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00화 (10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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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저녁밥을 먹고 야음을 틈타 황곤과 네 명의 가병을 데리고 광주목으로 스며들었다.

활과 검 등.

죄다 중무장했다.

성문과 성벽은 최우의 가병이 차지하였으나, 광주목 내부는 아니었다.

성문에서 광주목으로 이어지는 각 길은 막혀 있었다.

담을 허문, 멀쩡한 가옥을 부수고 확보한 온갖 더미로 왜구들은 크고 작은 다수의 둔덕을 만들었다.

‘흐음. 일종의 바리케이드다. 이거지?’

광주목 안쪽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을 빙 둘러 적정敵情을 염탐하였다.

어두운 밤의 장막帳幕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일렁이는 작은 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번番을 서는 왜구들이 다수의 모닥불을 피운 듯 하다.

간간히 나지막이 일어가 귀에 들렸다.

내가 알고 있는 현대 일어와는 조금 차이가 있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거리 탓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돌아가는 눈치가 왜구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잡담을 주고받는 모양이라, 난 조심스레 행동했다.

행여 나와 황곤을 비롯한 네 가병의 움직임이 왜구들에게 들키면 그 즉시 공격받을 수 있는 까닭에 신중하게 처신하려 애썼다.

시야에 들어오는 왜구들의 외곽은 정면에서는 뚫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건.’

왜구들의 거점은 동양 철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팔괘 형상을 띠었다.

건곤감리이진…… 뭐, 그런 구조가 아니라, 예를 들며 건을 상징하는 ☰ 표기처럼 괘의 형상을 띠었다.

‘이것 봐라.’

새삼 왜구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타치바나가 내 생각 이상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런 형태의 바리케이드라고 할 수 있는 둔덕을 난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내심 당황했다.

‘깨기 어려워.’

난 방어물인 각 둔덕을 돌파하기가 여의치 않다.

제일 앞에 있는 둔덕을 공격하며 뒤에 있는 두 둔덕에서 즉시 협공에 나서는 형태였다.

공격하는 측을 세 방향에서 집중 공격할 수 있는, 수비 측의 이점이 극대화된 방어 형태라, 공격하는 측의 피해는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관절 어떤 자이기에 이런 방어물을 생각한 거지?’

진한 의문과 궁금증을 느꼈다.

현대전의 교리를 집중 교육받은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어 진형을 생각해낸 타치바나와 군사 교리에 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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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난 방어물인 둔덕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바짝 접근했다.

한 3 분分쯤 지났을까?

황곤이 내 뒤에 착 달라붙듯 가까이 다가왔다.

“나리.”

난 황곤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더는 위험합니다.”

황곤의 얼굴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깔려 있었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가자.”

난 대꾸하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나리!”

황곤은 조금 더 강하게 날 불렀다.

“더 지체하시면 위험하시다고요.”

목소리가 다소 컸다.

대번에.

“누구냐?”

“거기 누구야?”

인근에 있는 둔덕에서 번을 서던 세 왜구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소지한 병기를 꼬나 잡고, 내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왔다.

“뭐가 있는 것 같아.”

“수상한데.”

“어이. 거기 있는 게 누구야?”

경계심이 그득한 왜구들의 물음이 들렸다.

“염병!”

난 성난 표정을 지으며 황곤을 돌아봤다.

너 때문에 들켰다!

그런 무언을 담은 내 시선에 황곤이 곤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입은 다문 것이 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썩을!”

아쉬웠다.

조금만 더 둘러보면 좋겠는데. 눈치 없는 황곤 때문에 산통이 다 깨쳤다.

“나리.”

“들킨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몸을 웅크린 네 가병이 날 쳐다보았다.

“돌아간다.”

지체하면 십중팔구 곤경에 처할 것이기에 난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네.”

네 기병이 몸을 일으키며 뒤돌았다.

그와 함께.

“저 놈들 뭐야?”

“게 서라.”

“잡아라.”

왜구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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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의 군막.

단출하고 소박한 군막 내부를 굵은 초가 밝혔다. 야심한 시각이라 군막 내부는 다소 어두웠다.

서풍은 양손을 들어 탁자에 놓으며 깍지를 쥐었다.

가만히 머리를 숙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얼굴빛이 흐린 것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눈치다.

“어찌한다?”

서풍은 가만히 되뇌다.

이민호가 마음에 걸려도 크게 걸렸다.

여동생 서혜가 이민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진 눈치다. 게다가 최우가 전례 없이 이민호에게 폭 넓고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

1, 800여 명에 이르는 모든 병력의 지휘권을 최우가 일괄 이민호에게 넘긴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민호와 최우가 만난 것은 겨우 몇 달.

그 기간에 최우가 그와 같은 신뢰를 이민호에게 보내는 것은 어안이 벙벙해질 일이다.

