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21화 (121/247)

<-- 121 회: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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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깜짝 놀라며 달려오는 이토를 돌아보았다.

혹두와 건달들은 나와 별다르지 않았다.

다들 뜻밖의 상황에 놀라 멈칫거리며 달려오는 이토를 쳐다보았다.

죄다 우두커니 서서 이토를 보기만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순간 반응이 현저히 떨어졌다.

난 눈을 반짝이며 이토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다카요시가 하급 무장들에 이끌려 뒤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토를 향해 마주 나가며 왼쪽 옆구리에 찬 소검小劍을 빼들었다.

“달아나지 못하게해에에에!”

길게 외쳤다.

이토가 그 사이 거리를 빠르게 줄이며 성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내딛는 오른발로 지면을 강하게 밟더니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야아아아.”

이토는 양발을 걷어차듯이 허우적거리며 오른손에 쥔 검을 머리 높이 쳐들었다.

검에 혼신의 힘을 담아 단숨에 내 머리를 내리칠 심산이었다.

“어딜.”

난 게처럼 왼발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상체를 서북향으로 틀었다.

동시에, 손에 쥔 세검을 오른 팔뚝으로 뒤젖혔다.

그새 이토가 허공에서 일직선으로 내 코앞으로 떨어졌다. 단숨에 세검으로 이토의 가슴을 갈랐다.

검첨劍尖이 이토의 갑주와 그 밑에 있는 옷과 살을 베었다.

검공劍攻은 깊지 않았다. 검에 실린 태반의 힘이 이토의 갑주와 옷을 베는데 소진되었다.

전장에 서는 무장들이 갑주를 몸에 걸치는 이유가 확실히 드러나는 공방이었다.

검날이 미세하게 이토의 살을 스쳤다.

세검을 쥔 손아귀로 이토의 살을 베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하지 않았다!’

머리에 그 상념이 떠오르자마자, 지면을 밟는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다.

몸을 왼쪽으로 크게 뒤젖혔다.

휘이이이.

왼발이 크게 호선을 그리며 이토의 가슴으로 향했다.

쿠앙.

둔중한 울림과 함께 이토가 뒤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아악.”

이토는 삽시간에 예닐곱 걸음의 거리를 지나쳤다.

가슴을 보호하는 흉골이 부러졌다. 움푹 꺼진 듯한, 내 왼발자국의 흔적이 뚜렷하게 가슴에 남았다.

이토는 맨땅으로 쓰러져 떼구루루 굴렀다.

난 자세를 바로 하며 소리쳤다.

“잡아!”

혹두가 내 말을 들은 듯 고함쳤다.

“뭐들 해? 당장 저 놈을 포박하지 않고.”

“네.”

“예, 형님.”

주위에 서 있던 건달들이 땅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이토를 향해 뛰었다.

난 달아난 다카요시와 5명의 하급 무장을 응시했다.

“빌어먹을!”

쫓기에는 너무 거리가 벌어졌다.

살기위해 죽자고 뛰는 다카요시와 하급 무장들이라, 사력을 다하는 모양이다.

“늦었어.”

중얼거리며 난 매우 아쉬운 낯빛을 띠었다.

잡을 수 있었는데 잡지 못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다카요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자칫 놓칠 경우 다시 왜구들을 모아 고려로 올지도 모르는데.

“잡아 죽여야 해.”

내가 서둘러 움직이려 하는데.

“크아악.”

“꺼억.”

다카요시를 호위하고 달리는 하급 무장 중 3명이 비명을 지르며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다카요시와 남은 2명의 하급 무장은 멈칫멈칫거렸다.

돌연한 상황에 난 어리둥절했다.

“무슨…….”

나도 모르게ㅔ 뇌까리는데.

“와아아아아.”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맞은편 송림에서 장갑윤과 20여 명의 궁병이 나타났다.

궁병들은 왼손에 활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런 자세로 다카요시와 2명의 하급 무장을 향해 뛰었다.

난 그 모습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최충헌의 가병이야.’

뛰면서 궁사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평상시 강도 높은 수련을 쌓지 않고서는 어렵다.

싱긋.

난 부드럽게 웃었다.

“묵이 녀석.”

잘해 주었다.

적절한 때에 장갑윤과 궁병들을 잘 데려왔다.

그 사이.

혹두는 장갑윤과 궁병들을 보고는 뜻밖이라는 속내를 담은 말을 내뱉었다.

“장 백인장!”

건달들은 나타난 궁병들을 보고는 놀라워했다.

“어, 어.”

“저 치들은.”

얼마 전까지 함께 왜구와 싸웠던 궁병들이라 대번에 알아보았다.

“하하하하하.”

난 머리를 들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내 귀에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나는 파공이 들렸다.

4 장

다카요시 홀로 남았다.

중앙에 서 있는 다카요시를 건달들과 시위에 화살을 잰 궁병들이 둥글게 에워쌌다.

