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34화 (13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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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묵과 오용섭을 좌우에 거느리고 선의문을 지났다. 뒤로 가병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이루어 따라왔다.

오용섭이 걸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리. 장패문으로 왜 가시지 않고 선의문으로 오셨습니까? 다들 왜구를 물리친 우리를 성대하게 환영해 줄 텐데요.”

“귀찮아. 난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어.”

오용섭에게 가볍게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측에는 고만고만한 민가들이 운집해 있었다. 좌측에는 제법 큰 절이 보여 물었다.

“저건 무슨 절이야.”

오용섭이 내게 말하려는데, 묵이 잽싸게 말하고 나섰다.

“봉은사닙니다. 나리. 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조금 후에 수창궁과 연복사가 나옵니다. 수창궁과 연복사를 지나면 곧바로 황도 개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대로가 나오고 왼쪽으로 돌아서며 가장 번화한 남대가가 있습니다. 반대편인 우측으로 돌아가면 숭교사와 희빈문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나오고요.”

묵이 녀석 금화 하나를 받더니, 애가 아주 싹싹하게 돌변해버렸어.

언제 개경 지리를 통달했는지 술술 나왔다.

슬쩍 오용섭을 곁눈질하니, 입맛을 다시는 게 묵이에게 말할 기회를 뺏기는 것이 못내 서운한 모양이다.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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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가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각종 점포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오가는 이들은 밝고 활기에 찼다.

나와 가병들이 대열을 맞춰 걸어가자 상인들과 행인이 우릴 돌아보며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가병들은 걸으며 아쉬워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환대받고 싶었는데 말이야.”

“나도.”

“온 개경 사람이 우리를 환호해 줄줄 알았다고.”

“이거 맹숭맹숭해서 원.”

가병들은 중얼거리며 나를 따라 남대가를 지나갔다.

난 걸어가며 남대가를 유심히 관찰했다.

시야에 꽤나 다양한 물품을 파는 점포들이 들어왔다.

고려의 모든 특산물과 물품들이 개경의 남대가로 모여드는 것 같아, 호기심이 일었다.

조선의 육의전이 절로 떠올랐다.

‘흠, 경기가 괜찮은 것 같은데.’

오가는 행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다들 손에 무엇인가를 들었다.

‘황도만 풍요로운 것 같군.’

이번 왜구의 준동 때문에 이동하며 지방을 눈으로 살폈다. 피폐할 대로 피폐했다.

무엇보다도 양곡이 풍부하지 않은 것 같아, 많은 양민이 배를 곯는 듯 보였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행인들은 그다지 삶에 아쉬운 것이 없는 눈치다.

주위를 둘러보며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영화 세트장에 와 있는 기분이야.’

12세기 고려에 적응이 그리 쉽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으로 부쩍 내가 살던 현대가 그리웠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최충헌의 대 장원에 이르렀다.

“자아, 여기서 헤어지자.”

내가 가병들을 쳐다보며 말하자 오용섭을 비롯한 가병들은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노고가 크셨습니다. 나리.”

온 세상이 다 울리도록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 때문에 장원 대문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오가던 이들이 다들 돌아보며 깜짝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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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으로 이어지는 솟을 대문.

낭장과 별장들이 서서 엄중히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중랑장中郞將 이상평에게 다가가 면전에 섰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 중랑장님.”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받고 합하께서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그렇습니까?”

대답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놀려 왼쪽 옆구리에 찬 소검을 끄러 이상평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상평은 말없이 고갤 끄덕이며 좌측을 돌아보았다.

눈치를 읽은 한 낭장이 뛰어와 서며 소검을 받아 챙겼다.

최충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 무기를 소지하고 교정도감에 들 수 없다.

난 이상평의 안내를 받으며 교정도감으로 향했다.

별장들이 이상평과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무언의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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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 내로 들며 곧바로 단상에 앉아 있는 최충헌에게 걸어갔다.

단상 아래, 중간 어림에 이규보와 김덕명이 서 있었다.

난 단상에 이르러 서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돌아왔습니다. 합하.”

