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93화 (19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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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벽란도.

고려 최고의 국제 무역항이다.

가까이는 금과 송의 상인들이, 멀리는 이슬람 상인들이 벽란도로 온다.

그런 까닭에 고려 상계에서 한다하는 상인들이 벽란도에 상관을 두고 있다.

상인들은 상관을 통해 일련의 상행을 한다.

그 때문에 벽란도에는 항상 막대한 재물이 오가고 넘쳐난다.

벽란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라 밝음과 어둠이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늘 양지와 더불어 음지가 있는 까닭에 벽란도에도 뒷골목이 있다.

벽란도의 뒷골목을 장악한 것은 요괴라 불리는 냉한귀冷恨鬼 부향이다.

부향에 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한때 뒷골목에 부양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이 꽤 많이 나돌아, 부양에 대한 구구억측이 난무했었다.

뒷골목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주루가 있고 기루가 있으며 도박장 등.

일련의 모든 것이 있다.

뒷골목에서 가장 유명한 주루가 있는데, 다들 밤 귀신들이 모인다 하여 귀루라 불렀다.

귀루는 해가 떨어진 시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만 열렸다.

대부분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거래 때문에 은밀히 귀루를 찾았다.

그런 관계로 귀루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웅성웅성.

주루 1층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2층은 멀 경冂자의 구조였다.

난간을 따라 다수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간간이 유녀들을 옆에 낀 취객들이 비틀거리며 난간과 방 사이의 복도를 지나쳤다.

일순간.

콰아아앙.

우레가 치는 듯한 큰 소리와 함께 2층 중앙에 있는 한 방의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복도 바닥으로 부서진 문의 파편들이 마구 튀었다.

“우와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한 중년인이 방문을 뚫고 복도로 나왔다.

중년인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쳤다.

네댓 걸음을 물러나자, 등이 난간에 걸렸다. 잠시 중년인의 몸이 멈칫거리더니 섰다.

“아…….”

다행이다.

중년인의 얼굴에 그런 안도의 빛이 나타났다.

“어디서 사기를 쳐어어!”

귀루가 떠나가라, 엄청 큰 외침이 들렸다.

휘이이이.

바람을 가르듯 한 가죽신이 벼락 치듯 중년인의 가슴으로 향했다.

장인이 정성껏 만들어, 제법 그럴싸한 꽃을 새겨 넣은 꽃신.

퍼억.

가죽신이 정확히 사내의 가슴 정중앙 명치에 닿았다.

“으아아아아아.”

사내는 입안 천장에 매달린 목젖이 울릴 정도 비명을 지르며 난간에서 뒤넘어갔다.

가뿐하고 1회전하며 곧장 1층 바닥으로 추락했다.

슈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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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1층에 있던 이들은 하던 일과 동작을 멈췄다.

얼음으로 만든 조작상인 양 우두커니 서서 다들 2층을 올려다보았다.

“우와아아아.”

“피, 피해에에에.”

재수가 참 없는, 추락하는 중년인 바로 밑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던 세 사내가 부리나케 일어났다.

그들은 황황급급히 옆으로 몸을 돌렸다.

콰아아앙.

중년인이 간소한 술상이 차려진 탁자에 몸을 뉘었다.

탁자는 충년인의 체중을 이길 수 없다고 무언으로 말하듯 대번에 두 쪽이 나고 말았다.

바닥으로 각종 잔해가 튀고, 날렸다.

잠시.

…….

정적이란 이름의 고요가 귀루 1층에 맴돌았다.

그 사이.

왈칵.

벌컥.

2층의 각 방문이 거의 동시에 열리며 해괴망측한 옷차림을 한 남녀가 복도로 나왔다.

대부분 민망하기 그지없는 작태를 연출하다가 놀라 버선발로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한편.

1층에 있던 이들은 고개를 들어, 조금 전에 중년인이 허리를 걸쳤던 난간을 보았다.

처억.

쓰개치마와 유사한 풍성한 치마를 비집고 나온, 무가 연상되는 큼지막한 발.

도저히 여자의 발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발은 난간에 떡하니 올리고 상체를 숙이며 오른팔을 무릎에 얹은 여자.

냉한귀 부향.

꿈에 볼까?

무섭다!

사팔뜨기에다가가 곰보 얼굴의 여자는 얼핏 봐도 남자 같다.

송곳으로 수없이 찌른 것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점이 얼굴을 가득 뒤덮었다.

위풍당당하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부향의 모습에, 쳐다보는 1층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시선을 낮춰, 부서진 탁자에 몸을 뉜 중년인을 보았다.

충격 탓에 의식을 잃은 듯, 중년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긴 2층 난간에서 떨어지며 탁자를 부수기까지 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

한편.

2층 복도로 나와 있던 남녀들은 부향을 보고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대단하네. 역시 냉한귀야.”

“뭔 여자가…….”

다들 부향을 꺼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냉한귀라는 별명은 그 말에서 연원했다.

