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77화 (17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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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에 박히는 미성이 들렸다.

하야마는 눈을 치켜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입 안쪽 천장에 매달려 있는 살덩어리 목젖이 한 눈에 다 보였다.

“…….”

할 말을 잃은 듯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야마의 미간에 깊숙이 박힌 한 단전이 위아래로 진동했다.

부르르.

천천히 하야마의 몸이 뒤넘어갔다.

묵직한 외마디 소리와 함께 하야마는 지면에 몸을 뉘였다. 잠시 잔떨림을 흘리더니 사지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난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리.”

뒤에서 날 부르는 황곤의 외침이 들렸다.

뒤돌아보니, 황곤이 탄 말이 날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안장에 앉은 황곤의 오른손에 삼연발 노弩가 들려 있었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쩝.”

난 죽은 노장 하야마를 돌아보며 왼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다 당신 운명인 것 같소. 그러니 원망일랑 말고 편히 가시오.”

오랜 노장에 대한, 3대에 걸쳐 타이라노 번의 번주를 섬긴 충신에 대한 예로 중얼거리며 난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미안하다.

이리 치졸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은 아닌데.

그 사이.

황곤에 내 왼쪽에 이르러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지척에서 말울음이 들렸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날 걱정하는 황곤의 물음에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안장에 앉은 황곤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안 괜찮아.”

“예에?”

황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난 죽은 하야마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간만에 맞짱뛰는 가 싶었는데. 자네가 산통을 다 깨버렸어.”

아쉬워했다.

“하하하하.”

황곤이 고개를 들며 시원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쩝.”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각 200여 명의 검병대와 기병대에 의해 하야마가 통솔했던 타이라노 번의 가병 300은 지리멸렬했다.

주위는 전장 정리에 들어갔다.

웃음을 그친 황곤이 내게 물었다.

“제가 눈치 없이 방해한 것입니까?”

“아니.”

난 짧게 대꾸하며 황곤을 쳐다보았다.

“전장이란 운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해. 다 저 영감의 팔자고 운명이야. 아쉽긴 하지만서도.”

말끝을 흐리며 다시금 죽은 하야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쯧쯧. 조금만 더 주의를 하지.’

내가 죽이는 것보다 황곤이 죽이는 것이 나을까?

참 마음이…….

그렇다.

하야마가 느닷없이 죽은 것은 전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죽은 하야마가 부주의한 탓이지, 황곤의 잘못은 아니다. 일대일로 붙는 교전은 전장에서는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니깐.

“나리.”

“응.”

황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변재일이 뛰어오고 있습니다.”

난 우측을 돌아보았다.

황곤의 말마따나 검병대를 지휘하는 변재일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리.”

“왜에?”

난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며 황곤을 힐끗거렸다.

“지금쯤이면 혹두와 맹우가 타이라노 번의 본성 야스라가를 접수했을 겁니다. 그러니.”

“알았어.”

난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저는 그럼.”

황곤이 말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전열을 재정비하는 즉시, 날 기다리지 말고 야스라가로 가.”

“네.”

황곤이 대답하며 양발로 탄 말의 배를 찼다.

히힝.

말이 낮은 울음을 흘리며 말발굽을 놀렸다.

2 장

오승록과 그가 이끄는 300여 명의 군병은 포구 너머에 있는 마을을 약탈하고 있었다.

와장창.

기물이 마구 나뒹구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가 어울러져, 마구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안 돼에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지르는 고성이 들렸다.

군병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여자들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질질 잡아끌었다. 저항하는 남자는 이유 불문하고 그 자리에서 주살했다.

“크아아악.”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그칠 새가 없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군병들에게 싹싹 빌었다.

군병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 자업자득이야.”

비는 이들을 조소했다.

그 사이 마을 한쪽에서는…….

“걸어.”

다른 군병들이 사내들의 사지를 굵은 밧줄로 묶어, 굴비 엮듯이 서로 연결했다.

소지한 창과 검으로 묶인 사내들을 위협하여 포구로 끌고 갔다.

그런 한편으로.

“나리이이. 그걸 가져가시면 우리들은 모두 굶어죽습니다.”

“그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란 말입니다.”

“제발 돌려주십시오.”

군병들이 각 집을 뒤져, 닥치는 대로 일련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았다.

심지어 양곡과 이불호청까지, 값이 나갈 것 같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가리지 않고 들고 나왔다.

“안 됩니다.”

“멈춰 주세요.”

“안 돼!”

일련의 약탈로 마을은 몹시 떠들썩했으며 소란스러웠다. 소란도 그런 소란이 없었다.

전쟁터 못지않았다.

오승록은 말을 타고 몇몇 호위병, 십인장과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눈에 보이는 마을 사람들은 죄다 비무장의 민간인이었다. 그들을 강제로 포구로 끌고 가, 배에 태운 후 탐라에서 상인들에게 팔아치운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따깍, 따깍.

탄 말이 내딛는 나직한 말발굽 울림이 귓전에 들렸다.

‘차라리 손에 검을 들고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낫지.’

오승록은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 동안 왜구들에게 당했던 것에 비하면 별 거 아니라는 감정이 일었다.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왜구의 칼에 죽는 것을 보았고, 어머니와 누나가 왜구에게 당하는 것(?)을 목도했다.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려고 맨손으로 왜구에게 대항하다 죽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왜구들에게 끌려간 어머니와 누나를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찾을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헤어진 가족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인가?

집안에 있던 모든 양곡을 왜구가 모조리 다 빼앗아 가는 바람에, 왜구가 약탈한 지역에 살던 고려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 굶어죽었다.

왜구에게 당한 고통과 아픔 그리고 슬픔 등. 일련의 피해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

언급한 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런 이유로 마을을 약탈하며, 성인 남녀를 닥치는 대로 포구로 끌고 가는 군병들에게서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군병들의 얼굴에는.

왜구를 조소하고 비웃는 통쾌감.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

당한 만큼 되갚아주는 복수의 쾌감.

등등.

다수의 감정이 그득 떠올라 물결쳤다.

오승록은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호위병들을 통솔하는 십인장을 보았다.

“마 십인장.”

“예. 백인장님.”

“이리 가까이 와 봐.”

“네.”

십인장은 천천히 말을 모는 오승록의 좌측으로 뛰어갔다.

후다닥.

@

잠시 뒤.

“예에에에.”

십인장은 깜짝 놀랐다.

오승록은 십인장을 향해 상체를 돌린 후 허리를 숙였다.

“명심해.”

“아, 예에에.”

“지금 당장 준비해둬.”

“네.”

십인장은 머리를 숙였다.

오승록은 자세를 바로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우.”

한숨을 쉬었다.

오승록은 시야에 보이는 마을에 슬며시 얼굴을 찌푸렸다.

마을은 그리 유복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극빈하다는 것이 한 눈에 다 보이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가옥들이 잔뜩 시야에 들어왔다.

“우릴 원망하지 말도록. 이건 모두 너희가 자초한 거니깐.”

오승록은 알아듣기 어려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사이.

타다닥.

십인장이 뒤돌아서더니, 잽싸게 뛰어갔다.

오승록은 힐긋 뛰어가는 십인장을 흘겨보며, 살짝 탄 말의 배를 찼다.

투, 툭.

히힝.

말은 낮은 울음을 흘리며 오승록의 뜻에 따라 말발굽을 내밀었다. 안장에 앉은 오승록은 말발굽이 내디뎌질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흔들림은 얕았다.

그리 세지 않았다.

오승록은 침중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썩을!’

시야에 보이는 일련의 광경에 심중 매우 안타까워했다.

최고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민호의 명령인 까닭에 언감생심 어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따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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