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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망할!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몇 십여 개의 굵은 초가 밝히는 큼지막한 방에 옥과 돌로 만든 고정식 목간통이 완비되어 있었다.
목간통 주변은 흐릿한 천으로 둘러쳐졌고, 얇은 홑옷을 입을 네 여인이 나란히 서서 들어선 내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나리를 뵙습니다.”
네 여인은 스물 중후반으로 보였다.
입은 옷이 홑옷인 까닭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다 드러났다.
바람에 하늘하늘거리며 흔들리는 가녀린 버들가지 같은 허리, 활짝 핀 국화가 생각나는 풍성한 가슴의 두 봉우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몸매.
거기에 더해 여느 여인들을 능가하는 미모의 얼굴까지.
허리를 깊이 숙인 탓에 네 여인의 목덜미가 내 시야에 드러났다.
“이게 무슨?”
난 당혹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여인이 허리를 펴며 날 보았다.
“조 나리께서 나리의 목욕 시중을 들라, 적적한 잠자리를.”
기막혀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딸과 혼인한 사위에게, 처갓집에 홀로 온 사위에게 여자를 그것도 넷이나 붙이는 조자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이없어도 너무 없는 까닭에 난 심중 적잖게 당황했다.
“저, 저기.”
말문을 떼었다.
네 여인을 마주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현실에 대처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 날 당혹케 했다.
“물러들 가시오.”
엄중한 목소리로 네 여인에게 밖으로 나가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신첩들은 조 나리께 엄명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저흰.”
크게 경을 칠 것이다.
네 여인은 그리 말했다.
“어허. 장인어른께는 내가 말을 해 둘 터이니. 어서 물러.”
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네 여인이 난데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머리를 깊이 숙이고는 한없이 처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신첩들은 조 나리 댁의 여종입니다. 만약 나리의 시중을 재대로 들어드리지 못하면 크게 경을 치게 됩니다. 하오니 부디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나리.”
난 울컥했다.
‘이!’
가슴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다.
새삼 고려가 엄격한 신분제의 국가임을 상기했다.
강한 반감이 일었다.
21세기의 사람인 내게 엄격하고 가혹한 신분제는 성가신 골칫거리다.
머릿속에 나 영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쓸만한 자이긴 하나 알게 모르게 측근들 중에서 신분을 걸고넘어지는 자가 몇 있었다.
‘이익.’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신분제를 없애고 싶지만, 그에 반발하는 반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쉬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전 고려의 문벌 귀족과 지방 호족들을 적으로 돌림과 동시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그래서 더 할 수 없이 순박한 양민과 천민들을 끌어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종은 사고파는 물건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소나 말보다 그 값이 싸, 가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휴우.”
짧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은 네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보시오들. 난 이미 혼인하여 내자가 네 명이나 있는 몸이오. 더욱이 조 어른의 댁은 내겐 처가요. 한데 사위된 몸으로 처가에 와서, 처가 여종들로부터 목욕 시중을 받고 잠자리 시중까지 받는다면, 내 어찌 돌아가 내자의 얼굴을 볼 수가 있겠소. 이는 사람이 취할 바 도리가 아니오.”
알아듣게 사극 톤으로, 최대한 사극 드라마에 가깝게 타이르며 네 여인을 물리려 하였다.
그런데.
“나리. 집안의 여종이 찾아온 귀한 분의 목욕과 잠자리 시중을 드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옵니다.”
“사위이시기에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이 온데. 어찌 뿌리치시려 하시는지?”
네 여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어?’
내 사고 방식과 네 여인 사이의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에이.”
난 뒤돌아섰다.
‘내가 무슨 카사노바도 아니고 말이야. 짜증나게.’
방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리.”
“어디로 가세요.”
뒤에서 네 여인이 영문을 몰라 하는 속내가 밴 목소리로 날 불렀다.
못 들은 척하며 난 방문에 이르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9 장
뜰에 내려서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밤하늘의 달에 짙은 달무리가 꼈다.
‘빌어먹을. 이놈의 고려. 빨리 싸그리 다 바꿔야 하는데.’
