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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들은 혹시나 관직을 받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죄다 들뜬 얼굴빛을 감추지 못했다.
‘허이고.’
도통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양반들이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줄을 모르는 어리숙한 이들이라, 난 내심 혀를 찼다.
‘쯧쯧.’
그 때였다.
군막 입구 쪽이 시끄러웠다.
웅성웅성.
최우는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군막 입구를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군막이 열리며 한 십인장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널찍한 탁자 중앙에 앉아 있는 최우를 향해 뛰었다.
최우는 다가와 서는 십인장에게 물었다.
“어이해?”
불쾌하다는 심중이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십인장은 쏜살같이 말했다.
“네. 부사 어른. 황도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막무가내로 부사 어른을 뵙겠다고 떼를 써, 군략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는데.”
“됐다. 얼추 모든 얘기는 마무리가 지어졌으니. 전령을 안으로 들여라.”
“네.”
십인장은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돌아서며 군막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최우, 서풍, 지방 호족들이 군막 입구를 쳐다보았다.
‘왔군.’
난 다른 사람들처럼 군막 입구를 보며, 속으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예상대로다.
잠시 뒤, 전력이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전령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급히 앉아 있는 최우에게 다가가 전언을 전했다.
내가 짐작하는 대로 최향이 크게 패했으니, 나를 어서 빨리 충주목으로 보내라는 최충헌의 명이었다.
청주목을 떠나 광주목으로 올 때 미리 개경으로 승전보를 보냈다.
이겼다는 것을, 승전보를 제일 먼저 알려야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업될 것이기에 조금 잔머리를 굴렸다.
최우가 날 보았다.
“이보게.”
“네.”
“향이가 아무래도 뭔가 실책을 범한 듯 하니 자네가 속히 충주목으로 가 주어야겠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급한 듯 하니 저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시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 최우가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서둘러 군막 입구로 향했다.
등 뒤에서 서풍과 호족들이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왜?’
아무래도 서풍이 내게 적의를 품은 것 같다.
내가 서풍을 서운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서혜를 염두에 두면 처남 매부지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심중 적잖은 당황을 느꼈다.
9 장
내가 군막으로 돌아왔을 때, 오용섭이 와 있었다.
“어?”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리.”
“잘 왔어. 그런데 청주목은 어떻게 했어?”
“네. 나리께서 말씀 하셨던 서혜라는.”
서혜에게 몽땅 다 맡기고 줄행랑쳤다. 오용섭이 말하는 요지는 그랬다.
“나리가 어디에 있냐고 방방 뛰던데요.”
“그래.”
난 웃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탁자로 걸어가며 뒤따라 걸으려는 오용섭을 돌아보았다.
“뭐해.”
“네?”
오용섭은 걸음을 멈추고 날 보며 영문을 몰라 했다.
난 돌아서며 눈짓으로 군막 입구를 가리켰다.
“나가서 이동 준비하지 않고서 뭐하는 거냐고?”
“예에에.”
오용섭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멀거니 바라보았다.
난 태연하게 대꾸했다.
“곧바로 이동해야 하니깐. 얼른 나가서 준비해.”
“나, 나리.”
오용섭은 당황했다.
“저 방금 전에 당도했습니다. 네에.”
“누가 그걸 몰라. 싫음. 여기 있던지.”
“예에에에에!”
오용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오용섭을 마주보며 마음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크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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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대빨이나 나온 오용섭이 투덜대며 군막을 나간 직후, 묵이 들어왔다.
난 탁자에 앉아 이것저것 챙기고 있다가 묵이 들어서는 기척에 돌아보았다.
“묵아. 이리와 봐라.”
“네. 나리.”
나는 내 옆으로 다가와 선 묵을 쳐다보며 물었다.
“남경에서 산 기름이 얼마나 남아 있지?”
“네. 나리. 광주목 공략에 사들인 기름의 약 절반을 사용했습니다. 남아 있는 기름은 여남은 수레 정도 됩니다.”
“조금 부족하겠다.”
“네?”
묵은 어리둥절했다.
“너, 다시 남경에 가서.”
기름을 비롯한 물자들을 더 사들여라.
묵은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반문했다.
“나리. 돈 없는데요.”
“외상으로 해.”
“예에에에.”
내 말에 묵의 얼굴 표정이 급변했다.
황당무계합니다.
묵의 얼굴에 그와 같은 감정이 그득 어렸다.
“뭐해. 빨리 남경으로 가지 않고서, 우린 충주목 방면으로 이동하니깐. 물자를 사들인 즉시 충주목 방면으로 오도록 해. 한시가 급하니깐. 최대한 속도를 내고.”
