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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난, 좌우에 혹두와 묵을 거느리고 천천히 걸었다. 뒤에서 건달들이 졸래졸래 따라 걸었다.
“확실하지.”
내 물음에 혹두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제가 알아보니. 군부의 무장들도 막 드나들면서 스승님. 어르신 하는 그런 양반이더라고요. 행색은 보잘 것 없이 괴죄죄한데. 어딘가 모르게 아주 위험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가 몇 번 그 노인네 집을 드나들며 지켜봐서 아는데 그 노인네 보통 사람은 아닐 겁니다. 나리.”
난 눈살을 찌푸리며 혹두를 보았다.
“넌. 말투가 어딘가 모르게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말이야.”
“에이. 무슨 말씀을요. 저는 늘 나리께.”
안 봐도 뻔하다.
금화 때문일 것이다. 돈이라면 환장하는 혹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훗.”
나 실소하며 호기심의 눈빛을 띠었다.
혹두에서 검술의 고수를 한 번 찾아보라고, 군부의 무장들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알음알음 군부의 무관들도 훑어보라 당부해 두었었다.
검술도 배우고, 그것을 빌미로 군부에 인맥도 만들어 놓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깐.
시선과 자세를 바로 하며 걷는데.
“나리.”
혹두가 날 따라 걸으며 돌아보았다.
“왜?”
“헤헤헤.”
혹두가 웃으며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슬슬 손가락을 놀리는 폼이.
돈 주세요.
라고 무언으로 말하는 것 같아 기가 막힌다.
‘어련하겠니?’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우측에서 걷는 묵을 돌아보았다.
“묵아.”
“네, 나리.”
“철전 있지.”
“네.”
“하나만 혹두 줘.”
“네.”
묵이 대답하자마자 혹두가 걸음을 멈추고 껑충껑충 뒬 듯, 천부당만부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리. 철전이라니요. 적어도 금화 하나 정도는 주셔야 합니다.”
“웃기고 있네. 그런 일에 금화 하나? 너. 내 손에 한 번 죽어볼래! 이게 어디서 누구 등을 치려고 덤벼.”
혹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고함쳤다.
깨깨개갱.
몸을 움츠리며 내 눈치를 보는 혹두에게서 그런 환청이 들렸다.
난 걸음을 떼며 말을 이었다.
“잔돈푼 뜯어낼 생각하지 말고 남대가와 유시, 지전, 미전 등. 시전에 점포를 내서 장사를 할 생각을 해. 개경은 늘 물이 부족하니깐 물장사를 하는 것도 좋고. 불이 자주 일어나니, 불 끄는 것을 생계 수단으로 삼아도 괜찮아.”
기록에 보면 개경은 물이 태부족이라 곳곳에 우물을 팠다고 적혀 있다.
그런 이유로 산수가 좋은 곳에 너나없이 집을 지었다.
기와집의 경우 규모와 위치 등.
몇몇 조건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은 10근에서 은 50근 사이로 매매 가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난 혹두에게 앞으로 살 방책을 일러주며 묵에게 금화를 이용, 적절히 몇몇 점포를 사들이라 말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네.”
묵이 대답함과 동시에 혹두가 엄청 기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됐어. 마! 함께 목숨을 걸고 왜구와 싸운 정리가 있는데, 내가 너희를 모른 척 할 리가 있어.”
난 혹두에게 다소 화난 듯 쏘아붙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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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太廟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종묘라고 할 수 있다.
인근은 온통 푸른빛을 띤 녹음이 무성한 숲이었다.
주위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몇 있었는데. 그 중 정동방에 있는 한 야산을 끼고 옹기종기 몇몇 초옥이 모여 있었다.
초옥들 너머로 외따로 떨어진 한 초옥으로 혹두는 나와 묵을 안내했다.
초옥은 무척 오래되어 지붕이 누런빛을 띠었다.
담 역할을 하는 싸리나무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오래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무언으로 말했다.
휑한 싸리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초옥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은 부엌이었으며 방 하나가 부엌에 붙어 있었다.
방문 앞에는 자그마한 툇마루가 있어 살며시 운치를 더하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강 노인, 강 노인.”
혹두는 나와 묵에 앞서 초옥의 마당으로 들어서며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나는 싸리문을 지나 서너 걸음 내딛은 후 섰다.
