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06화 (10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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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군막을 나와 인근에 있는 야산으로 향했다.

줄달음쳐 단숨에 야산의 정상에 올라 저 멀리에서 펼쳐지는 전장을 굽어보았다.

앞쪽에서는 창병, 궁병, 석포로 이루어진 다수의 무리가 광주목 내로 천천히 진입하며 막 접전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이민호가 최우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고, 서풍과 지방 호족들이 고개를 돌려 이민호와 최우를 쳐다보았다.

가장 후미에는 서풍과 지방 호족들이 데리고 온 가병 그리고 최우의 가병이 도열해 있었다.

도합 800여 명의 가병은 기치창검과 깃발을 높이 들고 명령이 떨어지며 그 즉시 출병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 모습이 보기에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길 수 있으려나?”

묵은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심중 승패에 지대한 관심이 쏠렸다. 이민호와 동일한 1천여 명의 가병을 이끌던 최우였다.

그런 최우가 700여 명의 가병을 잃었다. 싸울 수 있는 가병은 불과 300 명.

왜구는 강하다.

최우도 실패한 광주목 공략을 이민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묵은 진한 궁금증을 얼굴에 띄우며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서 옅은 긴장이 배인 작은 눈빛이 연방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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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과 좌우에 있는 세 무더기에서 왜구들이 나타났다. 왜구들은 각 일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가병들을 향해 치달았다.

“掃いて捨てて!”

“打って殺しなさい!”

살의를 그득 머금은 외침을 내지르며 왜구들이 수중에 쥔 검과 창을 높이 들었다.

왜구들의 눈동자에 시뻘건 핏발들이 섰다.

피를 갈구하는, 피에 굶주린 짐승 같았다. 내지르는 함성과 전장에서 오래 동안 다져진 살기를 감추지 않고 줄기줄기 내뿜었다.

여느 군병이라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의 살벌한 기세에 주춤거리며 부지불식간에 주눅이 들고 말 것이다.

아울러 사기가 현저하게 떨어져 싸우기를 꺼리며, 뒤돌아서서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훈도시라는 천으로 남자의 거시기를 가렸을 뿐, 하체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상체에는 언제든지 입고 벗을 수 있는 간편한 홑옷을 입었다.

전형적인, 왜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료닌들 특유의 복색이었다.

춥고, 배 고프다는 것이 그들의 복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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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가 이끄는 1,000여 명의 가병은 뜻밖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각 백여 명씩 소무리로 나뉘어, 창병과 궁병이 혼재된 그들은 침착하게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을 마주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이 왜구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 괘 도움이 되었지만, 그보다는 청주목에서 거의 희생 없이 왜구들을 섬멸한 것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알고 보니 별 거 아니다!

이민호가 이끄는 가병들은 그런 자신감에 차 있었다.

“침착하게. 동요하지 마라. 이미 한 번 싸워 봤잖느냐?”

무리 중앙에 서 있는 백인장은 주변을 돌아보며 가병들을 다독였다.

그와 함께 뒤쪽을 돌아보며 목이 터져라 고성을 질렀다.

“전달! 석포 지원 요청!”

3미터쯤 거리를 벌리고 따라오던 다른 소무리가 백인장의 말을 받아 뒤로 전했다.

“전달! 석포 지원 요청!”

10개의 소무리는 일련의 말을 전달하며 주변에서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을 예의주시했다.

“창! 중단.”

각 백인장이 소리쳤다.

제일 바깥에 있는 창병들이 가슴 높이로 2.5미터 어림의 창을 들었다.

백인장은 수하인 십인장들을 돌아보았다.

“공격! 자유!”

십인장들은 백인장이 지휘권을 건넨다는 말에, 각기 맡은 가병들과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을 번갈아보았다.

“아직!”

“기다려. 좀 더 가까이 올 때까지 참아.”

“섣불리 공격하지 마! 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십인장들은 눈대중으로 가병들이 든 장창의 공격 범위를 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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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후미에서 석포가 돌이 아닌 술동이를 왜구들의 방어 거점으로 날려 보냈다.

슈, 슈우우우.

