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99화 (19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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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미시未時무렵.

노인 나식은 포구에 정박한 선박들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었다.

혹여 선체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부쩍 신경 썼다.

지난 몇 면 동안 각고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340여 척 가까이 배를 건조했다.

각 배에는 군병과 배를 운용하는 선부들이 승선한다.

그 외에…….

군량미미를 비롯한 각종 물자를 실은 선박.

사토시, 키소, 타이라노 번에서 끌고 온 남녀가 탔던 선박

해전을 염두에 둔 호위선들 등등.

단순히 사람들이 승선하는 배 이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배가 많은 터라, 그 관리에 상당한 공과 정성을 들였다.

보급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병참을 책임진 까닭에, 나 영감이라 불리는 노인 나식의 발길과 눈길은 분주했다.

섬기는 나리 이민호가 신신당부한 터라, 실망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나 영감은 몇몇 군병과 함께 포구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오갔다.

한참 후, 이정찬이 찾아와 불쑥 명령서命令書라는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다.

나 영감은 배움이 짧은 터라, 종이와 이정찬을 번갈아 보았다.

붕어마냥 눈을 껌뻑껌뻑거렸다.

“뭔디요?”

나 영감의 뒤에 서 있는 군병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뭔데?

군병들과 나 영감은 그런 표정을 지었다.

이정찬은 어이없어 잠시 할 말을 잃고, 나 영감과 군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맡은 임무가 있어 결국 이정찬은 명령서 하단에 찍혀 있는 나주 목사의 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보이는가? 이건.”

나 영감과 군병들 이해할 수 없다는 속내를 얼굴에 띄웠다.

“허.”

이정찬은 허탈한 일성一聲을 내뱉고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배.

내 놔.

나 영감과 군병들은 허무맹랑하다는 얼굴로 이정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신분이 높아 보이지만 않았어도 확 고마 세리. 그냥.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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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집에 푹 쉬고 있던 선부들은 뜻하지 않은 소집에 짜증냈다.

“뭔 소집이야.”

“집에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출항이야.”

“나리께서 한 열흘은 푹 쉬어라 그리 말씀하셨는디.”

선부들은 하나 같이 강하게 반발했다.

출정에서 돌아오자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골고루 주어졌다.

베와 쌀을 중심으로 넉넉한 물품이 분배되어 모처럼 집에서 백미를 지어 먹었다. 그리고 간만에 고기를 구워, 가족과 함께 원 없이 맛을 보았다.

푹 쉬며 모처럼 만의 여유를 갓 줄기는 참인데. 다시 출항이 있으니 포구로 모이라는 통문에 선부들은 대놓고 투덜댔다.

그래도 일단 소집 통문에 응해 선부들은 꾸역꾸역 포구로 모여들었다.

조규는 포구에 모인 선부들을 향해 ‘다시 타이라노 번을 향해 배를 띄워라. 그리하면 대가로 백미 한 섬과 비단 두 필을 주겠다.’ 라고 소리치며 선부들을 유혹했다.

“진짭니까?”

“정말 백미 한 섬과 비단 두 필을 줍니까?”

선부들 사이에서 욕심에 눈 일부 선부들이 확인 차 고함쳤다.

조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다.”

선부들은 조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규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 서가를 중심으로 양광도 연합 호족군이 앞서 출정했던 그대들과 함께 왜에 출정을 하기로 하였었다. 한데.”

시정이 생겨 뒤늦게 출정을 하게 되었다. 이게 다 이민호와 사전에 협의가 된 일이니 적극 협조해 달라.

조규는 그런 취지로 말하며 선부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선부들은 쉬이 믿지 않았다.

“사실이에요.”

뜻밖에도 서혜가 두 시비 달래와 분이를 대동하고 포구에 나타났다.

“작은 만님.”

선부들은 나타난 서혜를 보자마자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이민호의 두 번째 내자임을 아는 탓에, 다들 이민호를 섬기는 터라, 서혜에게 매우 깍듯했다.

그런 선부들에게 서혜는 조규의 말을 뒷받침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사실상 이미 결정된 일이니. 다시 한 번 갔다 오면 보다 많은 재물을 손에 쥘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선부들에게 돌아가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서혜의 노력(?)에 대부분의 선부는 머리를 까닥이며 수긍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욕심이란 감정이 진하게 깔려 있었다. 이민호가 지휘한, 단 한 번의 출전으로 손에 쥔 것이 무척 많았다.

한 마디로 말해 짭짤했다.

그런 터라 서혜가 신뢰를 주고, 조규가 선부들에게 욕심을 불어넣었다.

선부들은 서서히 출정으로 마음이 돌아섰다.

나 영감을 중심으로 몇몇 장인과 선부들인 반발하고 나섰다.

“마님. 나리께서 당분간은 출정이 없으니, 배의 관리에 만전을 기하라 그리 명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배가 출항하자면 물과 군량미 등 실어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해전을 염두에 둔 호위 함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급 물자를 적재한 화물선과 운송선을 비롯한 다수의 다른 배들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마님. 무엇보다도 말과 석포 등. 배에 실어야 하는 무기들도 있습니다.”

다들 다양한 이유를 들어 출정에 반대했다.

“나리께서 돌아오신 연후에 출정의 가부를 정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나리께서 당분간 출정은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출항 준비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됩니다, 마님. 지금처럼 하시면 보급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나 영감을 중심으로 몇몇 장인과 선부들은 제시된 명령서와 이민호의 명이 서로 배치됨을 언급하며, 흔들리는 선부들을 말리려 하였다.

옥신각신 말이 오가는데.

돌연.

“걱정들 하지 마세요.”

뜻밖에도 최송이가 포구에 나타났다.