최충헌은 날 내려다보며 살며시 웃었다.

“어서 오게. 자네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내 다 듣고 있었네. 그에 합당한 상을 곧 내릴 것인즉.”

“아닙니다. 합하.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말인가?”

최충헌은 흠칫거리며 내게 반문했다.

“네.”

난 망설이 없이 대답하며 이규보와 김덕명을 보았다.

주위를 물려 달라.

대번 김덕명이 날 째려보더니 돌아서며 최충헌을 올려다보았다.

“합하, 참으로 무례한 자가 아닙니까?”

이규보는 잽싼 몸놀림으로 최충헌을 향해 돌아섰다.

“합하. 중요한 얘기인 듯 하니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김덕명은 방해하는, 맞은편에 서 있는 이규보를 노려보았다.

“이 공.”

이규보는 태연했다.

“김 공. 우린 그만 나가십시다.”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김덕명은 우락부락한 표정을 지었다.

이규보에게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잠시.”

최충헌이 입을 떼었다.

“합하.”

김덕명은 급히 최충헌을 쳐다보았다.

“어허.”

최충헌은 김덕명을 내려다보며 다소 목청을 높였다.

김덕명은 움칫거리며 난감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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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 내에 나와 최충헌 단 둘만이 남았다.

난 최충헌에게 이번에 상대했던 왜구들에 대해, 지방의 피폐함을 언급하며, 사로잡은 왜구들과 전리품에 관해 설명했다.

“왜구들을 상대하느라, 다수의 물자를 사들이기 위해서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합하께서 내주신 백금 3천 냥으로는 도저히 필요한 물자를 사기에 너무 빠듯해.”

최충헌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됐네. 자네가 이번에 만들어낸 묘한 무기와 대형에 관해 들은 바가 적잖네, 특히 수레와 말을 대거 사들여 이동을 매우 빠르게…… 사상자와 중, 경상자를 최소화 하는데, 많은 물자가 쓰였음을 이미 들어 알고 있네. 그러니 마음 쓰지 말게.”

최충헌은 집권자로서 대범함을 보였다.

‘역시.’

한 시대를 좌지우지하는 자답게 여느 사람과 배포가 많이 다르다.

“하옵고, 이번에 최 부사 어른과.”

최우를 거론했다.

최충헌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내 말이 끝나자.

“우가 적에서 모질지 못한 면이 있음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네. 그 아이는 자신의 사람에게는 유독 관대하지.”

장자 최우의 성향과 성격을 훤히 아는 최충헌이었다.

“합하. 왜구들은 그들의 몸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저는 그리 생각하옵니다.”

“나 또한 자네와 같은 생각일세. 그렇게 모질게 대해야 섣불리 우리 고려로 쳐들어오지 못할 게야.”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당한만큼 갚아주자.

몽골에 대비해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럼 엄청난 재물이 들어간다.

현재 고려에서 그 재물을 충당하려면 문벌 귀족들과 지방 호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무자비하게 거둬들여야 한다.

그럴 경우 조당 안팎에서 큰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양민들에게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하책 중의 하책으로, 양민들은 현재 그럴 여력이 없다.

그러니 왜에서 우리 고려가 필요로 하는 재물을 구하자.

“합하. 손자가 말하기를 ‘因糧於敵, 故軍食可足也’ 이라 하였사옵니다. 적에게서 군량을 빼앗아, 아군을 풍족히 먹이는 것은 병략의 기본이라 생각하옵니다. 故智將務食於敵. 食敵一鐘, 當吾二十鐘, 芑稈一石, 當吾二十石 이라는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최충헌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병서를 잘 아는가 보군.”

“조금 읽었사옵니다.”

“하하하하.”

최충헌은 호방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적의 군량미를 가져와 아군을 먹임은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 아군의 힘을 키우는 것과 같음이지. 껄껄껄.”

태생이 무관이다.

그 점에 있어 나와  어느 정도 생각이 통한다.

최충헌은 날 쳐다보며 읊었다.

“得車十乘已上, 賞其先得者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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