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25화 (125/247)

<-- 125 회: 5-13 -->

한편.

최송이는 작은 눈빛을 반짝이며 마음속으로 잔미소를 머금었다.

‘훗. 그 사람이 나와.’

괜찮을 듯 싶다.

이번 왜구들의 준동을 진압하며 보인 발군의 능력이라면 자신과 함께 나란히 앉아도 부족함은 없을 듯 하다.

조부의 권력을 승계하는 부친에게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상당히 끌렸다.

아무리 고려가 여성의 활동을 높이 쳐준다고는 해도 정치 활동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라면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는 여느 사람의 피와 다르다는 것을 옛적부터 깨달았다.

선천적으로 권력을 향할 수밖에 없는, 무신 중의 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부의 피를 이어받았다.

생그레.

최송이는 소리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작은 이채를 띠었다.

반짝.

지금 이 순간 역사의 흐름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시금 틀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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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온갖 인종이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국제 무역 도시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내일 아침 일찍 개경으로 출발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은 너희들 마음껏 먹고 즐겨라.”

나는 호기롭게 이끄는 1천여 명의 가병과 뒷골목 건달들에게 그렇게 외쳤다.

묵이 잠시 후에 내게와 그랬다.

“나리. 지금 돈이 얼마 없습니다.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난 엄청 큰일이 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묵의 모습에 오른손을 들어 묵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마!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는 가병들처럼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셔. 어때. 이 나리가 여자 붙여줄까?”

“나, 나리…… 딸꾹딸꾹.”

묵은 엄청 놀라더니 돌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으하하하하하.”

따로 오용섭과 혹두를 불러 가병과 건달의 단속을 주지시켰다.

“향여라도 불미스러운 일이나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해. 푹 마음 놓고 즐기는데. 내 흥을 깨는 짓을 하는 놈은 가병이고 건달이고 죄다 그냥.”

일부러 겁을 주기위해 오른손 검지를 들어 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스으읏.

오용섭과 혹두는 기겁했다.

“예에에에. 알겠습니다.”

“암요, 감히 나리의 흥을 깨다니요. 그런 짓을 할 놈은 제 밑에는 없습니다. 그렇고 말 굽쇼.”

오용섭과 혹두는 날 쳐다보며 쩔쩔맸다.

‘됐어.’

난 오용섭과 혹두를 돌려보냈다.

묵을 통해 하룻밤 저녁 동안 세낸 몇몇 주루로 향했다. 총 1,400여 명이라 함께 할 수 있는 주루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몇 백여 명씩 나누었다.

그 바람에 내 주머니가 텅텅 비고 말았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내 주변에서 가병과 건달들이 우르르 동시에 움직였다.

“큭큭.”

난 웃으며 좌우를 스쳐 지나가는 가병과 건달들을 돌아보았다.

뭐랄까?

배 고픈 자식을 먹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참 묘한 기분이 든다.

그 사이.

대로를 오가는 이들이 우릴 돌아보며 진한 경계의 눈빛을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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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흐르러지게 핀 화원을 굽어보는 정자.

최충헌은 찻잔을 앞에 두고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연방 눈빛이 쉼 없이 반짝였다. 일신一身에서 깊고 그윽한 기운이 감돌았다.

“으음.”

최충헌의 입술을 비집고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고심이란 감정이 얼굴에서 배어나왔다. 근심 어린 기색이라, 쉬이 말을 붙이기 어려울 듯 싶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거기 서시오.”

호위하는 무장들의 수좌 호위장 이곽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충헌은 고개를 우로 돌렸다.

“훗.”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곽이 서책이 놓인 자그마한 비단 포단을 든 이규보를 가로막은 모습이 보였다.

최충헌은 고갤 바로 하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찻물을 머금고 혀로 맛을 음미하는 사이, 앉아 있는 정자로 이규보가 올라왔다.

자신이 앉은 원탁 맞은편으로 이규보가 다가와 섰다. 이규보는 손에 든 포단을 슬며시 원탁에 내려놓았다.

자신에게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합하.”

이규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최충헌은 이규보를 응시했다.

“살펴보았는가? 삼흑호.”

“예에. 합하.”

이규보는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머리를 숙였다.

“허면?”

최충헌은 이규보의 생각을 물었다.

이규보는 머리를 들어 최충헌을 보며 매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합하. 후대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예로부터 강대한 힘이 중원을 통일하면, 중원에서 강대한 힘이 일어나면, 반드시라고해도 좋을 만큼 주변 각 국으로 그 힘을 뻗쳤습니다. 중원에서 강대한 힘이 나타나는 것 자체가 저희에게는 크나큰 위협입니다. 합하.”

이규보는 눈을 반짝이며 다급하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최충헌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말없이 차를 마시기만 했다.

허나, 눈동자는 달랐다. 알아채기 어려운 미광微光이 찰나 나타났다 사라졌다.

최충헌은 이규보의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하나의 판도를 그렸다.

“합하. 현재 중원은 혼란 그 자체이옵니다. 남송은 이미 나라로서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운이 크게 기울었나이다. 금 또한 남송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입니다. 여태까지 천하게 여기며 핍박하던 몽고가 금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합하.”

이규보는 화급한 목소리로 말하며 포단의 서책을 보았다.

최충헌이 자신에게 중원에 관한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올리라 명하였다.

작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현 중원의 세세한 동향과 사정을 알게 되었다.

최충헌이 오래 동안 곁을 지켰던 김덕명에게 명하지 않고 자신에게 명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일 것이다.

이규보는 이미 전에 이민호에게서 들은 바가 있어 장래, 몇 년 되지 않아 고려가 망국의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입에 올렸다.

“합하. 이대로라면 몽고가 중원을 통일할 것이옵니다. 그들은 새외 오랑캐이니 그 오만방자함과 힘이 능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북적北狄들은 강성해지면 늘 타민족의 피를 탐해왔지 않습니까? 합하.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이 나라 고려의 사직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사옵니다.”

이규보는 간곡히, 피를 토하는 듯한 리얼하기 짝이 없는 열연을 펼쳤다.

예부터 중국은 북방 유목 민족을 일러 북적이라 불렀다. 이 말에는 흉노, 선비, 유연, 돌궐, 거란, 위구르, 몽골 등.

다수의 북방 유목 민족이 포함된다.

최충헌은 대과에 급제하고 시인으로서 그 명망을 널린 알린, 여느 사람보다 문재와 시재가 특출한 이규보의 말에 가슴이 서늘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이야.’

혹여 자신이 늙어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과연 이민호가 말한 것이 맞을까?

꽤 여러 방면으로 확인했다.

그 결과 이민호의 말이 차츰 실체를 가지며 자신에게 감당하기 벅찬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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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가 돌아가고 정자에는 홀로 최충헌만이 남았다.

이곽이 거느린 호위 무장들이 정자를 에워싸고 엄히 지켰다.

최충헌은 원탁에 앉아 머리를 비스듬히 숙이고 심중 깊이 한탄했다.

‘어리석었음이야. 정작 적은 나라 밖에 있거늘. 어이해 나라 안에서 적도 아닌 잔챙이들과 그리 권력을 다투었을꼬. 일찍이 이의민을 죽일 때 가슴에 품었던 대망을 어이해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어더란 말인가?’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고픈 심정이다.

이의민이 고려의 집권자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전황을 일삼으며 국정을 제 맘대로 농단하고 일신의 사욕을 채워 고려가 혼돈에 빠진 것을 보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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