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89화 (18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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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에 정박한 수백여 척의 배에서 타이라노 번, 사토시, 키소 번에서 끌려 온 이들이 포구로 내렸다.

세 번에서 약탈해온 각종 물품들 역시 내려졌다.

지휘선 내부에 있는 이민호의 선실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화복 노인 진지립.

둥그스름한 살찐 얼굴에 눈코를 비롯한 이목구비가 한데 모여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욕심이 많아 보인다.

그런 한편으로 재복이 여느 사람보다 많아 보이기도 한다. 이래저래 돈 복은 타고난 이 같다.

난 여느 사람과 달리 특이한 느낌을 주는 진지립을 마주보며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우측에 앉아 있는 진지립이 데리고 온 통역 중년인 마동이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첫 거래치고는 인상적이다. 진 대인께서 그리 말씀하십니다. 목사 나리.”

진지립은 날 쳐다보며 친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툭 말을 던졌다.

“짜!”

정중한 공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대하는 것도 아닌 외마디.

마동은 당황하며 진지립을 힐긋거렸다.

‘이런.’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난감했다.

진지립은 마동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하는가?”

“그게. 저어.”

마동이 진지립을 쳐다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내심 미소 지었다.

씨익.

중국어를 100%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다.

다 군에서 받은 군사 교육 덕분이다.

“어허.”

진지립이 마동에게 언성을 높이며 날 힐끗거렸다.

“있는 그대로 통역하게.”

넌지시 매서운 눈초리를 번득였다.

마동은 움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지립이 데리고 온 통역이다. 아닌 말로 마동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 진지립이다.

마동은 어쩔 수 없이 이민호가 말한 외마디를 진지립에게 전했다.

대번에 진지립의 낯빛이 변했다.

홱.

진지립은 날 쳐다보았다.

“…….”

입을 꾹 다물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꽤 화나 보인다.

“뭘 봐?”

난 대놓고 진지립의 부아를 돋웠다.

일순.

“컥.”

마동이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어이없다.

마동의 얼굴에 그런 감정이 나타났다.

“돈. 더 내놔.”

난 마주 앉은 진지립이 노인이라는 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첫 거래다.

진지립은 남송의 거상이다.

뜯어낼 수 있는 한 왕창 뜯어내는 것이 내겐 이익이다. 예의고 거시기고 필요 없다. 어차피 돈 때문에 이렇게 사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된 인간관계다.

굳이 진지립 아니라고 해도 거래할 수 있는 상인은 널리고 널렸다. 단지 묵이 거래하던 상인을 통해 진지립을 소개받은 것뿐이다.

그런 이유로 난 진지립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모, 목사 나리.”

마동이 내게 말을 붙이며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랄하지 말고 내 말 있는 그대로 전해.”

“나리.”

“나.”

천천히 엉덩이를 들었다.

“일어난다.”

“나리!”

마동이 기겁했다.

내가 일어난다는 것은 거래 파토를 뜻한다.

진지립이 마동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꺼져!”

나지막이 말하는 진지립의 말에 마동이 소스라치며 진지립을 돌아보았다.

“대인.”

진지립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앉은 원탁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스슥.

손을 놀려 필담이라는 글자를 썼다.

난 일어나 진지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마동은 어쩔 줄 몰랐다.

통역이 해야 할 일이다. 통역이 불필요하면 자신이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즉, 마동의 모가지가 이 순간 날아갔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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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원탁에 다수의 화선지와 붓 그리고 벼루 등이 준비되었다.

나와 진지립은 필담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 짜다. 더 내놔라.

• 넉넉히 쳐 준 거다.

• 더 안 내놓으면 거래 끝이다.

내가 쓴 화선지를 내밀자, 진지립이 받아보고는 정색하듯 얼굴빛을 바꾸었다.

진지립을 보고 다시금 붓을 놀려 화선지에 글을 썼다.

• 거래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가? 새로운 계약을 맺으려면, 장기간에 걸쳐 이익을 보고 싶다면, 더 내놔라.

• 무리한 요구다.

• 싫음 마라. 난 다른 상인과 거래하겠다. 상인이 어디 당신만 있는가?

내가 단호하게 나가자 진지립이 날 뚫어져라 보았다.

“…….”

느긋한 자세를 취하며 침묵했다. 무언으로 진지립의 결단을 추구했다.

진지립의 눈동자에 고민이라는 감정이 엿보였다.

‘쇠키!’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 상인주제에 어디서 무슨 예의 같은 것을.

마주앉은 진지립 지가 무슨 유사라고 개폼 잡는 것이 난 못마땅했다.

내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진지립에게 머리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지립이 내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거래가 끝나고, 진지립은 남송으로 돌아가며 몇 배의 차익을 손쉽게 얻는다.

한 마디로 말해 내가 진지립의 호구가 되는 것은 무조건 피하고 싶다.

그럴 이유도 없고.

진지립은 고심했다.

‘빌어먹을.’

상대가 매우 고압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데, 그에 맞서 자신이 내밀 수 있는 패가 없었다.