나는 다카요시 정면에 서 있었다.

뒤로 혹두와 묵이 나란히 서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폈다. 둘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오갔다.

다카요시는 왼쪽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며 날 향해 소리쳤다.

“오너라. 내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네 놈 만큼은 저승 길동무로 삼을 것이니.”

제법 용맹한 모습이었다.

“풋.”

난 실소했다.

다카요시는 내가 움직이지 않자 다시 소리쳤다.

“겁이 나느냐? 이 겁쟁이야.”

일어는 모르지만 대충 어감을 눈치챈 혹두와 묵이 날 보았다.

“나리. 저 놈이 나리와 일대일로 싸우자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해 버리십시오.”

“맞습니다. 나리. 그냥 궁병들에게 명령하시면.”

난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됐어.”

손을 내리며 왼쪽 허리에 맨 소검을 끌렀다. 소검을 오른손에 쥐며 묵을 향해 내밀었다.

“가지고 있어.”

“나, 나리.”

묵이 당황하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혹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리. 검을 안 가지고, 설마 맨손으로 저 아 세키를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된다.

귀에 들린 혹두의 말에서 그런 속내가 엿보였다.

건달들과 궁병은 이민호와 다카요시를 번갈아보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종 수세에 몰린 적의 수장이 일기토라고 할 수 있는 일대일 결전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는 자신의 무용을 뽐내려고 결전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선택은 승기를 잡은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이민호의 몫이다.

자아 봐라. 나는 이렇게 강하다.

그렇게 자신의 강함을 뽐낼지, 아니면 현실에 충실하여 가차 없이 죽이라고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난 소검을 받아드는 묵에게 말하며 발을 떼었다.

“저 놈은 죽어도 그냥 죽어서는 안 돼. 본보기로 아주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아야 해.”

혹두가 다카요시를 향해 걸어가는 내게 소리쳤다.

“나리. 빈손으로는 안 됩니다.”

난 소리 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씩.

왼손을 들어 양쪽으로 가볍게 흔들렸다.

걱정 없어.

그런 속내가 묻어나는 손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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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요시는 자신을 향해 빈손으로 걸어오는 이민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빈손으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다는 오만이 한껏 보이는 이민호라 험악하기 짝이 없는 인상을 썼다.

“네놈이!”

무시도 어느 정도지.

다카요시는 검을 이마로 들며 양손으로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야아아아.”

크게 기합을 지르며 이민호를 향해 뛰었다.

건달과 궁병들이 그 광경에 놀라며 부지불식간에 이민호를 향해 소리쳤다.

“나리!”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이민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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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다카요시를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싱그레.

미소 지었다.

내가 빈 손일 때 가장 강하다는 것을 건달과 궁병 그리고 혹두와 묵은 모른다.

다카요시는 더 더욱 모르고.

산책하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날 향해 뛰어오는 다카요시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다카요시의 성난 얼굴과 날 죽이겠다는 살심이 그득 담긴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슬며시 발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부분으로 걸으며 다카요시를 주시했다.

여섯 걸음, 다섯 걸음, 네 걸음…… 두 걸음.

나와 다카요시 사이에 있는 거리가 줄어들었다.

“차핫.”

다카요시는 일순 밟던 땅을 박차며 날 향해 뛰어올랐다.

쉬이잇.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 다카요시가 내 머리로 검을 내리쳤다.

난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작이 그리 커서야.’

예상과 조금 달라 내심 흠칫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다카요시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왼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왼손바닥을 펴며, 손바닥과 손목을 잇는 장근으로 내리치는 검 자루를 때렸다.

빡.

장근이 검 자루를 쥔 다카요시의 손가락을 정확히 가격했다.

“악.”

다카요시가 외마디를 내뱉으며 수중에서 검을 놓았다. 검은 힘없이 땅바닥으로 덜어졌다.

난 상체를 왼쪽으로 틀며, 우측 어깨를 가슴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코앞으로 떨어지는 다카여시의 명치를 어깨로 밀었다.

텅.

다카요시는 그 충격에 착지하자마자 비틀거렸다.

난 양 팔뚝을 접어, 비틀거리는 다카요시를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주먹을 휘두르는 반경이 나오지 않았다.

꽈꽈꽈꽈꽝.

팔꿈치가 다카요시의 얼굴, 어깨, 가슴을 집중 공격했다.

“아아아아악.”

다카요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자빠졌다.

난 가까이 다가가 서며 오른발로 자빠진 다카요시를 자근자근 밟았다.

“이 세끼가.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개지랄 염병 질이야. 이걸 그냥. 화악!”

“크아악.”

다카요시는 비명을 지르며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날 공격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다소 어이가 없다.

아무래도 죽고 싶은 눈치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여느 사람보다 움직임과 힘이 남다르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어이없게 내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난 무자비하게 다카요시를 내리밟고, 걷어찼다. 아주 반 죽여 놓을 작정으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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