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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의 얼굴이 하얗게 급변했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닌가?
‘하필이면 이런 때에.’
하야마는 눈앞이 캄캄했다.
모리나가 번에서 철광과 은광을 노리고, 전장의 너구리라 불리는 미츠이 시게노부에게 가병 1천을 주었다.
미츠이는 키노시타가 이끄는 500여 가병의 방어선을 돌파, 철광과 은광을 손에 넣었다.
타이라노 번에 있어 철광과 은광은 목숨 그 자체다. 그런 이유로 번주 류켄이 1천여 가병을 대동하고 다시 철광과 은광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
타이라노 번에 남은 병력은 가병 500이 다다.
그 중 200여 명은 번 곳곳으로 흩어져 치안과 질서 유지 중이다.
야스라가 성에 남아 있는 병력은 가병 300여 명 뿐이다.
하야마는 마음이 급해, 휘하 가신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한편, 코와산으로 출정한 번주 류켄에게 고려군이 쳐들어왔음을 알리는, 회군을 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주군 류켄이 과연 휘하 1천여 가병의 발길을 야스라가 성으로 되돌릴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도 철광과 은광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미츠이에게 시간을 준다면, 미츠이는 모르긴 몰라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매우 조밀하고 탄탄한 방어선을 칠 것이다.
가뜩이나 모리나가 번과 병력 차이가 심하게 나는 처지인데. 그렇게 되면 철광과 은광을 되찾는 것은 실로 요원 그 자체가 된다.
그런 이유로 주군 류켄에게는 지금의 현실이 감당하기 벅찬 선택이 될 것이다.
철광과 은광이냐?
아니면 타이라노 번의 봉토냐?
둘 중 하는 포기해야 한다.
하야마는 나리시몬이 보낸 전령에게 수고했다고, 물러나 쉬라고 말한 후 출전 준비를 서둘러라.
“영지에 나가 있는 모든 가병을 야스라가로 불러들여라. 그리고 영지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모두 다 징병하라. 우리 타이라노 번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이다.”
하야마는 몸을 떨었다.
부들부들.
노구가,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자신을 엄습해왔다.
철광과 은광은 타이라노 번의 희망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다.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자 화근이 되고 말았다.
사토시, 키소, 모리나가 아니 나아가 오시마 번의 눈 밖에만 나지 않았어도.
철광과 은광에 탐을 낸 오시마 번이 모리나가 번을 내세우지만 않았어도.
타이라노 번을 집어삼키라 오시마 번이 모리나가 번을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하야마는 노구에 갑주를 걸치고 허리에 오랜 동안 자신과 함께 한 애검을 차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카요시! 으드득!”
하야마는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것이 네놈 탓이다. 고려에 가서 패퇴하지만 않았어도, 제 놈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무리하게 요시미츠가를 통째로 날려먹지만 않았어도.”
후회라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일어나 마구 물결쳤다.
어쩔 도리가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는 시간의 저편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지금은 타이라노 번의 영지를 지키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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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라노 번의 번주 류켄과 그가 이끄는 1천여 가병은 코와산을 반나절 남겨둔 노바나のばな에 이르러 군진을 쳤다.
패전한 키노시타 아이치가 이노치와 패잔병 200여 명을 이끌고 류켄의 군진에 합류했다.
네 개의 나무막대가 높다랗게 땅에 꽂혔다.
주위에는 비단 장막이 둘러쳐져, 불어오는 바람이 펄럭였다.
멋스러운 갑주를 걸치고 접이식 의자에 앉은, 위풍당당한 모습의 번주 류켄은 성난 눈초리를 번쩍였다.
좌우에는 타이라노 번의 가신들이 맨땅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가지런히 꿇은 다리에 얹었다.
그들의 시선은 번주 류켄으로부터 네 걸음 떨어진 맨땅에 부복한 키노시타와 이노치를 향했다.
키노시타와 이노치는 가까스로 도망쳤는지, 몰골이 이만저만 흉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봉두난발하였고, 얼굴과 입은 갑주에는 다수의 혈흔이 낭자했으며, 갑주 곳곳에는 잘리고 베여 다수의 틈이 벌어졌다.