부향은 누운 중년인을 쳐다보며 험악하기 짝이 없는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조오또오오…… 18…… 개 같은…….”

부향의 입에서 온갖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돌아가는 사정을 봐하니, 의식을 잃은 중년인이 모조품을 가져와 부향을 속여 돈을 뜯어내려한 것 같다.

부향이 어디 그리 만만한 여자인가?

들켰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부향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중년인이 저렇게 탁자에 몸을 뉜 것은 운이 참 좋은 것이다.

적어도 목숨은 잃지 않았으니깐 말이다.

부향은 엄청 성난 표정을 지으며 입에서 침을 튀겼다.

“어디서 가짜를 가져와서는…… 개 멍멍이 쉐이. 갈아 마셔버려…… 개 샤앙 세키…….”

욕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층과 1층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부향의 걸쭉한 입담에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쩔레쩔레.

다들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 완연했다.

옆으로 돌아서며 다들 각자 하던 일과 동작을 다시 하려했다.

“여어어.”

누군가가 중얼거리며 귀루의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2층에 있던 남녀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직후였고, 1층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하던 일과 행동을 멈추고 들어온 이 혹두를 돌아보았다.

부향은 돌아서려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혹두의 기척에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부향의 얼굴이 다소 찡그려졌다.

“쯧.”

미음에 안 들어.

부향의 얼굴에 그 감정이 살며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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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향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쭈우우.

머리를 젖히며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부향이 앉은 탁자 맞은편에는 혹두가 앉아, 손에 든 서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모종의 정보를 모아 적어둔 서책이다.

부향은 입에서 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

낮은 외마디와 함께 부향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합하의 댁에서…….”

부향의 말에 혹두는 서책을 보다가 흠칫했다.

고개를 들어 부향을 쳐다보는 혹두의 눈동자에 의아함이란 감정이 얼핏 스쳤다.

최충헌의 집이라면 이규보다. 뭔가 급한 정보의 전달이 있는 것이다.

부향의 얼굴이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탁자에 놓여 있는 술병을 들어, 내려놓은 빈 잔을 채웠다.

쪼르르.

낮은 술이 잔을 채우는 가느다란 소리가 울렸다.

혹두는 손을 들어 부향에게 내밀었다.

“줘.”

전달받는 정보를 달라.

그 뜻이다.

부향은 술병을 놓으며 혹두를 쳐다보았다.

빙그레.

부향의 미소에 혹두는 순간 속이 니글거렸다.

‘아유우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야아아. 정말 꿈에 볼까? 무섭다. 무서워. 우욱.’

추녀의 대명사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닌 부향이다.

부향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혹두를 보고는 쌍심지를 곤두세웠다.

그간 벼라 별 일이 다 있었고, 많은 남자와 지금과 유사한 상황을 연출했었다.

척이면 착이고, 착이면 척이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부향은 사내들을 마음속으로 씹으며 인상 쓰기 시작했다.

“허, 험.”

혹두는 헛기침하며 부향을 마주보았다.

“어여.”

정보의 전달을 촉구했다.

부향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흥.”

혹두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매정한 표정을 지었다.

“백금 한 냥.”

“뭐?”

혹두는 얼굴을 내밀었다.

“백금 한 냥이라고요.”

“…….”

혹두는 부향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그게 말이 돼?

라고 묻는 혹두의 무언에 부향은 태연히 대꾸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너.”

혹두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하며 부향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위협하는 듯한 행동에, 부향은 잠깐 움칫했다.

예상하지 못한 혹두의 행동에 한순간에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부향은 입을 꾹 다물고 혹두를 째려보았다.

“…….”

혹두는 부향이 여자 특유의 흘기는 눈초리를 띠자,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 놔아아.’

예쁘기라도 하면 봐줄만 한데,

부향은 혹두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도 엄청 멀었다.

“난. 내 밑에 있는 놈들이 내게 기어오르는 걸 아주 싫어해.”

혹두는 부향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부향은 가볍게 웃으며 혹두를 쏘아붙였다.

“제가 누구를 보고 배웠겠어요. 스승님.”

졸지에 제자 아닌 제자를 두게 된 혹두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전.”

“…….”

“오라버니가 하시는 거 보고 배운 대로 한 죄 밖에 없어요.”

부향은 대차게 나갔다.

벽란도의 뒷골목을 장악한 여걸답게, 전 고려의 뒷골목을 한 손에 틀어쥐고 흔드는 혹두에게 내민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돈!”

혹두는 심중 이는 황당함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정보를 받아보려면 돈 내놓으라고 목숨을 걸고 강짜를 부리는 여자가.

그것도 옥상에서 떨어진 매주 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혹두는 자신이 무슨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에 가만히 부향을 바라보았다.

씨익.

부향은 소리 없이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벌 수 있을 때 왕창 벌어야 한다.

돈 벌 수 있는 기회는 흔하게 오는 것이 아니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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