“나, 나리.”
묵은 당황하며 서둘러 돈이 없다는 것을 내게 알렸다.
“네 능력을 발휘해봐라.”
“나리. 뭔 능력이요.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삽니다. 네에.”
“아무튼 구해 와.”
“나리!”
묵은 목청을 돋웠다.
성큼 내게 한 걸음을 내딛으며, 절대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속내를 밝혔다.
“나리.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돈이 없는데 물자를 뭔 수로 삽니까? 그리고 저 남경의 상인들과 면식도 그리 없습니다. 외상도 어느 정도 얼굴이 익어야 하죠. 네에에.”
“난. 너를 믿는다. 묵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물자들 사가지고 와라.”
난 냉정하게 묵에게 말했다.
“나, 나리.”
묵은 날 보며 울상을 지었다.
누가 옆에서 말 한 마디 거들며 곧바로 닭똥 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직전이었다.
“나리.”
난 일어나 묵에게 돌아서며 양손을 들었다.
처, 척.
묵의 어깨에 양손을 얹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묵아.”
“네, 나리.”
“네가 물자를 사가지고 빨리 오지 않으면 우리 1,400여 명 몽땅 다 왜구들에게 죽는다.”
기존의 1,000명에다가 오용섭이 데리고 온 400명을 합쳐 도합 1,400여 명이 지금 내 휘하에 있다.
광주목을 공략하며 어느 정도 사상자와 중, 경상자가 생겼지만 그 수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비하다.
“나, 나리이이.”
날 바라보는 묵의 눈에 물기가 차기 시작했다.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난 서둘러 군막 입구로 향했다.
“묵아. 꼭 물자를 구해 와야 한다. 그것도 무조건 빨리. 으으응.”
묵의 왼쪽을 지나치며 다시금 말했다. 연거푸 말했으니 묵의 머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잠시 뒤, 군막 입구에 이르렀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서 있는 묵을 힐끔 돌아봤다. 내 눈에 보이는 묵은 넋 나간 사람마냥 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푸하하하하.’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 난 마음속으로 폭소했다.
‘잘해봐라.’
큰 상인으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여느 상인과는 다른 수완을 발휘해야 한다.
안면이 없는, 생전 처음 보는 상인에게서 외상으로 물자를 살 수 있어야, 그와 같은 경험들이 축적되어야 대 상인으로서 발돋움 할 수 있다.
난 그리 생각하는 관계로 일부러 묵에게 짐을 지웠다.
‘혹두. 그 인간 때문에.’
난 군막 밖으로 나가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뒷골목 인간들에게 약속한 백금을 주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호주머니를 뒤집어 봐도 나오는 것은 먼지 밖에 없는 처지다.
핑계가 아니라 진짜 난 알거지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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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도감.
최충헌은 느긋한 자세로 단상에 앉아 있었다.
단상 중간 어림 좌측에는 김덕명이, 우측에는 이규보가 서 있었다.
단상 아래에는 쉰이 넘은 관복을 입고, 관모를 머리에 쓴 병부상서兵部尙書 한진형이 양광도의 전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최충헌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한진형의 설명에 김덕명은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줄을 댄 자가 최향이다.
다들 김덕명을 최향의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김덕명의 귀에 충주목을 공격했던 최향이 대패하여, 이끌고 간 1천여 명의 기병 중 겨우 100여 명을 데리고 전라도로 남하했다는 한진형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합…….”
김덕명은 단상에 앉은 최충헌을 향해 돌아서며 뭐라 말하려 했다.
스윽.
최충헌은 말없이 왼손을 가슴 높이로 들며 범상치 않는 눈빛을 띠었다.
김덕명은 눈에 보이는 최충헌의 모습에 멈칫하고 말았다.
‘허억.’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골로 갈 것 같은 진한 불길함이 심중에서 마구 일었다.
이규보는 그런 김덕명을 쳐다보며 알아보기 어려운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이 한진형이 최충헌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명하신 대로 최 부사에게 이민호라는 자와 그가 이끄는 가병들을 서둘러 충주목으로 보내라 전하였사옵니다.”
“우, 그 아이가 이번에 크게 이겼다던데.”
“네. 며칠 전에 왜구를 섬멸하고 광주목을 되찾았다 합니다. 역시 상국 합하의 큰 아드님다우십니다.”
한진형은 슬쩍 최우를 입에 올리며 최충헌에게 아부했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하겠는가?
최충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진형의 눈에 최충헌이 입매를 비틀어 짓는 작은 미소가 보였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