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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
여주 서가.
서양헌은 서탁에 앉아 왼손에 쥔 서신을 보았다.
굳은 얼굴이었다.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서신에 쓰인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다. 배가 아픈 것이, 자신도 모르게 아들 서풍과 사위가 비교 되었다.
“음.”
서양헌은 낮은 외마디를 흘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때.
“아버님.”
서양헌은 고개를 들어 방문을 보았다.
“들어오너라.”
“예에.”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서양헌은 방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는 아들 서풍을 보았다.
서풍은 문을 닫은 후 서탁을 향해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가 서탁에 서며 부친 서양헌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찾아 계셨사옵니까?”
“그래.”
서양헌은 머리를 들며 인사하는 아들 서풍에게 왼손에 쥔 서신을 내밀었다.
서풍은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들며 의아해했다.
“아버님. 이것이 무엇인지.”
“읽어보아라.”
서양헌은 무심했다.
‘응?’
서풍은 내심 어리둥절해 부친이 내민 서신을 받아들었다.
펼쳐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얼마 되지 않아 서풍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비, 빌어먹을!’
서풍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경쟁자인 이민호가 또 다시 전공을 세웠다.
사상자가 없다.
가뜩이나 군부의 일각에서 이민호를 군부로 영입하자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고 보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 출전으로 막대한 이문을 얻었다.
타이라노 번과 인접한 사토시, 키소 번에서 왜인들과 각종 전리품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타이라노 번에서 다량의 철괴와 은괴를 얻었다.
서풍은 타이라노 번에 철광과 은광이 있다는 글귀에 절로 시선이 갔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힐긋.
서풍은 서탁에 앉아 있는 부친 서양헌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아버님.”
서양헌은 침묵했다.
“…….”
“혹?”
서풍은 의문의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서신을 힐끔거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서신의 내용은 매우 상세한 것이라, 뒤늦게 미심쩍은 상념이 일었다.
“내가 짐작하는 대로다. 오래전에 곁에 사람을 붙여두었다.
서양헌은 태연히 아들 서풍에게 대꾸했다.
‘역시.’
서풍은 부친 서양헌의 치밀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양광도를 가문의 영역으로 만들고, 양광도의 각 지방 호족들을 아우르고자 하는 부친의 오랜 꿈이 현재 서서히 그 진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서풍은 다 읽은 서신을 서탁에 내려놓았다.
서양헌은 자세를 바로 하는 아들 서풍을 응시했다.
“풍아.”
“예, 아버님.”
“연합 호족군 3천을 데리고 나주로 가라.”
“네?”
서풍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서양헌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조자개의 지원을 받아 왜 배를 그리 건조하였는지, 군사보다는 선부의 양성에 무엇 때문에 매진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하니 나주로 가서 그 사람의 배를 빌려 타이라노 번으로 가서…….”
서풍은 부친 서양헌의 말에 놀란 기색을 띠었다.
서양헌은 날카로운 안광을 번쩍였다.
“왜로 가서 타이라노 번을 차지하거라. 그 곳에 있는 철광과 은광이라면 지금보다 몇 갑절 많은 가병을 양성하는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니.”
서풍은 부친 서양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신중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아버님. 그 사람이 순순히 배를 빌려주겠습니까?”
내심 안타까워했다.
‘진작에.’
왜로 갈 수 있는 다수의 배를 건조했어야 한다.
지금 서가에는 왜로 갈 수 있는 배가 없다. 설사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3천여 가병을 태울 수 있을 만한 수는 되지 않는다.
또한 배를 운용할 선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어디 배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던가?
배를 움직이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단순히 병력 수송에 그치지 않고 물자와 획득한 전리품을 가져오려면 화물선이 다수 있어야 한다.
군량미와 각종 무기를 적재하는 운송선도 필요하고.
이러저런 다양한 용도로 쓰일 배들이 있어야 비로소 왜를 공략해 볼 욕심을 낼 수 있다.
한데 서가에는 지금 그럴 역량이 없다.
뼈아프게도 말이다.
서양헌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은 철괴와 은괴를 실은 배를 타고 벽란도로 향할 것이라 한다. 이끌던 다른 배들은 나주로 간다. 그 사람이 벽란도로 왔다가 곧바로 나주로 가지는 않을 게다. 틀림없이 개경에 들렸다가 나주로 돌아갈 것이다. 필시 적잖은 시일을 개경에 보내고 나주로 돌아가는 그 사이…….”
서혜.
서양헌은 이민호에게 시집간 딸을 언급했다.
서풍은 흠칫했다.
“하오시면.”
