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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충주목에서 며칠을 보내고 황도 개경으로 향했다.
다행히 왜구를 섬멸한 후라 충주목까지 이어지는 여강을 다수의 장사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개경 지척에 있는 벽란도로 향했다.
상선들의 주인은 왜구를 섬멸한 우리들에게 깊은 호감을 가졌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냈다.
그 덕분에 이동이 수월하고 빨랐다.
여강을 거쳐 한수로 접어드는 일련의 일정은 평온하고 무탈했다.
벽란도에 닿은 후, 오용섭에게 가병들을 맡기고 개경으로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한 다음 묵을 데라고 벽란도 곳곳을 돌아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벽란도는 국제 무역도시였다.
‘대단해. 12세기에 이런 도시가 있다니.’
척보다도 아랍인인 이들이 다수 거리를 오갔다.
우측에서 나란히 걷는 묵이 날 쳐다보았다.
“나리. 대단하죠.”
“그렇구나. 그나저나 네가 말한 그 자의 집은 아직이냐?”
“아, 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묵은 말끝을 흐리며 궁금하다는 의중을 얼굴에 띄웠다.
“왜?”
나는 거리를 구경하며 묵에게 대꾸했다.
“그 분을 왜 만나려고 하십니까?”
“아, 그거.”
“네.”
“이곳 벽란도에서 제일 부자라고 하니깐 돈 좀 빌리려고.”
“예에에에.”
날 쳐다보던 묵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걸음을 멈추고 묵을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놀래?”
“나, 나리.”
묵은 말을 더듬었다.
“이, 이자개 어른을 아십니까?”
“아니.”
내 대꾸에 묵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데 지금 찾아가는 겁니까?”
“응.”
“나리이이!”
묵은 목청을 돋웠다.
난 묵을 쳐다보며 살며시 웃었다.
씨이익.
모름지기 큰 부는 권력과 통한다.
벽란도 제일의 부자이자고려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대상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최충헌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아울러 최충헌의 동정에 귀추를 모르고 평소 관련 정보를 꾸준히 모았을 것이다.
권력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깐.
그래야 큰 재물을 모을 수 있고 도한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부딪쳐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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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솟을대문을 수많은 이들이 오갔다.
문은 매우 컸다.
두 대의 수레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짐이 산더미처럼 실린 수레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등에 짐을 맨 짐꾼들이 길게 줄을 서서 들어가는 차례를 기다렸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일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흔 후반의 집사 달구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에에에.”
“허, 험. 어서 안에 기별을 해 주시오.”
난 태연히 말하며 헛기침했다.
묵은 나와 달구지 사이에 서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달구지는 말없이 날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상국 합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까?”
미심쩍다는 목소리였다.
“사람 거. 의심도 많소. 하면 내 이 길로 돌아가리까? 가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상국 합하께 그리 말씀드려도 되겠소.”
“아,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달구지는 말하며 황급히 뒤돌아서더니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묵이 넌지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리. 그리 거짓말을 하시면 어쩝니까?”
“괜찮아. 넌. 모른 척 해.”
“그래도요.”
“쓰.”
내가 인상 쓰자 묵은 머리를 숙이며 날 힐끔거렸다.
“네.”
걱정스런 기색을 띠는 것이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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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초반으로 보이는 이자개는 허무맹랑하다는 얼굴로 원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민호를 보았다.
…….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날 아실 것이오. 상국 어른의 가병을 이끌고 청주목과 충주목을…… 이리 어른을 뵙고자 거짓말을 하였으니 탓하지는 말아주시오.”
아주 대놓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최충헌을 언급했다고 실토(?)했다.
기가 찼다.
맞은편에 앉은 이민호를 모를 수가 없다.
어느 날 돌연 나타나 최충헌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가병 1천을 지휘해 이번 왜구 준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상인은 항시 세상과 권력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목을 둬야 하는 터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허나, 이런 식으로 대놓고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훗…… 으하하하하하하핫!”
이자개는 고개를 들더니 파안대소했다.
마음에 든다.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이자개는 잠시 마음껏 웃은 후 날 보았다.
“참으로 담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려.”
“죄송합니다. 생면부지이다 보니 이리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난 머리를 숙였다.
돈이 필요하다.
그 돈을 가진 자가 왕이나 마찬가지인 처지라, 이자개를 공손하게 대했다.
‘허!’
이자개는 자신에게 공손히 말하며 머리를 숙인 이민호의 모습에 적잖은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이 알기로는 지방 호족 가문의 사람이다. 게다가 최충헌의 가병 1천여 명을 지위하는 위치에 있는 자다.
군부로 따지면 1개 영領을 통솔하는 정 4품의 무관이라고 볼 수 있다.
상당한 직위다.
‘으음.’
이자개는 마음속으로 침음을 흘리며 맞은편에서 머리를 드는 이민호를 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셨소이까?”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문에 앉은 좌중이 다소 경직되었다.
나는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품속에서 한 서책을 꺼냈다.
충주목에 있을 때 적어둔 것이다. 탁자에 서책을 내려놓고 앉은 이자개에게 밀었다.
“읽어봐 주시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읽어보면 안다?”
“네.”
내 말에 이자개는 나와 서책을 번갈아보았다.
진한 의구심이 깃든 눈이었다. 아울러 은연중에 경계심이 엿보인다.
난 가만히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찻잔을 집었다.
입으로 가져가 살며시 입김을 불며 식혔다. 한 모금 차를 마시고 맛을 음미하는 사이 이자개가 서책을 펼치며 빠르게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흠칫.
이자개는 놀란 낯빛을 띠더니 맛을 음미하는 날 힐긋거렸다.
눈을 치뜬 것이 상당히 뜻밖인 모양이다.
난 반개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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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시간이 흘렀다.
탁.
이자개가 서책을 덮고 잔을 내려놓는 날 보았다. 격동이라는 감정이 이자개의 얼굴에서 물결쳤다.
“참으로 대단하시오이다.”
난 빙긋 웃었다.
이자개는 마음을 진정시키는지 두어 번 심호흡했다. 그런 다음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라면?”
이자개의 시선이 서책으로 향했다.
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 휘하에 있는 가병들을.”
난 이별을 위한 위로금이라고 할 수 있는 전별금을 언급하며 향후의 일을 도모함에 있는 준비 자금이 필요함을 입에 올렸다.
이자개는 말없이 날 보며 이채를 반짝였다.
“공께 돈을 대어드리는 대가로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 대하는 이자개의 어투가 바뀌었다. 물음에서 진하게 심각함이 묻어났다.
난 살며시 웃으며 툭 말을 던졌다.
“고려 상계. 그리고 나아가 중원 상계까지.”
이자개는 내 말에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으음.”
난 이자개를 마주보며 넌지시 말을 흘렸다.
“귀하에게 손해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눈짓으로 서책을 가리켰다.
이자개는 내 시선을 쫓아 서책을 보았다. 눈동자에서 욕심이란 감정이 샘솟았다.
난 이자개를 쳐다보며 명쾌한 목소리로 결정을 촉구했다.
“나와 함께 이 고려를 도모해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