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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경고했다. 이 경고를 어기는 날에는.”
눈을 반뜩이며 매서운 안광을 내뿜었다.
츠파아앗.
장헌영은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알겠소. 내 어찌 합하의 경고를 무시하겠소.”
난 속으로 흠칫했다.
‘어라?’
아무래도 내가 말한 최충헌의 자를 아는 눈치다.
“너!”
“거, 걱정하지 마시오. 입은 꾹 다물고 있을 테니.”
장헌영은 몸을 떨었다.
‘이럴 수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다. 이자개가 최충헌의 돈줄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건드린 것은 경고의 의미로, 다른 상인들에게 보여줄 본보기로 이자개를 처리하라. 최향이 넌지시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충헌이 야밤이 이리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경고를 보낼 줄이야.
‘틀림없이!’
장헌영은 아들 최향 때문에 최충헌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그저 경고만 한다. 그리 여겼다.
오인이 그에 미치자 눈앞이 아득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최향은 최충헌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했다.
고려는 여전히 최충헌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으면, 지금이라도 최충헌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은 물론 모든 식솔들과 가세가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장헌영은 황망함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절대 앞으로 이자개를 건드리지 않으리라. 이리 야심한 시각에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으니. 저기. 저 문갑 위에 있는 궤를 보면.”
장헌영이 침상 우측에 있는 문갑을 눈짓을 가리켰다.
‘허!’
어이가 없다.
장헌영이 아무래도 날 최충헌이 은밀히 보낸 사람으로 착각하고 뇌물을 주려는 모양이다.
‘기왕 나선 김에. 킥킥킥.’
가뜩이나 돈이 궁한 처지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씩 웃었다. 그 바람에 머리에 쓴 복면 아래가 살며시 찌그러졌다.
“인사할 줄도 알고, 제법이야.”
말하며 장헌영의 목을 움켜쥔 오른손을 풀었다. 한 걸음 물러나며 문갑을 향해 돌아섰다.
“어설픈 장난은 안 치는 게 좋아. 여차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도둑이나 강도로 위장해서 널.”
힐긋 장헌영을 돌아보며 살기 띤 눈초리를 번쩍였다.
죽일 수도 있다!
그런 의중을 내비쳤다.
장헌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황황히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내 그리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
“풉.”
고소를 머금으며 문갑에 이르러 장헌영이 말한 궤를 챙겼다.
길이 두 뼘, 폭 한 뼘 어림의 궤는 제법 묵직했다.
난 속에 돈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우측으로 돌아섰다.
“고맙군. 가능한 서로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 알겠소.”
장헌영은 아직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눈치다.
하긴.
달게 푹 자다가 난데없이 당한 재앙(?)이니, 게다가 최충헌의 자까지 복면을 한 내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경황이 없기도 하겠지.
난 속으로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조금 전에 들어온 방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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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고 있는 여각으로 돌아왔을 때 거처에 세 사람이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
빙문을 등진 오용섭, 묵, 혹두는 우측 옆구리에 궤를 든 날 보더니 반색했다.
“나리.”
이구동성으로 날 부르는 세 인간(?)에게 툭 말을 던졌다.
“조용히 해. 니들이 그렇게 안 불러도 죄다 내가 나리라는 건 다 알아.”
말하며 세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방문으로 다가가 여는 사이 혹두가 내게 다가와 붙으며 은근 슬쩍 궤를 흘낏거렸다.
“나리. 혹시 장헌영을 거시기 하시고 챙겨 오신 겁니까?”
이 자식이.
내가 무슨 살인 강도범인 줄 아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혹두를 째려보았다.
“너처럼 입 싼 놈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찬 바람이 휭휭 부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용섭과 묵이 날 기다리고 있다면 필히 혹두 저 자식이 입을 나불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장헌영을 찾아간 것을 아는 사람은 혹두 밖에 없으니깐 말이다.
“나리.”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묵과 오용섭이 날 뒤따라오며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며 우측에 있는 원탁으로 가 궤를 내려놓았다. 손을 놀려 재빨리 궤를 열었다.
그 사이.
묵, 오용섭, 혹두가 원탁으로 모여더니 빙 둘러섰다. 세 사람의 이목이 내가 여는 궤에 집중되었다.
딸깍.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궤가 열렸다.
“허어억.”
난 눈동자를 강하게 파고드는 금빛에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시야에 휘황찬란한 금빛을 두른 금화가 가득 들어왔다.
내가 알기로는 금과 남송은 동전을 주조하여 민간에 널리 유통시켰다.
대개 실제 화폐 가치보다 들어간 돈이 더 많았다.
일테면 1문짜리 동전을 만드는데 3문의 돈이 들어가, 돈의 실제 가치가 높았다.
그 외에 교자와 회자라는 지폐가 사용되기도 했다.
고려보다 화폐 유통이 매우 발달했는데. 연이은 금과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여 결국 멸망에 이르는 한 이유가 되었다.
“나, 나리.”
“이게 다 금화 아닙니까?”
“여, 역시 벽란도의 상인입니다. 이자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자라더니만. 송나라 금화까지.”
오용섭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그저 대경하기만 했다.
묵은 말이 떨어지지 않아, 생전 보도 못한 남송의 금화에 넋을 놓았다.
혹두는 좋아 죽으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궤에 담겨 있는 금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혹두다운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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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난 침을 삼키며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 대단하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금화들이 어떤, 얼마만한 가치를 가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날 것 같다.
난 충격에 말을 잊었다.
‘하여튼 지간에 뇌물 먹이는 놈들은 알아줘야 해.’
자고로 뇌물이란 받는 인간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넉넉해야 만사가 잘 풀리는 법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뇌물을 먹이는 인간치곤 씀씀이가 크지 않은 작자가 없다.
아무래도 최충헌을 입에 올리는 거짓말이 내게 뜻하지 않은 횡재를 안겨준 것 같다.
‘큭큭큭.’
난 좋아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 때.
슥.
기쁨을 만끽하는 내 눈에 초를 치듯 흑두의 손이 들어왔다. 재빨리 오른손을 들어 세게 흑두의 손등을 때렸다.
찰싹.
혹두는 손을 빼면 비명을 질렀다.
“악!”
다른 손으로 손등을 급히 문지르며 날 보았다.
“나, 나리.”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성난 눈빛을 띠었다.
“어디서!”
혹두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리. 제가 정보를, 나리께서 구해오라고 하신 것들도 잽싸게 구해다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너. 입이 싸잖아.”
“나리.”
“쓰으.”
낮은 소리를 흘리며 눈을 부라렸다. 일부러 화난 척했다.
혹두는 흠칫하더니 내 눈치를 보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계집애처럼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난 혹두를 못 본 체하며 오용섭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섭.”
“네, 나리.”
“손 내밀어봐.”
“예에에.”
오용섭이 좋아라.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한데.
난 오용섭이 내민 손과 오용섭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묵이 나와 오용섭을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난 허탈했다.
오용섭은 그리 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혹두 못지않게 돈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좋아 죽으려는 얼굴로, 솥뚜껑 같이 큼지막한 양손을 꼬옥 붙여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얼핏 보기에 앙증맞아, 내심 기막혔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