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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기 5권 1 장
묵이까지 나서서 일손을 거든 덕분에 간신히 이틀이라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나무들을 강바닥에 가라앉힌 후, 묵이 남경에서 사가지고 온 굵은 동아줄로 나무들을 묶어 마치 뗏목처럼 만들었다. 그런 다음, 가라앉힌 나무들 위에 얹었다.
일종의 상판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반만 한 공간을 어렵사리 확보했다. 해당 공간에 석포와 궁수들을 배치하였다.
한데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장인들의 우두머리 노인 나식이 수평을 거론하고 나섰다.
“가까스로 수평을 맞추긴 하였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저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한 두어 번 석포로 왜구들의 배를 공격한 후, 상판이 내려앉을 수도 있습니다. 수십여 번 왜구들의 배를 공격한 후 내려앉을 수도 있고. 저도 딱 몇 번 공격하면 상판이 내려앉는다고 확언確言 드릴 수 없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리.”
돌겠다!
천신만고 끝에 공간을 확보했더니, 수평과 지탱이 문제가 되다니.
노인 나식과 강변에 마주서서 머리를 맞댔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 에구골隘口谷에서 왜구 들을 잡지 못하면, 놈들이 한수를 통해 달아나는 것을 빤히 지켜봐야만 합니다. 놈들을 뒤쫓아 가서 섬멸할 수 있는 방도가 제겐 없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네에.”
통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적 문제라, 나보다는 나식이 더 전문가라 도움을 청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구들이 이번으로 끝이겠습니까? 그 놈들은 가을 추수가 끝날 때쯤에 다시 또 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고려 백성들이 얼마나 죽고 다칠지 모릅니다. 지금 놈들을 이곳에서 죄다 수장시켜, 두 번 다시 우리 고려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한 시진 후면 왜구들의 배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제발!”
난 나식에게 간곡히 부탁하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허, 참.”
머리를 숙인 탓에 노인 나식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난 알 수 없다.
그저 귀에 들리는 나식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좋습니다. 나리가 이렇게까지 부탁하시는데. 거절하면 제가 사람이 아니죠. 이 늙은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번 일에 한 번 걸어보렵니다.”
난 고개를 들어 나식을 보았다.
“어르신.”
“어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와 나리의 신분은 하늘과 땅입니다. 쇤네에게 그리 말하시면 제가 송구해서.”
나식은 손을 들어 백발이 듬성듬성 난 머리를 긁적였다.
난 내심 아차 했다.
고려가 신분제 사회라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이런.’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식을 보았다.
내가 알기론 천민과 양민 사이에 있는 부락 출신이다.
부곡, 향, 소.
부락은 그렇게 불린다. 대부분 종이나 자기와 같은, 일종의 특산물을 생산한다.
일테면 장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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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식을 비롯한 장인들이 상판에서 부지런히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 뒤로 석포를 담당하는 가병들과 궁병들이 서서, 초조한 기색을 띠었다.
적인 왜구들이 탄 30여 척의 배가 여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지체할 겨를이 없다.
내 좌측에는 오용섭이, 우측에는 묵과 혹두가 서 있었다.
“나리.”
오용섭이 날 돌아보았다.
“알아. 시간이 없다는 거.”
오용섭은 내 대꾸에 입을 다물며 상판을 보았다. 조급한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혹두는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나리. 마음. 푹 놓고 계십시오. 금방 끝날 겁니다. 헤헤헤.”
“웃지 마라. 응. 난 웃을 여유가 없으니깐.”
혹두를 돌아보며 험악한 인상을 썼다.
‘힉.’
혹두는 진한 꺼림의 얼굴빛을 띠며 몸을 움츠렸다.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묵이 상판을 바라보다가 소리치며 날 돌아보았다.
“나리. 끝났나 봅니다.”
희색이 만연했다.
난 상판을 보았다.
노인 나식이 일어서며 날 향해 돌아섰다. 양손을 머리 높이 들더니 양쪽으로 흔들었다.
주변에서 다른 장인들이 하나둘 허리를 펴며 돌아섰다. 다들 나식처럼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난 반색하며 뒤돌아보았다.
“이동!”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오용섭이 날 따라 뒤돌아서더니. 시야에 보이는,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백인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움직여라!”
“예에에.”
백인장들은 대답하며 뒤에 도열한 가병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이동한다.”
“어서 움직여라.”
수십여 대에 이르는 석포를 운용하는 가병과 궁병들.
도합 500여 명의 가병이 천천히 상판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난 묵을 돌아보았다.
“묵아.”
“네. 나리.”
내 부름에 묵이 돌아섰다.
