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92화 (19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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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셈은 밤하늘의 달을 보는 이민호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경련했다.

덜덜덜.

무섭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고려인 어머니와 이슬람 상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지만, 그 동안 숱한 고려인을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유일신 알라를 아는 자는 없었다.

더욱이 교황청과 십자군 원정을 알고 있다니.

자신도 아버지 친구분들에게서 간신히 얻어 들은 것을. 황당하게도 비잔틴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태어나 고려를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을 사람이 어떻게!

백아셈은 황당함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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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따란 방.

멋들어진 옷을 겹쳐 입은 장년인이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놓인 팔걸이에 팔을 올린 모습이 느긋하기 그지없다.

사선으로 뻗은 진한 눈썹과 흉측한 느낌을 주는 외모가 성정이 매우 거칠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장년인 호조 오시마.

좌우로 오시마. 번의 가신들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호조 오시마로부터 네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타이라노 류켄이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머리를 깊이 숙이고 엎드려, 무언으로 굴종이란 의사를 나타냈다.

부복!

류켄은 피가 끓는 어조로 애원했다.

“오시마 도노. 아내와 아들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호조 오시마는 침묵하며 그윽한 눈으로 부복한 류켄을 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좌로 돌려, 좌측 제일 앞에 있는 쉰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무언의 물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호조 오시마의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에 오시마 번의 가로 하치만 신조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타이라노 번의 철광과 은광은 먹음직한 먹잇감이지만 타이라노 번은 오시마 번으로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다.

신조가 망설이는 사이.

신조의 맞은편에 앉은 이치이사 우라베가 호조 오시마를 돌아보았다.

“도노.”

호조 오시마는 흠칫거리더니 우라베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머리를 까닥였다.

말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다.

우라베는 부복한 류켄을 힐긋거렸다.

“이번 고려군의 공격으로 사토시, 키소 두 번이 적잖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고려군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우라베는 류켄의 입조를 허락하자는 속내를 은근 슬쩍 드러냈다.

“도노.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칫 고려 조정과 문제가 생기면 마사코 사마께서.”

신조를 말끝을 흐렸다.

지금 호조가의 수장인 호조 마사코는 고도바後鳥羽 천황과 첨예한 대립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가 불거지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신조는 그런 사견을 슬쩍 내비쳤다.

“흐음.”

오시마는 낮은 침음을 흘렸다.

선뜻 결정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문의 수장인 호조 마사코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명을 내릴지, 판단이 서지 않아 심중 고민이다.

자칫 호조 마사코의 눈 밖에 났다가는 그 날로 자신은 끝장이다.

“도노. 사토시와 키소는 지금 그대로 존속되어야 합니다. 모리나가 번이 타이라노 번을 차지하였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라베는 사토시와 키소 두 번이 비대해진 모리나가 번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도노. 그렇긴 하지만, 고려와 군사적 충돌은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신조는 말하며 우라베를 노려보았다.

우라베 역시 지지 않고 신조를 마주보았다.

직위로는 신조가 위다.

하지만 전대 가로인 부친의 직위를 계승한 신조는 아직 가신들 사이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반면 우라베는 신조를 견제하고자 하는 몇몇 가신의 지원에 힘입어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시마 번의 가신들은 신조와 우라베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서로 반목 중이다.

오시마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숙고에 들어갔다.

그 동안 침묵하던 류켄이 목청이 쉬어라 크게 외쳤다.

“오시마 도노. 도노께도 아내와 아들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부디 가문 대대로 이어온 번을 잃은, 아내와 아들마저 잃은 가련한 저의 울분을 외면치 말아주십시오.”

신조와 우라베를 위시한 가신들이 움칫했다.

인정에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군에 번을 잃고 아내와 태어난지 몇 넌 되지 않은 아들을 잃은 류켄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꽤 많은데.

“부디 아내와 자식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 목숨을 물론 도노의…….”

류켄은 필사적이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 오시마 번이 아니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부디 복수할 수 있게만 해다오.

류켄의 그런 심중에, 오시마는 살며시 눈을 떠 류켄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보이는 류켄은 흐느껴 우는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아내와 아들을 잃은 것이, 자신도 둘째를 본 것이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잃은 류켄의 마음이 어떤지 어림짐작된다.

“류켄.”

“하!”

류켄은 귀에 들린 호조 오시마의 나지막한 음성에 목이 터져나가라 외쳤다.

“소개장을 써 줄 테니 카즈오 번으로 가라. 하면 카즈오 이토가 그대에게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시마 도노.”

류켄은 고갤 들어 호조 오시마를 보았다.

물기에 젖은 눈동자에서 희망이란 빛이 어른거렸다. 운 듯 뺨에 물기가 흘러내린 흐릿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노.”

신조가 급히 오시마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라베는 신조가 나서는 것을 보고 서둘러 오시마를 돌아보다가 멈칫거렸다.

그새 오시마가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근엄함이 묻어나는 모습이라, 우라베는 선뜻 말할 수 없었다.

우라베에게서 신중함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신조.”

“하!”

산조는 재깍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절도 있는 고갯짓이었다.

오시마는 신조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게도 아내와 아들이 있지.”

“도노.”

신조는 고개를 들어 오시마를 보았다.

오시마는 날카로운 안광을 번쩍였다.

“나나에는 아들 아키마루를 가슴에 안고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무가의 안주인다운 죽음이었지.”

“…….”

신조, 우라베를 위시한 가신들은 입을 다물고 번주 오시마를 보았다.

“우리 야마토의 무사들은 서로 죽음을 걸고 싸울망정 상대방의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

말하는 오시마에게서 츄코쿠의 맹주로서의 위엄이 물씬 풍겼다.

오시마는 류켄을 힐긋 보며 말을 이었다.

“류켄은 아내와 지식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부탁하고 있다. 나 호조 오시마는 무엇보다도 우리 츄코쿠를 침략한 고려군의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 타이라노 번의 백성들을 끌고 가고 무가의 안주인을 죽음으로 내몬 고려군을 이대로 가만히 놔둔다면 나는 츄코쿠의 맹주로서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나 호조 오시마의 자존심이기 이전에 우리 오시마 번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다.”

……

조용했다.

가신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오시마가 언급한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시마 번은 츄코쿠의 맹주를 자처한다.

소속 번들을 공격한 외적인 고려군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속한 번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번주 오시마는 은연중에 그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우라베는 고개를 숙이며 힘찬 외침을 내뱉었다.

“도노의 말씀이 지당하다 생각합니다. 도노. 명만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우라베를 따라는 가신들이 일제히 따라 외치며 머리를 숙였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도노.”

일사불란했다.

그렇게 되자, 신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오시마 번과 번주 오시마의 자존심이 거론된 이상, 명예라는 무사의 절대적인 덕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마토의 무사들은 명예에 살고 죽는다!

“도노. 명만 내려주십시오.”

신조는 머리를 숙이며 따를 것을 외쳤다.

그러자 신조를 따르는 가신들 역시 우라베를 따르는 가신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따라 외쳤다.

오시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츄코쿠의 맹주.

그 위치는 그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호조 가의 일원으로서, 무사로서, 오시마 번의 번주로서 그 무엇보다도 명예로워야하며, 존엄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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