갑주에는 격전을 치른 다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신들은 슬그머니 번주 류켄을 곁눈질했다.
시야에 보이는 류켄은 분노로 잔떨림을 흘리며, 왼쪽 옆구리에 찬 두 자리 검 중 한 검에 왼손을 얹었다.
류켄은 여차하며 앉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일수一手에 허리에 찬 검을 빼들어, 단숨에 키노시타와 이노치의 목을 벨 것 같았다.
가신들은 무겁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물씬 풍겼다.
꿀꺽꿀꺽.
긴장감 때문인지 가신들 사이에서 나지막이 마른침 삼키는 낮은 소리가 몇 들렸다.
키노시타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려 맨땅바닥을 짚었다.
“주군. 할복을 명해주십시오.”
키노시타는 자신의 패전을 받아들이며 그로 말미암아 번과 번주 류켄에게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자결함으로서 용서받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노치가 섬기는 키노시타를 위해 말하고 나섰다.
“도노!”
번주 류켄과 가신들의 이목이 이노치를 향했다.
가신들은 이노치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혹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심중 꺼렸다.
이노치는 키노시타가 패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이유를 입에 올리며 선처를 호소했다.
“키노시타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미츠이는 저희보다 2배나 많은 병력으로 방어선을 공격했습니다. 각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저희는 어쩔 수 없이…… 미츠이는 그것을 알고 모든 병력을 집중,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척하며 기실은 좌우를 노려…… 도노. 키노시타님에게 미츠이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1천여 명의 가병이 있었다면 결코 미츠이 따위에게 키노시타님이 질 리가 없습니다. 도노. 부디 한 번의 기회를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한편.
키노시타는 우측 뒤에 부복한 이노치가 자신의 변호하는 것에 무척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이노치를 쳐다보았다. 얼굴과 시선에서 당황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노치!”
키노시타는 이노치를 크게 불렀다.
더는 입을 열지 마라.
그런 속내가 깃든 키노시타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이노치는 겁 없이 자신을 포함한 키노시타와 가병들의 패배를 합리화하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미츠이가 얄팍한 잔꾀로 방어선의 좌우를 치고 들어와, 저희의 후방을 맹공하지만 않았어도 저희는 패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노. 저희에게 가병이 200 아니 100만 더 있었더라도 미츠이의 잔꾀 따위는 얼마든지…….”
이노치는 섬기는 키노시타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에, 자신이 함부로 입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좌우에 있는 가신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다들 안색이 급격히 흐려지는 것이 매우 불안해했다.
‘저, 저.’
‘멍청이!’
‘어쩌자고 저리 함부로 입을,’
가신들은 은연중에 번주 류켄을 흘낏거렸다.
시야에 보이는 류켄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었다. 하지만 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뭐랄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 같다고나 할까?
가신들은 가슴에서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얼굴을 딱딱하게 경직했다.
‘이런.’
‘참고 계신다.’
번주 류켄의 분노가 폭발 직전임이 한 눈에 다 보였다.
가신들은 뭐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이노치를 돌아보았다.
‘어리석은.’
‘죽으려고 작정했느냐? 이노치.’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가신들은 이노치에게 지금 무슨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숨이 막힐 것 같은 번주 류켄의 무거운 침묵에 다들 조심스러웠다. 그에 입을 굳게 다물고 숨 죽였다.
다들 번주 류켄의 눈치만 보았다.
키노시타는 번주 류켄과 이노치를 번갈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노치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번주 류켄의 분노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급히 돌려 거듭 이노치를 힘주어 불렀다.
“이노치!”
이노치는 키노시타의 부름을 귓전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느새 스스로 자신이 내뱉는 말에 도취되어 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서고 말았다.
“철광과 은광이 우리 타이라노 번의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면 응당 번의 모든 가용 가능한 가병들을 모두 투입하여.”
이노치는 수다쟁이라도 되는 양 입을 나불거렸다.
스윽.
참다못해 번주 류켄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류켄에게서 음습하고 암울한 죽음의 향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꿀꺽.
가신들이 일어선 류켄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으음.”
