 있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당시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인들은 맛이 나쁘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

위와 같은 구절이 있다.

그로 미루어보아 탁주는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즐겨 마셨던, 여전히 서민주로서 각광받아왔지 않나? 싶다.

더불어 탁주의 역사가 뿌리가 몹시 깊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주형은 공손히 혹두에게 술을 권했다.

“행님. 한 잔 더 하시죠.”

이미 꽤 술잔을 걸친 혹두는 얼근한 취기에 기분이 좋아 살며시 웃었다.

“옹야.”

왼손을 들어 주형의 우측 어깨에 척 얹었다.

“우리 형아…….”

혹두는 말하다 몸을 멈칫거렸다.

주형은 혹두의 멈칫거림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행님. 왜 그러십니까?”

의구심이 배인 목소리로 연유를 물었다.

그 사이.

혹두와 주형을 제외한, 동석한 네 사내가 지들끼리 떠들었다.

취기가 적당히 올라 기분이 좋은 듯, 다들 들뜬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싸게싸게 먹자고.”

“쩝쩝. 맜있고마. 나가 살아 생전에 돼지고기 삶아서 요로코롬 술 안주하는 날이 올 줄은 참말 몰랐다 아이가. 하이고 맜있어라.”

“두 말하면 잔소리제. 어여 마셔.”

“하모. 마셔야지.”

네 사내는 혹두나 주형을 신경 쓰지 않았다.

술과 안주, 그리고 술자리가 주는 기분 좋음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혹두가 멈칫거린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다들 폭음하고 안주 빨을 세우기 바빴다.

혹두와 주형은 은연중에 나 몰라라 했다.

“저것들이.”

주형은 네 사내, 동료들을 째려보았다.

니들.

마음에 무척 안 들어.

그런 속내가 째려보는 시선에서 물씬 우러났다.

혹두는 취기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못마땅한 눈으로 네 동료를 째려보는 주형을 응시하며 트림했다.

“야아아. 꺼어억.”

“예에에. 행님.”

주형은 잽싸게 혹두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 아부나 아첨깨나 할 것 같다.

주형은 혹두가 얼굴을 찡그린 것이 이상한지, 즉각 아부에 들어갔다.

입안의 혀처럼 혹두의 비위를 맞추려했다.

“행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혹시 왜국에 갔다 오시면서…….”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혹두를 엄청 생각하는 몇몇 말을 쏟아냈다.

“너. 말이지.”

혹두가 주형에게 막 말하는데.

“야아아. 그건 내 거야.”

“마아아. 우리 사이에 니 거 네 거가 어디 있어.”

“자, 자. 마셔. 오늘 우리 마시고 죽자.”

“하모. 그라제.”

네 동료가 목소리를 높여 시끄럽게 떠들었다.

“이것들이.”

주형은 귀에 들린 네 동료의 말에,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홱.

성난 표정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