묵은 졸래졸래 내 뒤를 따라와 우측에 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리. 어째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은데요.”
“흠.”
난 낮은 외마디로 대꾸를 대신하며 찬찬히 초옥을 살폈다.
한편.
혹두가 그새 방문을 열고 방안을 들여다 본 후 부엌으로 갔다.
머리를 쏙 내밀고 부엌을 일별하고는.
“강 노인. 강 노인. 이 노친네가 어디를 갔어. 젠장.”
그 때.
“그 놈 말 본세하고는 쯧쯧.”
내 뒤쪽에서 늙은 노인이 나직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섰다.
묵과 혹두와 나처럼 돌아서며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
묵은 덤덤한 얼굴로 내 뒤를 바라보았다.
“강 노인.”
혹두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가 바라보는 노인을 불렀다.
강무한.
노인은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난 왼손에 대나무 광주리를 든, 오른손에 쥔 대나무 낚싯대를 어께에 걸친 노인 강무한을 보았다.
허름한 마의麻衣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남들처럼 머리쓰개를 쓰지 않았다. 동아줄로 보이는 끈으로 질끈 머리를 묶어 상투를 튼 것이, 한 눈에 보기에도 가세가 빈궁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데.
‘으음.’
노인 강무한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심현한 것이 깊고 깊은 호수를 바라보는 것 같아, 한없이 내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예사 노인네가 아니군.’
난 눈을 반짝이며 기억에 남아 있는 강무한과 매우 유사한 기질氣質을 풍겼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노시인.
인간문화재로 불린 당대 제일의 서예가이자 한국화의 대가다.
그 분이 잔심부름과 작업을 도와줄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것을 얼핏 듣고는 급히 자원했었다.
페이도 셌지만 무엇보다도 그 분 곁에 있으면 자연스레 해당 방면의 인맥이 생길 것 같아, 사람이 재산이라는 생각에 반년 남짓 알바를 하며 쏠쏠한 재미(?)를 보았었다.
한 방면에 평생을 바쳐 정진한 대가大家!
이시인에게서 풍겼던 기질이 노인 강무한에게서 완연히 느껴졌다.
난 노인 강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혹두.”
“네, 나리.”
혹두가 걸어오다가 멈춰서며 날 쳐다보았다.
“수고했다.”
“헤헤. 뭘요.”
혹두는 오른손을 들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묵아.”
“네. 나리.”
묵이 날 돌아보았다.
“혹두에게 금화 하나 줘라. 값을 톡톡히 했다.”
“예에. 나리.”
묵은 공손히 대답했다.
난 노인 강무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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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한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인사하는 이민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속내가 깃든 외마디를 흘렸다.
“허.”
자신이 보기에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이민호다. 한데 혹두와 묵이 나리라고 불렀다.
척 봐도 어느 귀족 문벌 집안의 자식 같아, 이민호가 거들먹거리는 듯 보여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강무한은 이민호의 내력을 물었다.
너. 어느 집안 놈팡이야?
10 장
혹두는 재빨리 나서며, 입을 다문 나 대신 강무한에게 뭐라 말했다.
“강 노인. 이 분은 말이죠.”
“네게 안 물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거라.”
강무한은 언짢은 어조로 말하며 마뜩찮은 기색을 띠었다.
“놈!”
난 강무한의 말에 부지불식간 흠칫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귀에 강무한의 외마디가 들린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숙일 뻔했다.
‘어?’
내심 당황했다.
“고놈 참.”
강무한은 의외라는 기색을 띠며 걸음을 뗐다.
“주인도 없는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만 돌아들 가거라.”
“강 노인. 우린 나리에게 왜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요. 우리 나리가 어떤 분인지 아시오.”
혹두가 나섰다.
강무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걸음을 떼며 내 왼쪽으로 향했다.
나는 고갤 돌려,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강무한을 보았다.
“혹두.”
“네, 나리.”
혹두가 날 보았다.
“묵이를 데리고 돌아가라.”
“네?”
혹두는 어리둥절했다.
“나리.”
묵이 날 쳐다보았다.
“둘 다 돌아가도록 해.”
난 근엄한 목소리로 혹두와 묵에게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