술동이들은 높이 치솟는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지나 각 방어거점으로 낙하했다.

와장장창.

지면에 닿으며 산산이 부서짐과 동시에 화염이 치솟았다.

화염은 주변에 있는 두, 서너 명의 왜구를 한 입에 집어삼켰다.

불길이 몸에 옮아 붙은 왜구들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마구 비명을 질렀다.

“우아아아악.”

“끄아악.”

왜구들은 몸에 붙은 불길이 주는 뜨거움이란 고통에 발버둥 쳤다.

황황급급히 지면에 몸을 뉘며 떼굴떼굴 굴렀다.

조금이라도 몸에 붙은 불길을 끄려하는 왜구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느끼고 있을 심대한 고통이 물씬 느껴졌다.

“크아아아악.”

비명이 그칠 새가 없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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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러!”

“찔러!”

십인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명했다.

그러자 가병들이 일제히 덤벼드는 왜구들을 향해 장창을 내찔렀다.

쉭, 쉬이이이.

장창이 힘차게 전방으로 내질러졌다.

창날은 바람을 가르며 장창의 공격 범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몇몇 왜구들을 단숨에 꿰뚫었다.

푸, 푸, 푹.

창날에 몸이 꿰뚫린 왜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자신들이 어떤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알렸다.

“으아아아아.”

“크허억.”

십인장들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표정을 지으며 급히 창병들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간격을 벌리지 마라!”

“좌우에 서 있는 동료들과 바짝 붙어!”

“틈이 벌어지면 죄다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명심해!”

십인장들은 밀집대형의 유지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본 백인장이 급히 창병들 뒤에 서 있는 궁병들을 돌아보았다.

“뭐들 하고 있어! 빨리 창병들을 엄호하지 않고! 궁병! 십인장! 뭐들 하는 거야!”

백인장은 궁병들을 맡은 십인장들에게 고성을 질렀다. 고성에는 탐탁지 않다는 속내가 그득 깃들어 있었다.

예의 궁병들을 맡은 십인장들은 백인장을 돌아보았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궁병들을 맡은 십인장들은 각자 맡은 궁병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각자 자유사! 창병을 확실히 엄호해라.”

“창병들을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과 뒤에서 달려오는 왜구를 확실하게 쏴라.”

“화살 하나에 왜구 하나다!”

“어설프게 쏴서. 화살을 낭비하는 놈은 나중에 내게 죽을 줄 알아아아!”

십인장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궁병들을 압박했다.

“네에에.”

“잘 알겠습니다.”

“아따. 믿고 맡겨주시라요.”

궁병들은 직속상관인 십인장들을 향해,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쳐 대답했다.

그들의 시선은 정면과 좌우에서 공격해오는 왜구들을 향해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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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들은 동료들이 장창에 꿰뚫리는 것에 크게 성냈다.

“고노!”

“칙쇼오오!”

검과 창을 쥔 왜구들은 용기백백하고 사기충천했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최우의 가병들을 물리친 경력이 있기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병 가까이에 이른 왜구들은 당황했다.

“어, 어.”

“이…….”

의외로 장창이 너무 길었다.

그 탓에 창병들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창과 창 사이가 너무나도 빽빽해, 영락없이 몸의 가시를 바짝 세운 고심도치를 마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이 몇몇 왜구가 손에 걸머쥔 검을 휘둘러 장창을 베고 밀며 창병들에게 접근하려 하였다.

휘두르는 검날에 나무를 깎아 만든 창대가 잘렸다.

서걱.

스읏.

그 광경을 본 창병 뒤에 서 있는 한 궁병이 눈을 빛내며 시위를 놓았다.

“어디서 지랄이야!”

화살은 경쾌한 파공을 흘리며 단순에 창대를 자른 한 왜구의 얼굴로 날아가 박혔다.

퍼억.

둔중한 울림과 함께.

“크아아아악.”

왜구의 비명이 터졌다. 얼굴에 화살이 박힌 왜구는 이내 뒤로 나가뒹굴었다.

한편.

창을 쥔 왜구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창을 던졌다.

