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60화 (160/247)

<-- 160 회: 6-18 -->

한편.

“셋째. 너는 항상 내가 말하면 끼어드는데.”

“큰 형님이야 말로 상공을 그만 괴롭히세요.”

“감히. 정실인 내게.”

이세연과 조연이 최송이와 서혜를 말렸다.

“큰 형님. 참으세요.”

“셋째 형님. 그만 하세요.”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송이와 서혜는 서로 말다툼하는 터라, 이세연과 조연은 두 여인을 말리느라, 미처 날 돌아보지 못했다.

난 돌아서며 발걸음을 죽였다.

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조심에 조심을 하며 방문으로 걸어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안다.

가만히 있다가는 최송이와 서혜의 다툼의 여파라 할 불똥이 네게 튄다.

그렇게 되면 모든 입씨름의 중심에 내가 있게 되고, 자연스레 네 여인이 한편이 되어 내가 무슨 때려 죽여야 하는 적이라도 되는 양 맹공(?)을 퍼붓는다.

정해진 코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미쳤지.’

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부일처제를 열렬히 옹호한다. 여자들의 입씨름과 다툼이 주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한 명 이상의 마누라는 재앙이야. 재앙. 망할.’

투덜댔다.

정실부인 한 명과 다수의 부인을 둔 최충헌이나 최우는 어떻게 마누라들을 관리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으면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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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초보다 굵은 왕초가 어둑어둑한 방안을 흐릿하게 밝혔다.

문방사우와 몇몇 서책이 놓여 있는 큼지막한 서탁에 앉은 서양헌은 손에 쥔 서신을 눈으로 빠르게 읽고 있었다.

잠시 뒤.

서양헌은 손에 쥔 서신을 좌측에 있는 초로 가져가 태웠다.

화륵.

삽시에 서신은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서양헌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돌아섰다.

서탁을 빠져나와, 서탁 왼편에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이윽고 창가에 이르러 밖을 향해 창을 훤히 열어젖혔다.

서양헌은 시야에 들어오는, 밤의 어둠에 잠식당한 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민호.

자신의 사위이자 아들 서풍의 강력한 라이벌이며 향후 고려 정국을 두고 생사를 다투어야 할지도 모르는 정적이다.

서양헌은 이민호를 그런 존재로 보았다.

딸 서혜를 주고 싶어 준 것이 아닌 관계로 썩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는 부자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위야 두 말할 필요가 있을까?

“흠.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 왜를 정벌한다?”

서양헌은 조금 전에 읽은 서신을 생각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왜의 정벌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왜구의 극성에 왜를 정벌하자는 말이 조야에서 몇 번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건국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왜 정벌은 언제나 미뤄졌다.

극심한 왜구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국가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

“겨우 3천 명의 군병으로.”

서양헌은 어렵다는 속내를 담은 목소리로 재자 중얼거렸다.

작은 이채를 띠었다.

왜 전체를 정벌하고자 한다면 못해도 10만의 정병이 필요하다.

또한 10만 정병이 먹고 자면 왜인들과 싸울 수 있는, 뒤받침이라고 할 수 있는 병참이 원활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에 들어가는 재물 역시 엄청나다. 고려의 국가 재정이 비틀거릴 정도다.

“한데 겨우 3천으로.”

서양헌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무슨 생각인지.”

이민호의 속내가 뭘까? 분면 노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바보는 아닐 테니깐 말이다.

씨익.

서양헌은 입가를 비틀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를 옆에 둔 것이 이리 용이할 줄이야.”

묵.

이민호의 옆에 묵을 붙여둔 것은 탁월한 혜안이었다. 일련의 모든 정보가 3일 단위로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온다.

서양헌은 시선을 뜰 저 멀리로 주었다.

어두운 밤하늘 야천夜天.

미래를 예고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안감 등.

몇몇 감정이 심중에서 일어나 회오리쳤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서양헌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조금 들뜬 얼굴빛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양광도를 손에 넣었다. 각 지방 호족들이 자신과 서가를 중심으로 뭉쳤다.

이민호와 공유하는 염전을 비롯한 노 등.

일련의 모든 것을 바탕으로 크게 군세를 일으켜 휘하에 5천에 이르는 가병군을 두었다.

“……음.”

서양헌은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최우.

자신의 사돈이자 이제 곧 고려의 집권자가 될 최충헌의 후계자.

“자식이라고는 딸 밖에 없어. 필연적으로 사돈의 뒤는 사위인 이민호와 풍이, 둘 중 한 사람이 이을 수밖에 없어.”

독백하던 서양헌은 움칫했다.

뒤늦게 딸 서혜가 생각난다. 마음에 걸려, 서양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들 풍의 장래를 망칠 수는 없다.

아들 풍이 최우의 후계자가 되어 고려의 집권자가 되면 여주 서가는 일약 우봉 최 씨 가문처럼 고려 최고의 귀족 가문이 될 수 있다.

왕가를 제치고 고려 제일의 가문으로 우뚝 발돋움하여 왕을 마음대로 옹립할 수 있으며 공주를 부인으로 둘 수도 있다.

장차 가문과 가문의 후손들이 누릴 부귀영화는 끝이 없을 것이다.

“기필코.”

서양헌은 강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양손을 허리뒤춤으로 돌려 맞잡았다.

꽈아악.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었던 열망이었다.

가문을 고려 최고 귀족 가문의 반열에 올려놓으리라.

증조부 뻘이 되는 서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고토 회복을 넘어, 북방을 고려의 영역으로 만든 다음, 중원으로 가리라.

빠득.

서양헌은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었다.

“소손녕. 네 이노옴.”

분하다는 감정이 그득 배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상 서희에게 모독을 준, 이미 죽어 흙이 되어 버린 거란의 무장 소손녕.

서양헌의 눈동자가 빛났다.

반짝.

저 멀리에 있는 밤하늘을 응시하며 흉중 야망이란 이름의 뜨거운 열망을 불태웠다.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

장처럼 오래 묵은 사람도 때와 장소 그리고 개인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다. 하여, 옛 사람들은 머리 검은 짐승에게 정주지 말라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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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항일이 되었다.

포구에는 무려 300여 척이 넘는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와 포구를 잇는, 평평한 판자가 놓인 곳에 다수의 군병이 몰렸다.

배의 난간과 거의 수평인 높이로 층층이 놓인 계단을 군병들이 하나둘씩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판자를 지나 배로 승선했다.

한편.

포구 좌측에서는 물자를 다수의 배에 싣느라 사람들이 매우 바빴다.

나식 영감이 나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잘 옮겨. 소홀히 다루다가는 내게 죽을 줄 알아.”

나이답지 않게 말이 거칠었다.

예전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여느 다른 노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데 이민호와 함께 하면 왜구들과 맞서 싸운 이후 사람이 변한 것처럼 성격이 확 달라졌다.

그 바람에 나식 영감 밑에 있는 가병들이 소곤소곤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뭔 영감이 저렇게 원기 왕성해.”

“아직 오줌발이 센 것 같은데. 큭큭.”

“이래저래 저 영감님. 참 말이 많아. 체.”

나식 영감과 함께 손발을 맞춰야 하는 오승록은 입맛을 다셨다.

“쩝.”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나식 영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모든 것을 다 챙겼다.

“나리는 그저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나식 영감이 오승록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민호가 따로 나식 영감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존중해주라 당부한 탓에 오승록은 나식 영감에게 뭐라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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