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83화 (18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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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카.

정박한 300여 척이 넘는 선박과 포구를 수백여 명에 이르는 군병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난 각종 짐을 배에 싣는 광경과 끌고 온 남녀를 배에 태우는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주변에는 묵, 혹두, 백아셈, 황곤, 변재일, 맹우, 나 영감, 오승록 등.

측근들이 둥그스름한 원의 형태로 서 있었다.

“묵아.”

“예, 나리.”

우측에 서 있는 묵을 돌아보았다.

“사토시와 키소 , 두 번으로 간 오용섭과 이웅은 어떻게 됐지?”

“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근해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좋아.”

난 묵의 왼쪽에 서 있는 혹두에게 시선을 주었다.

“혹두.”

“네.”

혹두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됐어?”

“네?”

혹두가 내게 반문하며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 라는 표정을 지었다.

“쓰!”

인상 쓰며 혹두는 노려보았다.

혹두는 눈치가 보이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측근들이 나와 혹두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런 기색을 띠었다.

“내가 시킨 거 어떻게 됐냐고?”

언성을 조금 높였다.

혹두가 날 흘겨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을 띠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됩니까?”

“뭐, 인마.”

내가 성난 목소리를 내뱉자.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 당장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뻔히 다 아시면서.”

혹두는 삐친 듯 날 흘겨보았다.

“허이고. 말이나 못하면.”

난 중얼거리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승록.”

“예, 나리.”

“내가 명한 포구와 마을에서 값나가는 것은 몽땅 다 빼앗아 배에 실으라는 건 어떻게 됐어?”

“일단 값이 나갈 것 같은 것은 죄다 다 실었습니다만, 그다지 값나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양곡은?”

“네. 몽땅 다 배에 실었습니다. 저어 나리.”

오승록은 말끝을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뭐야?”

“네?”

오승록은 내 목소리가 거친 것이 신경이 쓰이는 듯 움찔거리며 반문했다.

피식.

난 옅은 고소를 흘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아, 네.”

오승록은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중한 눈빛을 띠었다.

“나리.”

“…….”

“마을에 있는 이들은 죄다 양민입니다. 저희들이 양곡을 다 가져가버리면.”

애처롭다.

오승록은 넌지시 그런 감정을 내비쳤다.

주변에 서 있는 측근들은 오승록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듯 날 주시하기 시작했다.

“풋.”

난 가볍게 웃으며 오승록과 측근들을 둘러보았다.

“어쭈.”

한심한 자들이다.

어설픈 감정에 휘둘리고 있어 심중 화가 났다. 그 때문에 일부러 버럭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오승록과 측근들은 내가 소리치자 화들짝 놀라며 날 보았다.

난 그들에게 성냈다.

“왜구 놈들이 우리 고려의 양민들을 어떻게 했는데. 그걸 벌써 다 잊었어. 왜구들이 우리 고려애서 약탈한 양곡이 다 어디로 들어 갔다고 생각해.”

“…….”

오승록과 측근들은 노려보는 내 시선을 피하려했다.

고개와 시선을 모로 돌리는 것이, 은연중에 꺼리는 속내가 엿보였다.

“이것들이.”

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오승록과 측근들을 돌아보았다.

“저 놈들이 불쌍해에에에.”

고함치며 옆으로 돌아서며 오른손 검지를 들어 배에 강제로 태워지는 남녀를 가리켰다.

“저들이 지금가지 배를 불린 양곡이 다 어디서 나왔을 것 같아. 왜구들이 우리 고려에 와서 한 짓을 생각이나 하고서 그 따위 망발을 내뱉은 거냐? 왜구 놈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었는지 알고서 그 따위로 말해.”

“…….”

오승록과 측근들은 침묵했다.

난 그들을 호되게 몰아붙였다.

“어설픈 감상 따윈 버리는 게. 좋아. 너희가 그런 감상에 젖어 불쌍히 여기는 자들이 어느 한순간 왜구로 돌변해, 너희들의 배때기에 검을 쑤셔 넣을지도 모르니깐.”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눈보라가 치듯 일순 분위기를 흉흉하게 몰아갔다.

간혹 군에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오승록과 측근처럼 되도 않은 어설픈 감상에 젖어 설레발치다가 뒈지는 놈을 몇 보았다.

사전에 누누이 교육과 주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가 무슨 성인군자라고 헛짓하다가 하루아침에 비명황사하곤 했다.

지 혼자 죽는 거야 누가 뭐라겠는가?

문제는 엄한 그 놈 때문에 주변에 있던 다른 놈들까지 휩쓸려 개죽음 당한다는 것이다.