“장인들을 에구골에서 멀리 피신시키고, 따로 네게 100여 명의 가병을 붙여줄 테니. 남경에서 사온 기름통들을…… 내가 유사시에…… 알겠지. 잘해야 한다. 응.”
“나, 나리.”
묵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씩.
난 묵을 응시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도망치거나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이번 싸움은 총력전이니깐.”
던지듯 묵에게 말한 후 시선을 바로 했다. 그리고 시야에 보이는 상판을 향해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내 뒤에서 묵이 다급히 외쳤다.
“나리. 제가 그 일을 어떻게 합니까? 네에에.”
난 대꾸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오른손을 들어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나리이이이.”
묵이 소리쳐 날 불렀지만 난 모른 척했다.
‘이번 싸움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왜구들의 준동 따위로 군사력을 낭비할 겨를이 없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와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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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판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내가 아는 몇몇 지식을 떠올렸다.
‘강종이 제위 2년 만에 꼴까닥했으니 아마 올해 안으로 고종이 왕이 될 거고…… 몽고가 금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쥐어짜내듯이, 내가 아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래. 1211년 봄이었지. 1211년과 1212년. 2년에 걸친 몽고군의 공격은…… 아마 차하르 성 지역일거야.…… 금의 북방 방어선이 몽고군에게 유린되고. 칭기즈 칸의 휘하 장군이었던 잘리이르 무갈리. 뒷날 몽고의 중원 공략을 총지휘한 그 자가 선부위 거용관을 점령함으로서 여진이 있는 만주로의 길이 열렸었지. 아마 지금의 북경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미치겠네. 그새 머리가 녹슬었나?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
슬며시 짜증이 났다.
‘분명 김 교수님이 몽고에 대해 강의하실 때 중요하다고 체크해두라고 하셨는데.’
뇌세포야. 제발 좀 움직여라. 이전의 나와는 엄청 달라졌잖아. 으응.
물에 흠뻑 젖힌 걸레를 짜듯 머리를 짜고 또 짰다.
‘그, 그렇지.’
난 히죽 웃었다.
‘1213년! 그래. 기억나. 몽고군이 3차에 걸쳐 장기간 여진의 중부 방어선을 때렸다고 김 교수님이 그러셨어. 그리고 1214년 초에 몽고가 금의 수도 중도를 포위, 공격…… 금의 수도 중도의 방어가 상당히 견고해, 게다가 몽고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김 교수님이 당시에 칭기즈 칸이 과연 중도를 공략할 의도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하셨지.’
기억이 난다.
준상이가 그 때 김 교수님에게 그랬다.
‘교수님. 몽고군은 장기간 공성전을 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잖습니까? 공성전에는 운제, 충차, 분온차 등, 공성병기가 필요한데. 당시 몽고군은 그런 공성 병기를 제대로 구비하지 못했잖습니까?’
김 교수님이 웃으시며 그러셨어.
“그 때문에 금과 몽고 사이에 평화 협상이 맺어져, 금은 몽고에 상당한 양의 공물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당시 칭기즈칸은 금으로부터 3,000마리에 이르는 말을 건네받았다. 주변에 있는 이들이 금과의 화의에 강하게 반발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에 칭기즈 칸이 말하기를 ‘지금은 우리가 받은 말을 무사히 몽고로 가지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말했다. 그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수긍하고 몽고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3,000마리의 말이 기병 위주인 몽고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그 후 금은 몽고가 철군하자마자 곧바로 도읍을 변경, 과거 송나라의 황도였던 개봉으로 옮겼다. 몽고는 천도가 자신들에 대한 적대 의사로 간주, 준상이가 말한 대로 다수의 공성 장비와 관련 인원을 확충하여 다시 금나라 공략에 나섰다. 그 결과 1214년 5월 금의 새로운 수도가 몽고의 손에 떨어지고, 그 일은 몽고가 중원 정복에 나서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난 눈을 반짝이며 이제 곧 다가올 대 몽골 전쟁을 마음속으로 가늠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막강한 군대였다고 하는 몽골군.
시저나 알렉산더를 능가하는, 사상 최강의 초거대 제국을 세웠던 칭기즈 칸.
내가 맞서려는 상대들이다.
‘그 전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에 힘주었다.
전 고려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대동단결시켜, 대 몽골전을 염두에 둔 일연의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젠장.’
걸리적거리는 것이 생각 외로 많다.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난 상판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 머릿속에서 김 교수님이 언젠가 해주신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진정한 최강의 대제국이 과거 우리 한반도에 있었다. 주변 열국들은 그 나라를 가리켜 위대한 신의 나라 신국神國! 이라 불렀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기왕에 나선 김에.’
좋을 것이다.
열국을 아우르는 신의 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도…….
성큼성큼.
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상판은 그에 비례하여 내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