창은 장창들 사이를 스치며 공중을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창병의 가슴에 꽂혔다.

둔중한 울림과 함께 창병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아악.”

십인장은 그 광경에 재빨리 명령했다.

“창대가 잘린 사람은 창을 버리고 뒤로 물러나라. 죽은 동료를 뒤로 빼!”

“붙어! 좌우에 있는 동료와 바짝 붙으란 말이야.”

십이장들은 빽빽한 장창으로 이루어진 밀집대형의 유지에 몹시 신경 썼다.

이민호가 밀집대형이 흐트러지면 죄다 다 죽는다고, 극심한 공갈 협박을 퍼부어, 십이장들은 은연중에 틈이 곧 자신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틈을 만들지 않으려 만전에 만전을 기했다.

왜구들과 각 100명씩 소무리로 나뉜 이민호가 이끌던 1,000여 명의 가병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우와악.”

도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왜구와 가병 사이에 사상자와 중, 경상자가 속출했다. 그와 같은 희생자들은 가병들보다는 왜구들이 더 많았다.

장창으로 이루어진 밀집대형은 좀처럼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전진하며 십인장의 명에 따라 동시에 장창을 거두고 내질렀다.

왜구들은 수없이 많은 장창이 동시에 내질러지자 속수무책으로 자신들의 몸을 내주었다.

검을 든 일부 왜구들은 장창을 쳐내며 어떡하든지 창병들 사이로 파고들려했다.

그런 왜구들을 향해 궁병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쏴댔다.

한편, 왜구들의 각 방어 거점을 향해 기름이 그득 담긴 술동이들이 연이어 날아갔다.

각 방어 거점에서 화염이 쉴 새 없이 일었다.

방어 거점에 있는 왜구들은 주변에서 치솟는 화염에 허둥지둥거렸다.

혼전이었다.

왜구들은 우왕좌왕했다.

생전 처음 보는 고려군의 전술 대형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왜구들은 맡은, 불길에 휩싸인 방어 거점을 포기하고 대형을 이룬 고려군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왜구들을 향해 궁병들이 지속적으로 활을 쏴댔다.

궁병들은 창병들의 엄호에 부쩍 신경 썼다.

창병들을 향해 파고드는 왜구들을 쏴 죽이는 한편, 뒤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왜구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살을 쏴댔다.

화살들이 공기를 가르며 흘리는 파공이 그칠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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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는 방어 거점들 중간 어림에 있는 한 거점에 올라서서, 눈에 들어오는 일련의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이, 이럴 수가!”

자신의 필생 역작인 방어 거점들이 생전 처음 보는 대형을 이룬 고려군에 의해 하나둘씩 무력화되고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방어 거점을 수하들이 떠났고, 죄다 고려군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창이란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쓰러져갔다.

공격해 가는 와중에, 창병 뒤에서 날아오는 다수의 화살에 상당한 수의 수하들이 당해, 맨땅바닥으로 나가뒹굴었다.

타치바나는 참담한 심정에 얼굴을 이지러뜨리며 입을 따악 벌렸다.

경악이란 감정을 가득 담은 얼굴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당혹이라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저, 저 대형은…….”

타치바나는 눈에 보이는 전황戰況이 가병들이 취한 대형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직시했다.

눈을 부릅뜨려 뚫어져라 가병들의 대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매서운, 성난 눈빛이 쉼 없이 번쩍였다.

타치바나는 몰랐다.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형이 아득한 과거, 약 BC 320년경에 횡행하던 공격 전술 대형임을 알지 못했다.

달리 레기온이라 부르는 로마 최정예 군단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유럽 최강의 전술 대형으로 각광받던 그리스 중장보병.

팔랑크스Phalanx!

2.5미터가 넘는 장창 사리사 sarissa와 호플론hoplon이라 불리는 원형 방패를 소지한 중장보병들.

그들은 대형을 형성, 근접전을 통해 적을 궁지로 몰아넣는 밀집전투대형密集戰鬪隊形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이민호는 팔랑크스를 응용, 왜구들의 방거 거점들을 하나둘씩 무너뜨리며 광주목 깊숙이 치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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