일부는 낮으나 힘이 실린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다른 일부는 곧 눈에 보일, 머릿속에 떠오른 광경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번주 류켄을 부복한 키노시타와 이노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도노.”
키노시타는 황망해 하며 머리를 맨땅에 바짝 붙였다.
이노치는 섬기는 키노시타의 행동에 움칫거렸다가 곧바로 키노시타를 따라 머리를 땅에 박듯이 갖다 댔다.
스렁.
검집에서 검을 빼는 낮은 울림이 들렸다. 울림은 어딘가 모르게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이노치는 뒷머리가 쭈뼛거리며 몸의 솜털들이 빳빳하게 일직선으로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때.
“도노.”
“도노.”
조우에 무릎 꿇은 가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깊이 숙이며 류켄을 불렀다.
만류였다.
류켄은 양손으로 검을 쥐고 머리 높이 쳐들었다.
“패장은 유구무언이라 하였다. 어찌 패전한 자가 입을 놀려, 패전의 변명을 하느냐?”
그 말과 함께 류켄의 검이 부복한 키노시타의 목을 스쳤다.
나지막한 파공에 이어.
툭.
키노시타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어 맨땅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없는 몸이 뒤넘어가며, 베인 목에서 진홍의 선혈이 콸콸 뿜어졌다.
촤아아아.
맨땅에 쓰러진 키노시타의 몸은 물밖에 나온 잉어인 양 펄떡펄떡거렸다.
그 광경은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컥!”
귀에 들린 검이 공기를 가르는 파공에 살며시 고개를 들고 훔쳐보던 이노치는 눈에 들어온 키노시타의 최후에 소스라쳤다.
“컥.”
얼굴에서 일순간 핏기가 사라지고 백지장처럼 하얗게 급변했다.
몸이 자신도 모르게 후들후들 떨렸다.
‘뭐, 뭔가 잘못됐어.’
이노치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를 했는지, 자신의 말실수로 번주 류켄의 분노를 사, 죽지 않았을 키노시타가 일검에 척살 당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노치였다.
이노치의 소스라친 모습에서 몇몇 경구가 떠올랐다.
사람의 진가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다!
모든 화는 혀로부터 시작되고 혀로 끝난다!
입을 잘못 놀리는 자는 비명횡사한다!
등등.
번주 류켄은 죽인 키노시타의 피가 줄줄 흐르는 검을 맨땅으로 늘어뜨렸다.
또옥, 또옥.
검첨에서 작은 핏방울들이 지속적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으으으…… 도, 도노.”
이노치는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양손을 뒤돌렸다.
손바닥으로 맨땅을 짚으며 슬금슬금 뒤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는 행동에서 이노치가 잔뜩 겁먹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번주 류켄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뒤물러나는 이노치에게 다가가 이르며 발을 들었다.
꾸욱.
발로 이노치의 가슴을 밟았다. 그 바람에 이노치는 맨땅에 드러눕고 말았다.
“도, 도노.”
이노치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류켄을 올려다보았다.
몸을 가늘게 떠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죽음을 아는 눈치였다.
류켄은 마치 저승사자인 양 흉흉한 기운을 뿜으며, 짙은 살의를 감추지 않고 주변으로 방출했다.
류켄은 지극히 냉랭했다.
얼굴은 싸늘했으며 몸에서는 한풍이 불듯 매우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류켄은 발로 겁에 질린 이노치를 내려다보았다.
“잘도 패전의 변명을 지껄이더구나.”
“도, 도노.”
“가병이 적다? 그래 맞는 말이다. 우리 타이라노 번에 지금 남아 있는 가병이라고는 겨우 2천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싸움이 낳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누군 많은 가병들을 배치하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 싸움이 가병들 숫자로 하는 것이더냐?”
“도, 도노.”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 타이라노 번이 이렇게 된 것이다.”
류켄은 말과 함께 검을 들어, 단칼에 땅에 누운 이노치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걱.
이노치의 머리와 목이 분리되고 진홍의 선혈이 흘러나왔다.
선혈은 곧바로 주변 지면을 젖히며 붉게 물들였다.
가신들은 그런 류켄의 모습에 머리를 숙였다.
“…….”
다들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마치 타이라노 번의 최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신들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