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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의 귀엣말이 끝나자마자, 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난 서둘러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말아 쥔 오른손 주먹을 왼쪽 가슴에 붙였다.
척.
머리를 깊이 숙이며 장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합하. 장인을 사위로서가 아닌 신하로서 성심을 다해 섬길 것을 약속드립니다.”
난 머리를 숙인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얼마든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해주마. 최충헌. 60년! 우봉 최 씨 가문의 장기 집권을 끝내고 새로운 고려를 세우기 위해서는 너희 일족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난 결연한 눈빛을 띠었다.
최충헌은 24년간 권력을 장악했고, 최우는 30년 동안 고려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손자인 최항까지 합치면 장장 60년 동안 고려의 권력은 우봉 최 씨 가문에 예속되어 있었다.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
마음속으로 최충헌을 비웃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일본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자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조선인을 고통과 슬픔에 깊이 빠트린 원흉이기도 하다.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 오대로라 불리는 다섯 가신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아들 히데요리의 장래를 염려해 정적 중 정적인 도쿠가와에게 충성 맹약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도쿠가와는 망설임 없이 지필묵을 들어 맹약서를 써다.
히데요시의 사후 도쿠가와는 아들 히데요리는 물론 히데요시 가문 자체를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런 다음 일본의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열었다.
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염두에 뒀다.
머리를 숙이고 내가 생각하는 시간은 불과 몇 초 밖에 되지 않았다.
귀에 진한 호의가 배인 최충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들고 일어나게. 사적으로 자네는 내 손녀사위가 아닌가?”
난 머리를 들어 최충헌을 보았다.
“합하.”
“어여.”
최충헌은 만면에 미소 지으며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들어 위아래로 살짝 움직이는 최충헌의 손놀림에서 가족이라는 강한 유대가 묻어났다.
“합하.”
“어서.”
“네.”
대답하며 일어났다.
“내 자네에게 소개해 줄 사람들이 있네.”
“네?”
난 어리둥절했다.
난데없이 소개해 줄 사람이라니.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정도감에는 나와 최충헌 밖에 없다. 그런데 소개해 줄 사람이라니.
최충헌은 날 쳐다보며 옅고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천천히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낭랑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나오게들.”
난 최충헌이 쳐다보는 단 우측을 보았다.
저벅저벅.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세 장년인이 나타났다.
척 봐도 무장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용맹해 보이는 얼굴, 건장한 체격, 허리춤에 비껴 맨 검, 굳건히 부릅뜬 눈동자.
세 장년인은 전형적인 무신의 풍모를 진하게 풍겼다.
10 장
서혜는 서탁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앉은 서탁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었다. 서탁 중앙에 있는 화선지 양쪽을 네모난 막대가 강하게 눌렀다.
서혜는 고정된 화선지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좌측을 돌아보았다.
시야에 인주에 얹어진 나주 목사의 인장이 들어왔다.
잘근.
서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갈등이라는 감정이 서혜의 얼굴을 뒤덮었다. 뻗으려다 멈칫거리기를 반복하는 서혜의 손길.
“어, 어떻…….”
서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려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남편인 이민호가 크게 노해, 어쩌면 이혼장을 써서 자신의 얼굴에 내팽개칠지도 모른다.
꽈악.
서혜는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기며 팔오금을 접었다.
팔은 일직선의 형태로 세워 머리를 짚고는 숙고에 들었다.
서혜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친 서양헌의 서신.
바르르.
서혜의 눈가가 살며시 위아래로 떨렸다.
‘…… 서혜야. 내 두 오빠의 장래와 가문의 앞날이 네게 달렸다. 부디 도와다오. 이 아비는 오직 너만을 믿는다. 네가…….’
서혜의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다 같은 가족인데.”
가문 서가는 이민호에게는 처가가 된다.
두 오빠와 이민호는 처남, 매제지간이며, 특히 둘째 오빠 서풍은 최충헌의 서녀 최여심과 혼인하여 동서지간이 되었다.