자신 외에 거래를 하고자 하는 상인들은 많다.

게다가 마주 앉은 상대, 고려 나주목의 목사라는 자가 거래하고자 하는 물량이 여느 다른 거래처의 몇 곱절이라, 떨어지는 차익 역시 몇 곱절에 이른다.

더욱이 한 번의 거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거래가 계속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흠.’

진지립은 고민했다.

남송은 양자강 유역의 관개 농업이 크게 발달함과 동시에 수도인 임안이 밤낮으로 흥청망청거릴 정도로 경제력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금의 세종과 맺은 화약의 대가로 매년 금 25만 냥과 비단 각 25만필을 줘야 했음에도 국가 재정은 끄떡없었다.

노임을 주지 않고 먹을 것만 주고 부려먹을 수 있는 공짜 노동력은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터라, 차익이 실로 입이 쩍 벌어지는 터라, 마냥 자존심을 내세울 수만은 없었다.

‘별 수 없지. 상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하지만 안 좋아. 이렇게 첫 거래부터 상대에게 질질 끌려가서는, 하지만 소금을 생각하면.’

진지립은 상대가 가진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을 감안했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오른손으로 붓을 쥐며, 왼손으로 오른손 소매를 잡았다.

천천히 붓이 화선지를 스치며 먹물이 스며들며 글자가 나나타났다.

스스슥.

진지립은 붓을 내려놓고, 쓴 화선지를 내게 내밀었다.

• 좋습니다. 목사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리고 소금을 사고 싶습니다만.

• 값만 맞다면 못 팔 이유가 없지.

• 앞으로도 계속.

• 몇몇 상인들이 거래를 하고자 해서 말이야.

• 네?

진지립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난 붓을 들어 의사를 화선지에 적어나갔다.

• 사고자 하는 상인은 많은데, 팔고자 하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응당 높은 값을 쳐주는 상인에게 파는 것이 당연하잖아.

• …….

진지립은 입을 다물고 날 보았다.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아, 난 마주보며 웃었다.

씩.

고려 시대에 경매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매를 통해 사고자 하는 상인들의 경쟁을 부추기면 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

진지립이 멀거니 날 바라보았다.

붓을 들어 다시금 화선지에 글을 썼다.

스스슥.

• 재가 보다 값을 잘 쳐드릴 테니깐.

• 생각해 보지.

붓을 내려놓고 진지립을 향해 화선지를 내밀었다.

진지립은 화선지를 받아들고 힐긋 본 후, 날 쳐다보며 호의가 배인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 니들 상인들의 미소는 가식이라는 거.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내가 달리 알바의 프로인 줄 알아. 알바하며 니들 상인들의 속성을 훤히 꿰뚫은 나야.’

내가 알바하면서 본 상인들 모두 정직과는 거리가 엄청 멀었다.

사람 좋은 표정과 미소라는 의도적이고 가식적인 수단으로 고객으로 하여금 옷을 사게 한다.

무릇 상인이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내가 알바를 엄청 많이 하면서 느낀 깨우침(?)이다.

‘후후. 속이 조금 쓰리긴 하겠지만. 내가 넘기는 것을 남송으로 가져가면 그 차익이 도대체 얼마야.’

진지립이 차지할 차익이 아깝다.

나중은 몰라도 지금은 진지립을 통해 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

‘제기랄! 나중에 꼭 상단을 만들고 만다.’

아깝다!

정말!

현재 남송이 돌아가는 내부 사정을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남송은 북송과 비교할 때 영토와 인구가 ⅗으로 줄어들었음에도 그 성세는 북송 때를 압도했다.

토질이 비옥화고 수량이 풍부하여 예부터 농사짓기에 매우 적합한 강남이 집중 개발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운하를 바탕으로 상업과 비단과 자기로 대변되는 수공업이 크게 일어나, 경제력이 금나라와 우리 고려를 압도하고 있었다.

송학이라 불리는 학문이 크게 일었고, 서민 문학이 발흥하여 수도 임안에서는 밤낮으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겼다.

낮밤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하루 24시간 내내 모든 것이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도 임안의 상주 인구만 1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12, 3세기 아시아에서 150만의 사람이 상주하는 엄청난 대도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밤낮으로 임안으로 각지에서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이슬람권의 상인들까지 말이다.

‘젠장.’

솔직히 난 남송이 엄청 부러웠다.

그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병을 양성하고 신무기를 만들어내면 아마 몽골 제국 못지않은 거대한 제국을 일굴 수도 있을 텐데.

‘그 머저리들은.’

속으로 인상 썼다.

문치 위주의 남송은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을지는 몰라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최약체다.

그 아까운 경제력이 나중에는 몽골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이후 200여 년 간에 걸친 몽골 제국의 중요 국가 재정이 된다.

배 아프게도 말이다.

진지립과의 거래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거래에서 파생된 은과 비단이 예상 외로 많아 휘하 군병들에게 넉넉히 쥐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난 내심 흡족해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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