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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그래. 날 나리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나리라고 부르고. 날 주군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주군으로 부르면 되잖아. 별 것도 아닌 걸로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지 말고 어서 각자의 의견이나 말해봐.”
난 수정된 전술에 대한 제장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이웅이 말하고 나섰다.
“나리. 오늘 오후쯤이면 하바카에 당도합니다. 그런데 지금 출정의 전술을 바꾸시면 진중에 혼란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어. 하지만 이 정도 일에 진중 혼란이 일어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난 내 부하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단련시키지 않았으니깐.”
난 가볍게 이웅의 말을 튕기며 제장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맞은편, 원탁 너머에 서 있는 혹두가 오른손을 머리 높이 들었다.
원탁에 서 있는 제장들이 죄다 무력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각 병대를 이끄는 이들이라, 알게 모르게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다.
혹두는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혹두를 보았다.
“뭐?”
물었다.
“나리. 다른 사람과 저를 대하시는 것이 어딘가 다른 것 같습니다. 네에.”
볼멘 목소리였다.
제장들이 혹두를 돌아보며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다들 혹두와 함께 다카요시가 이끌던 왜구와 맞서 싸운 전우들이다.
그런 까닭에 군략 회의에 혹두가 참석한 것에 불만은 없었다.
난 인상 썼다.
“그래 다르다.”
“나리!”
혹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어디서!”
성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라렸다.
“너와 다른 제장들이 같아! 다른 제장들은 휘하에 각 병대를 지휘하고 운용해. 하지만 너는 정보를 맡았잖아. 니가 가지고 오는 정보가 없으면 여기 있는 제장들이 움직일 수 없어. 아닌 말로 출항하기 전에 내가 수심에 관한 것을 알아왔기 때문에 출항이 가능했어. 만약 네가 수심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우린 출항 자체를 아마 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잠깐 말을 멈추고 원탁에 서 있는 제장들을 둘러보았다.
“니들 중에 혹두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놈이 없었으면 해. 혹두가 가져오는 정보가 니들이 운용하는 각 병대의 군졸들의 목숨을.”
최대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게 해 준다.
난 제장들에게 반말하며 정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반말함으로서 내가 제장들의 머리 위에 있음을 주지시키고, 혹두가 가져오는 정보가 휘하 군졸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준다.
그러니 혹두를 무시하지 마라.
혹두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아닌 말로 개 피 보는 것은 니들이다.
그런 취지로 말하자 제장들은 남다른 눈으로 혹두를 보았다.
혹두는 제장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무안해하며 슬쩍 날 쳐다보았다.
“나리.”
“왜에에?”
“꼼수 부리지 마십시오.”
일순간.
“풉.”
“킥.”
제장들이 웃음을 참는 나직한 외마디를 흘렸다.
“쓰으!”
난 안상 쓰며 제장들을 한 좌에서 우로 쓸어보며 눈을 치켜떴다.
움찔움찔.
제장들은 몸을 움츠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난 성난 눈초리로 혹두를 쏘아보았다.
“너어.”
혹두 녀석.
뭘 믿고 있는지, 불만스런 목소리로 툭 말을 던졌다.
“제가 뭘요. 괜히 제가 뭔 소리를 할 것 같으니깐. 일부러 슬쩍 띄워주시는 거. 제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잠시 잊고 말았다.
“…….”
지 혼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서 오해해 놓곤, 그게 모두 내 고등 술책(?)이라고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혹두다.
‘그래. 말을 말자. 말어.’
소귀에 아무리 경을 읽어봐라. 어디 소가 알아듣나.
신경질적으로 혹두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혹두는 내 말에 흠칫하더니, 조심스레 낮은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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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셈은 원탁에 서 있는 이들의 대화와 언동에 내심 적잖게 당황했다.
‘이게 무슨.’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군략 회의라 함은 최고 지휘관을 필부로 상급, 중급, 하급 무장들이 모여 전쟁을 논의하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오가는 말이 진중함, 엄격함, 묵직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중 건달들이나 잡배들이 주고받음직한 대화들이 오갔다.
‘도대체.’