오빠 서풍과 이민호는 다 같이 최우의 사위이며 최충헌의 손녀사위다.
그러니 이민호가 크게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잠시 빌리는 것뿐인데. 설마 상공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크게 화낼까?”
서혜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세뇌를 걸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잠시 물건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는 것으로 여겼다.
아녀자의 얄팍한 소견에, 가문과 두 오빠를 위해, 스스로에게 명분을 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남편 이민호의 허락이나 양해 없이 독단으로 처리하려 하였다.
기다려야 하지만, 이민호가 벽란도와 황도 개경을 거쳐 나주로 오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아버지 서양헌의 서신을 가지고 온 오빠 서풍의 뜻에 따르고 추후에 이민호에게 말하면 크게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서혜는 좋은 게 좋다고, 모든 것이 무탈하게, 아무 일없이 다 잘 풀릴 것이라 심중 그리 여겼다.
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처음의 꺼림이나 갈등 그리고 고민과 같은 감정은 마음을 굳힌 서혜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문!
태어나 자라며 자연스럽게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가지게 되는 혈족의 공동체다.
12세기 고려 여인인 서혜는 사고思考에 있어 21세기 사람인 이민호와 매우 다르다.
서혜의 뇌리 깊이 서양헌이 오래전부터 가문과 자신에 대한 일종의 맹종을 심어두었다.
타 가문으로 시집갈 운명인 딸에게 가문에 대한 의무감, 소속감, 유대감을 심어주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다.
딸 서혜의 혼인은 단순한 남녀의 결합이 아닌, 호족과 호족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서양헌은 딸 서혜를 그리 키웠다.
그런 이유로 서혜는 가문을 강조한 부친 서양헌의 의도대로 충실히 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스스슥.
서혜가 손에 쥔 붓이 화선지를 스쳐 지나가며 미성微聲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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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해는 야심한 시각에 기방으로 들어섰다.
서풍이 서혜를 통해 초대한 까닭에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서혜가 주군은 아니지만 모시는 상관의 부인이고, 서풍이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최충헌의 손녀사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초대에 응했다.
미리 말을 해 놓은 듯, 기생 어멈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황산해가 기생어멈의 안내를 받아 한 방으로 들어섰다.
드륵.
순간.
멈칫.
황산해는 발걸음을 멈추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잖은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멋들어진 풍광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정면에는 명사가 쓰고 그린 듯한 병풍을 등지고 서풍이 앉아 있었다.
앉은 앞에 있는 상에는 각종 진미가 잔뜩 깔려, 식욕을 돋웠다.
좌우에 이는 두 쪽문은 밖을 향해 활짝 열려, 근사한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밖은 넓은 연못이었다.
연못 중앙에 세워진 정자가 곧 기방이라, 여러모로 남다른 정취가 물씬 풍겼다.
서풍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선 황산해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황 장군.”
“아, 예에.”
황산해는 마주 인사하며 내심 당혹스러워했다.
‘이 사람이?’
일면식도 없다. 한데 자신을 초대했다. 게다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지금 자신을 반기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으음.’
황산해는 심중 침음을 흘렸다.
경계심이 무럭무럭 인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허술히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잠시 수인사가 오갔다.
황산해와 서풍은 술상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자아.”
서풍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어 술을 권했다.
“아, 예에.”
황산해는 술잔을 들며 서풍을 유심히 응시했다.
한식경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 사이 기녀들이 들어와 두 사람의 시중을 들었다.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하하하하.”
사전에 기생어미에게 상당한 재물을 쥐어준 까닭에 기녀들이 적극적으로 술자리를 이끌었다.
그 덕분에 서먹서먹한 술자리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 후, 서풍이 긴요한 이야기가 있어 자리를 잠시 피해 달라 말해, 기녀들이 방에서 나갔다.
황산해는 내심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본론이 곧 서풍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아 심신을 추슬렀다.
서풍은 황산해를 마주보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