서양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서신을 써 줄 테니. 서혜에게 갖다 주어라. 하면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를 움직일 수 있을 게다. 물론 그 사람이 언짢아하겠지만, 너는 처남이고 우리 서가는 처가이니. 대놓고 적대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타이라노 번을 점령하여 우리 서가의 봉토로 만들고 굳건한 세勢를 다진 연후에…… 철광과 은광을 네게 빼앗겼다 화낼 테지만, 적당히 이문을 배분해주고 서혜를 통해 다독인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은 상황에서 그 사람도 어찌 할 수 없을 게다. 더욱이 우리가 최 부사와 손잡은 상태이니,”
속이야 쓰리겠지만 별 수 없다.
서양헌은 그런 속내를 언급했다.
서풍은 신중하게 사견私見을 밝혔다.
“아버님. 그리되면 혜아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도 크게 섭섭히 여길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모른다. 여기느냐? 다 알고 있음에도 너와 가문의 훗날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서양헌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 여겨 서운한 기색을 띠었다.
“…….”
서풍은 뭐라 말하지 못했다.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이민호가 크게 화낼 것이다.
아닌 말로 멀쩡히 두 눈 뜨고 처가와 처남인 자신에게 점찍어둔 철광과 은광을 빼앗긴 꼴이 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이번 일로 행여 여동생 서혜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지는 않을까? 염려된다.
서양헌은 아들 서풍이 께름칙한 기색을 띠는 것에 얼굴을 찌푸렸다.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아들 서풍이 모진 구석이 없음을 애석히 여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풍아.”
“네, 아버님.”
“홍문의 연을 아느냐?”
서풍은 부친 서양헌의 물음에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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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연鴻門宴.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연회를 의미한다.
진의 수도 함양을 유방과 항우가 다투었다. 한데 유방이 먼저 함양에 입성, 한왕을 자처하고 말았다.
“그리 하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장량이 유방을 극구 말렸으나, 본시 출신과 신분이 비천하고 그 성정이 야비하며 매우 출세지향적인 음흉한 이리와 같은 유방은 장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항우가 대노해 홍문에 진을 쳤다.
“이노오옴. 유방!”
당시 유방의 군세는 40만, 유방은 10만이었다.
병력의 수가 역전되어 유방의 군세가 40만이라고 해도 항우의 막강한 용력과 군사를 움직이는 범증의 병술을 상대로는 필패였다.
장량이 호기에 차, 세상 물정 모르는, 한왕이란 것에 목을 매고 한사코 싸우려는 유방을 타일렀다.
“지금 싸우시면 필패입니다. 정녕 예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으십니까? 항우가 만부적당의 맹장 중 맹장임을 모르십니까? 휘하의 군병들이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역전의 용사이거늘.”
항우와 모사 범증은 막강 그 자체임을 입에 올리며 장량은 간신히 유방을 설득했다.
유방은 모사 장량의 말을 따랐고, 범증은 홍문을 찾아와 사과하려는 유방을 죽이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그것이 이른바 홍문연이다.
홍문연은 사실상 초한楚漢 전쟁의 시작점이었다.
또한 항장검무의재패공項莊劍舞意在沛公이란 말이 나온 연원이기도 했다.
항장이 춤을 추는 것은 패공 유방을 죽이고자 함이다!
그런 뜻이다.
훗날 해하, 그러니깐 안휘성 화연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생긴 상황에 항우가 처했다.
사방에서 초나라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리고 병사들이 사기를 잃고, 고갤 깊이 떨구며 흐느껴 울었다.
항우가 가로되.
“내 어찌 홍문연에서 유방을 살려두었단 말인가? 그 때 범증이 유방을 죽이고자 그리 애를 썼거늘.”
때는 이미 늦어, 모름지기 후회란 때를 놓친 다음에 하는 것이라, 결국 항우는 그 유명한 해하가垓下歌를 남기며 강가에서 자진하고 말았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騶不逝
騶不逝兮可奈何
虞兮憂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고 기세를 천하를 덮건만.
때가 불리하니, 애마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추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랴.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
상대를 죽여야 할 때 죽이지 않고 자비를 베푼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뼈아프며 통탄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항우는 유방과의 초한 전쟁에서 수차례 싸워 연전연승하였으나, 끝까지 오만에 차 단 한 번의 전투戰鬪로 모든 것을 잃었다.
심지어 그 자신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유방이 잘나서, 장량이 엄청 대단해서, 한신이 전하는 대로 일대 명장이라서 항우가 그리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유방, 장량, 한신이 동시에 항우에게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항우가 모든 세력을 잃고 종국에는 자진까지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항우는 자신의 용력만 믿는 멍청이이라는 점.
둘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메워주는 범증을 버렸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