조급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역사라는 큰 줄기의 흐름은 바꿔놓을 수는 있겠지만. 백성이라 불리우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나라라는 이름의 체제를 바꾸는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이다.
‘사람이 필요해. 나와 같은 뜻을 가진, 내가 믿을 수 있고, 내 손발이 되어 움직여줄 자들이.’
사람이 아쉬웠다.
군병들의 양성은 마음과 달리 더디고 그 수도 만족스럽지 않다.
선박과 선부 등등.
군병 양성 이외에 다른 외적인 것에 제정의 대부분이 소요되고 말았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일본으로 가기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젠장!”
신경질을 내는데.
부스럭.
좌측 뒤, 서남방에서 작은 기척이 들렀다.
“누구냐?”
돌아서며 소리쳤다.
“나, 나리.”
조금은 당황한, 더듬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주섬주섬 걸어 나왔다.
“너?”
난 다소 어리둥절했다.
묵이었다.
뻘쭘하게 걸어 나오며 손을 들어 머리를 긁어대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지금 시각이 몇인데. 네 거처에서 자지 않고 내 거처 주변을 어찌?”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이 괘 지났다.
묵이 내 거처를 배회할 딱히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요. 나리가 잘 주무시나 해서요.”
가까이 다가선 묵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피식.
싱겁게 웃으며 대꾸했다.
“별 시답잖은, 어여 가서 자.”
“네. 나리.”
묵이 인사하며 옆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은연중에 내가 나온 방을 힐끔거리는 것이 좀 수상쩍다.
그 때.
“나리.”
“나리.”
문이 열리며 네 여인이 버선발로 걸어 나왔다.
“아, 진짜.”
난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방을 돌아보았다.
시야에 예의 홑옷을 입은, 민망한 복색을 하고 방밖으로 나온 네 여종이 보였다.
순간.
움찔.
몸을 미미하게 양쪽으로 움직였다.
퍼뜩.
머리에 생각나듯, 불길한 한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난 반사적으로 묵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묵이는 밖으로 나오는 네 여인을 보다가 황급히 옆으로 돌아섰다.
“아,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리.”
부리나케 내게 말하고는 뒤돌아섬과 동시에 뛰는 묵이.
난 급히 소리치며 묵이를 뒤좇았다.
“야아아. 너. 거기 서어어.”
묵은 내가 뒤쫓자, 힐긋 고개를 돌렸다.
“나리. 왜 쫓아오세요?”
“너, 인마. 날 감시하고 있었지. 그렇지.”
“아, 아닙니다.”
묵이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고함쳤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으로 내 말이 맞다고 묵이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잖아.”
난 마주 고함치며 묵을 잡으려 뛰는 속도를 높였다.
묵이 녀석.
넌 뛰어봐야 내 손바닥 위야.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잘 시간인데도 자지 않고 내 거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틀림없이 최송이나 서연…… 그녀들 중 한 사람이 묵에게 뭔가 모종의 임무(?)를 준 것이 틀림없어.’
진한 의심이 들었다.
난 묵이를 향해 고함쳤다.
“묵아아아. 너. 거기 서.”
“쫓아오지 마세요. 나리.”
“누구야? 누가 너에게 날 감시하라고 했어.”
소리쳤다.
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
입을 꼬옥 다물고 양손을 불끈 쥐었다.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이고는 전력을 다해 양발을 놀려, 자개바람이 일듯 맹렬히 뛰는 모습이, 내 짐작이 맞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었다.
난 성나 외쳤다.
“누구야아아아아!”
“…….”
묵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야! 인마.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내가 고함치자, 그제야 묵이 뛰며 대답했다.
“진짜 아니라고요. 나리.”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큰 마님이지. 그렇지?”
다그쳐 물었다.
“…….”
묵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뛰는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죽어라 발을 놀려 뛰는 것이 엄청 절박해 보였다.
“너. 진짜 이렇게 나올 거지. 어디 잡히기만 해 봐.”
묵은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바삐 발을 놀렸다.
씨이이이잉.
나와 묵은 삽시간에 네 여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