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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딪치자.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는 말도 있으니깐 말이야.’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걸음을 떼어, 내 거처를 등지고 선 연아와 행심에게 걸어갔다.
잠깐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연아와 행심에게 이르러,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연아와 행심에게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연아와 행심은 연하라, 여동생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순.
“흥!”
“체!”
연아와 행심이 각기 옆으로 돌아서며 콧김을 뿜었다. 찬 바람이 풀풀 날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으으. 이젠 최송이의 시비들까지 날 무시 하냐?’
속이 쓰리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으로 연아와 행심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못 되게 굴지만 제 주인인 최송이에게는 충성을 다 바치니.
쩝, 그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완죤 최송이의 충신이야. 충신. 쯧쯧.’
꺼림의 감정에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넌지시 연아에게 말을 붙였다.
“착한 연아야. 무슨 일이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나리. 아가씨가 아까,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연아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풉!’
난 연아의 모습에 외마디 고소를 흘렸다.
연아 옆에 서 있는 행심은 아예 나와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날 외면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난 넌지시 연아에게 말을 붙였다.
“조금 있다가 말이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방으로 들어오지 마라. 알겠지”
“네에에?”
연아는 길게 반문하며 무슨 말이냐?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으니깐. 절대 들어오지 마라.”
난 말하며 걸음을 떼었다. 빠른 걸음으로 연아와 행심을 지나쳤다.
곧장 최송이가 와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썩을!’
무슨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소의 심정이 십분 이해될 것 같다.
‘최송이.’
머리에 떠오른 그녀를 생각하며 내심 단단히 벼렷다. 잡아야 할 때에 잡지 못하면 평생을 두고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그저 여자는 초장에 확 잡아야 한다.
여자의 기가 살아나는 그 때부터 남자는 죽을 때까지 주고 줄 창 내리막길이다.
확실히 초장에 잡아놔야 여생이 편안해진다.
2 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원탁에 앉아 있던 최송이가 발딱 일어났다.
엄청 기다린 눈치다.
‘이크!’
난 긴장하며 최송이를 향해 걸어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호의적인 목소리로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제 귀에 재미있는 소문이 들려서요.”
최송이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날 보았다.
“소문?”
난 전혀 모르는 척했다.
최송이는 눈가를 흠칫거리더니 매서운 눈초리를 번득였다.
“저런 아무 것도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어떤 소문이기에 이리 절 찾아오신 겁니까? 더욱이 저도 없는데.”
슬쩍 내가 없는 방에 최송이가 홀로 앉아 있었던 것을 언급했다.
최송이는 태연했다.
매우 냉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소문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은연중에 최송이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풍겼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혈의 차가움이 말이다.
‘확실히 보통 여자가 아니야. 웬만한 사내 서넛은 그냥 한 방에 보내버릴 것 같으니. 이거야 원.’
여장부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최송이는 그 이상이다.
가히 여중호걸이었다.
난 일어선 최송이에게 다다랐다. 최대한 흔들림 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인 척했다.
“그런 소문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군요. 제가 처신을 바로하지 못해 큰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내 말을 최송이가 즉각 받아쳤다.
“저와 혼담이 오가시는 분이 어떻게 처신하셨기에 온 개경에 그런 추문이 도는지 모르겠네요.”
쌀쌀 맞아도 어느 정도지. 어휴. 진저머리가 날 정도로 최송이의 서슬이 시퍼랬다.
내가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기도 하고, 눈치 못 챈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 사이.
최송이가 뚫어져라 날 직시했다.
싱그레.
난 소리 없이 웃으며 최송이의 얼굴을 향해 내 얼굴을 내밀었다.
“무, 무슨.”
최송이는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다.
난 재빨리 왼손으로 물러나려는 최송이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와락.
거리낌 없이.
최송이를 내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어머.”
당황한 최송이가 놀란 낯빛을 띠었다.
손을 들어 내 얼굴을 후려칠 가능성이 있어, 오른손을 슬며시 들었다.
나와 최송이의 얼굴이 밀착되었다.
서로 내쉬는 숨이 각자의 얼굴에 닿을 지척이다. 최송이는 옅은 홍조를 띠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한 대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난 속으로 웃었다.
‘큭큭큭. 역쉬. 연애 한 번 못해본 티가 팍팍 나네.’
최송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요?”
“글쎄요. 저는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뭐, 뭐라고요.”
최송이는 화가 나는지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난 보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합하께서 나와 그 쪽의 혼사를 이미 결정하셨지 않습니까? 하면 우리 두 사람은 부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그래서 내게 무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최송이는 성난 목소리로 말하며, 내게 지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자신의 얼굴을 마주 내밀었다.
움찔.
난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이런.’
너무 가깝다.
나와 최송이의 코가 닿을락 말락했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는 사이 최송이의 허리를 두른 왼손을 놓고 말았다.
‘무슨 놈의 여자가 이렇게 대차?’
보통내기가 아니다.
정말.
‘콧대를 꺾어 놔야 해. 지금 기를 죽여서 내 말이면 껌뻑 죽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 여자야.’
당찬 것과 대가 센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말해 봐욧!”
최송이가 소리치며 내게 다가섰다.
“어, 어.”
난 당혹스러워 뒷걸음쳤다.
어느새 주도권이 최송이에게 넘어가 버렸다.
‘뭔 여자가?’
최송이는 내가 물러나는 만큼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날 어떻게 보았으면 그런 추문이 돌죠? 양가의 여인이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겨우 기녀인가요?”
최송이는 자신이 무척 화났음을,
화가 나지 않았으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날 기다리는 일 따윈 하지도 않았을 것임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자존심이 보통 센 것이 아니다. 속으로 효연과 자신을 비교한 모양이다.
최송이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돈에 팔려 사내들에게 몸과 웃음을 파는 기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추문을 온 개경에 흘리고 다니다니.”
“훗.”
난 물러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실소했다.
최송이는 내 행동에 움칫거리며 섰다.
“호오. 그 추문을 진짜라고 믿는다? 그 말씀이시니까요.”
“뭐, 뭐라고요.”
최송이는 당혹스러워했다.
난 양손을 허리 높이로 들어, 최송이의 눈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양쪽으로 젖혔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닌 말로 혼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 제가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그런 추문이 돌게 내버려두겠습니까? 추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뻔히 아는데 말입니다. 설사 조금 전에 말한 기녀와 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리 화내실 일은 아니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뭐라고요!”
최송이는 눈을 치켜떴다.
심중에서 몇 가지 감정이 일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