최송이는 서혜, 서풍을 편들었다. 상황이 급변하며, 나 영감을 중심으로 반대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녀 연아가 서로 견원지간이었던 사혜의 편을 드는 최송이의 행보에 의문을 느껴,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최송이 왈.

“호호호. 서혜가 잘되면 내게 빚이 생기는 것이니, 앞으로 내게 이전처럼 대들지는 못할 게야. 반대로 잘못되면 서혜는 상공의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어쩌면 상공께서 서혜를 내치실지도 몰라. 나로서는 전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잖니? 득은 있을지언정 실은 없음이야.”

연아는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최송이를 바라보았다.

영악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머리 회전이 빠르고, 여느 사람과는 보는 시선과 생각하는 사고가 남다르다고 말해야 할지?

연아는 심중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러시다 나리께서 아시게 되면.’

섬뜩하다.

이민호가 화내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연아는 오금이 저렸다.

최송이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남다른 처세를 보여주었다.

처세는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최송이는 부친 최우와 조부 최충헌의 곁에서 측근들과 친인들의 언동을 오래 동안 지켜봐 왔다.

그런 이유로 여느 사람들과 동일한 사물을 봐도 생각하는 것과 대하는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

서혜의 지원에 힘입어 서풍은 의도하는 바를 차질 없이 빠르게 진행시켜나갔다.

의문을 제기하며 오용섭과 이웅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최송이와 서혜를 내세운 서혜와 서풍에게 제지당했다.

반발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에 오용섭과 이용은 최송이와 서혜가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와 평소 최송이와 서혜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고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넌지시 최송이의 시녀인 행심에게 물어보았다.

행심의 왈.

“백금, 받으셨는데요.”

“…….”

오용섭과 이웅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는 물아도 필요도 없었다.

뇌물은 귀신도 부리는 것이 고려의 현 실정이니.

100년에 가까운 무신 정권은 고려를 망신창이로 만들었다.

무신정권으로 인해 기존의 질서가 뒤흔들렸고 정치와 사회 등등.

일련의 모든 분야가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일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분제였다.

힘만 있으면 천인이라 할지라도 권세를 잡을 수 있다는 의식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졌다.

그 일례가 바로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은 경대승의 사후 권력을 한 손에 걸머쥐었는데, 부친은 소금 장수였고, 모친은 영일현 옥령사의 여종이었다.

힘만 있으면 왕조차 어쩌지 못하는 권력자가 될 수 있다!

왕후장상王侯將相 영유종호寧有種乎.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이의민은 그 말이 맞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무신 정권하에서의 고려는 빠르게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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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내가 사위라 최우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모인 정 씨 부인은 외동딸의 남편인 날 상당히 챙겨주었다.

딸이 시집가기 전에 쓰던 별당을 내 거처로 내주고, 조자개처럼 밤에 적적하다고 가려 뽑은 시비를 매일 밤 들여보내는 등.

적잖게 날 곤혹스럽게 했다.

고려의 풍습 중 하나가 귀한 이들이 자택에 묵을 때 여종 중에서 제법 미색이 있는 여인을 뽐아 이런 저런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라,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신라로부터 연원한 풍습인지는 몰라도, 남자가 자연스레 여인들을 취하는 풍습이 내게는 처치 곤란한 봉변과 같았다.

거처에 들어온 여인을 내보내기위해 난 매일 밤 진땀을 뻘뻘 흘려야했다.

개경에 온 김에 강무한과 김경손과 자주 회동하며, 강무한이 키운 군부의 무장들과 빈번히 자리를 함께 했다.

예전에 최향이 날 초대했던 기방을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자연스레 기녀들을 통해 효연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효연 언니는 참지정사 어르신 댁에 소실로 들어갔어요.”

최향의 부인들 중 한 명이 되었단다.

난 별다른 생각 없이 그러려니 했다.

효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개경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까닭에, 머무는 동안 가능한 많은 군부의 무장과 만나 인맥을 다져두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중 나와 함께 할, 마음이 맞는 이들에게 정성을 들여 내 사람으로 만들려 애썼다.

장차 내 손발이 되어 움직일 자들이라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런 한편.

혹두가 이끌던 뒷골목의 몇몇 이들과 만나고, 남대가에 연 점포들을 살피는 등.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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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개경을 두루 돌며 사람을 만나고 상계의 일을 보는 등 바쁜 일상을 보내는 터라, 귀가가 그만 늦어버렸다.

난 묵이와 함께 어두침침한 길을 지나갔다.

뚜벅뚜벅.

주변은 캄캄했으며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묵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후회라는 감정이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리. 호위를 뿌리치신 것이 아무대로 마음에 걸리는 데요.”

묵은 호위를 뿌리치고 단 둘이 움직인 것에 불안해했다.

난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마! 온 뒷골목이 우리 편인데. 뭔 걱정이야.”

혹두가 내 사람이 됨으로서 뒷골목은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계를 내가 책임지다시피 하는 터라, 난 뒷골목에 있어서만큼은 왕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

그런 이유로 난 묵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얼마간 걸었을까?

나와 묵이는 한 갈림길에 이르렀다.

갈림길은 Y자 형태였다.

앞쪽 좌우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터라, 나와 묵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나리. 어느 쪽 길로 가시겠습니까?”

묵이 날 보며 물었다.

“글쎄다. 둘 다 돌아가는 길이긴 한데.”

난 걸음을 멈추고 서서 망설였다.

우측 길이나 좌측 길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막 발을 떼며 우측으로 돌아섰다.

“오른쪽 길로 가자.”

“네.”

묵이 대답하며 날 뒤따랐다.

두어 걸음 내디뎠을까?

스, 스스슥.

앞쪽 갈림길과 뒤쪽에서 아홉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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