태연히 제장들에게 니들이라는 반말로 말하는 이민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최고 지휘관은 언제나 근엄하게 휘하 장병들 머리 위에 군림하며 진두지휘하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군략 회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장난치는 듯한 가벼움이 물신 풍겼다.
수하무장들이 거리낌 없이 편하게 각자의 의중이나 의견을 밝혔다.
아니다 싶으면 최고 지휘관인 이민호에게 거침없이 대들 듯 목소리로 높였다.
다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다.
백아셈은 내심 세상 어디에 이런 군략 회의가 있나 싶었다.
“…….”
적응이 되지 않는, 군략 회의라고 보기 어려운 분위기에 백아셈은 입을 꾹 다물고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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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욕심이 많은 놈 아니라고 할까 봐!
혹두는 철광과 은광을 점령, 독차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다 얼만데. 포기합니까?”
아깝다는 속내를 거리낌 없이 밝히는 혹두의 말에 몇몇 제장이 호응했다.
“나리. 혹두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철광과 은광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이번 출정에서 저희가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전리품입니다. 하니.”
“철광과 은광은 우리가 차지하는 것이.”
다들 혹두와 생각이 같았다.
‘근데. 이것들이 언제부터 서로 형아우 했다고.’
의아했다.
내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사이에 몇몇 제장들이 혹두와 호형호제 하는 모양이다.
‘하긴.’
목숨을 걸고 함께 왜구라는 적과 맞서 싸운 일련의 경험과 기억이 혹두와 몇몇 제장들을 하나로 묶은 듯 보인다.
뭐 그리 나쁠 것은 없지만, 혹여 라도 상하 구분과 친분 때문에 군령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생길까봐 미리 단속해 놓으려했다.
“…… 만약 제 멋대로 군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있으면, 그 즉시 무조건 참형이야. 알겠나아아?”
일부러 길게 고함쳤다.
제장들은 몸을 움칫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예에에.”
“네.”
난 제장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아침 죄다 피죽 먹었어. 목소리가 왜 작아. 다들 잘 알겠나?”
내 말에 혹두와 제장들이 악을 써댔다.
“예에에에에에.”
“알겠습니다아아아.”
난 다시 제장들을 돌아보며 바뀐 전술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밝히라. 재차 명했다.
대부분의 제장들이 바뀐 전술에 회의적이었다.
아깝다!
우리가 가져야 한다!
제장들은 그런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난 백아셈을 돌아보았다.
“설득하던지, 이해시키던지.”
슬쩍 소리 없이 웃었다.
씩.
백아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멀거니 바라보았다.
“뭐 하나? 바뀐 전술은 자네 생각 아닌가? 그러니 제장들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라고.”
니가 말을 꺼냈으니 니가 알아서 죄다 다 해!
나는 그런 속내가 깃든 말을 백아셈에게 하며 내심 폭소했다.
‘하하하하하.’
엄밀히 말하면 내 일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고 명령권자가 제장들을 설득하거나 군령으로서 찍어 눌러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대처다.
그런데 나는 그 일반적인 대처에서 벗어난, 일종의 변칙을 구사했다.
관련 모든 것을 은근 슬쩍 백아셈에게 죄 넘겨버린 것이다.
‘크큭. 최고 지휘관이 좀 편해야지 말이야. 푸하하하.’
군이란 특수한 조직의 특성 중 하나가…… 최고 지휘관이 바쁘면 아래의 수하 지휘관들이 편하다. 반대로 수하 지휘관들이 바쁘면 최고 지휘관은 아주 널널하다.
그런 특성을 감안해 최대한 내 일감을 수하들에게 떠넘겼다.
수하 제장들의 일처리 능력을 알아볼 수 있고, 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좀 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있나? 이게 바로 일석이조지.
그 사이.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 백아셈은 원탁에 빙 둘러서 있는 제장들에게 병력이 매우 부족함을 언급했다.
“철광과 은광을 점유하면…… 방어 형태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얼마 전에 양광도에서 있었던.”
백아셈은 최충헌의 가병이었던 고려군과 다카요시가 이끌던 왜구들을 예로 들었다.
왜구에 비해 고려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