난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오승록과 측근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왜구에게 가족을 잃어보지 않았으면 두 번 다시 그 따위 망발은 입에 올리지 마라.”

내 서슬이 퍼랬기 때문일까?

오승록과 측근들은 몸을 한껏 움츠렸다.

나 영감을 쳐다보았다.

“나 영감.”

“예에. 나리.”

“석포병대는?”

“네, 명하신대로 배치가 끝났습니다.”

“오승록.”

오승록을 돌아보았다.

“예, 나리.”

“검병대는?”

“네. 유사시를 대비해 300여 명 모두 마을 곳곳에 흩어 놨습니다.”

오승록은 다른 이보다 유독 내 눈치를 심하게 보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든 주범(?)인 까닭에 은연중에 어색해했다.

난 묵을 보았다.

“배는?”

“네 곧 출항 준비가 끝날 겁니다. 나리.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좋아. 황산해더러 서둘라고 그래.”

“예에.”

묵이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난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를 돌아보았다.

최소 300여 척이 넘는다. 병력 수송선, 화물 운송선 등등. 선박의 종류는 매우 많다.

“휴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난 몇 년 동안 눈에 보이는 배를 건조하고, 배를 운용할 선부들을 양성하는데 가진 돈 대부분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불과 3천여 군병 밖에 키우지 못했다.

배가 없으면, 배를 운용할 선부가 없으면 고려에서 왜로 올 방법이 없다.

무슨 수로 망망대해를 건넌단 말인가?

달리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탓에 별 수 없었다.

난 재차 시선을 돌려 마을 너머를 보았다.

‘썩을.’

철광과 은광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차지한다면 재정적으로 독립이 가능해진다.

내 짐작이긴 하지만, 못해도 최소 1만여 명에 이르는 군병을 키우는데 필요한 재원은 가볍게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갖지 못하는 것에 집착해봐야.’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다.

무리는 항상 탈을 불러온다.

‘지금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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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봉분.

타이라노 번의 번주 류켄은 이노치에 의해 야스라가에 도착하며 의식을 되찾았다.

그런 류켄에게 절망이 찾아왔다.

이노치 역시 절망이란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 여긴 하야마와 가병 300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야스라가 곳곳에서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화마가 야스라가를 뒤덮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시녀들 몇이 야스라가에 닥친 횡액(?)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내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아들 아키마루의 죽음!

류켄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란 이름의 아픔에 가슴이 미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머리를 들어, 온 세성이 떠나가라 고성을 질렀다.

“도노…….”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노치는 머리를 힘없이 숙이며 중얼거렸다.

불운해도 이리 불운할 수가 있나?

모리나가 번의 공격도 공격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려군까지.

그로인해 타이라노 번이 입은 피해와 손실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다.

인접한 다른 번들로부터 타이라노 번을 지킬 모든 가병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사실상 타이라노 번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맛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류켄과 함께 타이라노 번을 크게 일으킬 가신들 역시 다 잃어, 타이라노 번의 번주가인 타이라노 가문은 멸문에 준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잠시 동안.

류켄은 아내 나나에와 아들 아키마루가 영면한 봉분 앞에서 비통한 심중을 토하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고려어어어어어어!”

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공존할 수 없는 원수 불공대천지수.

류켄은 고려를 그런 존재로 받아들이며 아내 나나에와 아들 아키마루를 죽음으로 내몬 원한에 격렬히 몸을 덜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류켄은 양손을 들어 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 숙인 이노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양손을 말아, 힘주어 주먹 쥐었다.

그 때.

“와아아아아아아아.”

허공 저 멀리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이노치는 흠칫거리며 황급히 머리를 들었다.

우측으로 머리를 돌리며 놀란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노!”

이노치는 급히 류켄을 돌아보았다.

머릿속에서 미츠이 시게노부와 그가 이끄는 모리나가 번의 가병들이 떠올랐다.

“도노.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미츠이에게 잡히고 맙니다. 도노.”

다급함이 진하게 묻어나는 이노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류켄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노치의 얼굴 표정이 매우 조급하게 바뀌었다.

“도노.”

류켄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

그에 이노치는 류켄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아들 아키마루를 입에 올렸다.

“도노. 미츠이에게 사로잡히시면 마님과 아키마루님의 복수는 영영 물 건너가 버립니다.”

류켄은 이노치의 외침에 움칫거리며 뒤돌아보았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동자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그득 담겼다.

“도노…….”

이노치는 안타까움에 젖은 목소리로 류켄을 불렀다.

류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려 봉분을 보았다.

머릿속에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이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아들 아키마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내 나나에보다 아들 아키마루의 죽음이 더 가슴에 사무치는 류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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