일련의 돌아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심중 고심顧心했다.

자신이 나서지는 않았지만 몇몇 지방 호족이 최우의 신색을 살피며 지휘권을 이민호에게 넘기는 것을 조심스레 반대했다.

“어허. 일전에도 말했지 않소. 그 사람이 내놓은 공략법보다 더 나은 공략법을 내놓는다면 모르겠지만. 그 전에는 단 말하지 마시오!”

최우는 강하게 반대를 누르고 이민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기실 최우가 자신에게 지휘권을 줄 것이라 예상했었다. 곧 사위가 될 몸이니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 믿었다.

하여, 내심 크게 꿈에 부풀었다.

잘만 하면 최우를 등에 업고, 큰 전공을 세워 관직에 나갈 수 있을 듯 보여 상당한 기대감을 심중에 품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장차 온 고려를 일언一言으로 호령하는 집권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고 얄팍한 욕심이지만, 최우가 이민호에게 지휘권을 일괄 넘기기 전까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최우의 서녀와의 혼사는 잔잔하던 자신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퐁당.

작은 조약돌이 던져진 것처럼 적잖은 번민을 겪었다.

이제까지 없던 야심이란 괴물이 마음의 심연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형 서윤이 있어, 형이 가문을 이을 것이라 여긴 까닭에 오래전에 마음을 비웠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야심이란 이름의 불씨가 마음 속에 지펴졌다.

겉으로는 아무 감정의 변화가 없는 것처럼, 평상시와 똑같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나도 한 번!

그와 같은 충동을 느꼈다.

무릇 사내라면 누구나 권력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고픈 욕구가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세상에 태어날 때 왕후장상의 씨가 정해져 있던가?

힘이 있으면, 지략이 있으면, 때가 자신을 도와주면 얼마든지 최충헌처럼 손아귀에 권력을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충헌이 어디 처음부터 권력과 세도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는가?

한미하기 그지없는 하급 무관으로 시작하여 당대 고려 최고의 집정관이자 집권자가 되었다.

자신도 그리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본시 주인 없는 꽃은 꺽은 자가 주인이요. 권력이란 손에 쥔 자의 것이라 했던가?’

서풍은 머리 숙인 탓에 시야에 들어오는 탁자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민호.’

일순.

‘으음!’

서풍은 흉중胸中으로 가는 신음을 흘렸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력이 센 떠돌이 무사로 보였다. 한데, 남경에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더니 일약 최충헌의 신임을 받는 자로 발돋움했다.

최충헌의 두 아들 최우와 최향, 그들과 나란히 같은 반열에 서서 최충헌의 가병을 이끌게 될 줄이야.

게다가 맡은 충주목을 단숨에, 별다른 희생 없이 되찾다니.

서풍은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이민호에 대한 강한 경쟁 의식이란 감정에 얼굴을 굳혔다.

머릿속으로 최우와 그 가족을 상기했다.

이남일녀의 자식.

만종, 만전은 이미 옛적에 후계에서 배제되었다. 개망나니들인 그들에게 최우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리는 없다.

그럼 남은 자녀는 딸 최송이뿐이다.

들리는 말로는 최우가 김약선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는 하나, 자신이 몰래 알아본 바로는 김약선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에 가깝다.

그러니 잘만하면 자신이 최우의 후계자 자리를 노려볼 만도 하다. 그런 이유로 전날 부친에게 혼사에 생각이 있음을 슬며시 내비쳤다.

“흠.”

서풍이 생각을 정리하며 짧은 외마디를 흘리는 그 때.

군막으로 몇몇이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이게 말이 됩니까?”

“가병들에게 태형을 가한 것은 우리에게 태형을 가한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그 사람. 내 그리 보지 않았거늘.”

서풍은 군막 입구를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몇몇 이들을 보고는 앉은 자리에서 빨리 일어났다.

지방 호족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서풍은 탁자를 빠져나오며 호족들을 반갑게 맞았다.

호족들의 연배는 아버지뻘이라 조심스러웠다. 또한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려면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세력을 형성하고 다지는 것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에게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힘 있는 자들을 자신의 당여黨與로 만들어야 한다.

부친 서양헌이 양광도의 모든 호족을 아우르는 대 호족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꿈을 품어온지 십 수 년이다.

하나, 세상 일이란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부친은 최근에 들어서 그 꿈에 성큼 다가섰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제 자신도 자신 나름의 길을 모색해 봐야 한다.

가문은 형 서윤이 잇겠지만, 자신은 조당에 들어 장래에 고려를 호령하는 집정관이 될 것이다.

‘하면. 우리 여주 서가의 영화는 하늘에 닿을지도 모르지. 후후.’

서풍은 심중 미소 지르며 호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서풍의 내면에서 권력욕과 야심이란 이름의 두 심마 心魔가 고개를 쳐들었다. 두 심마는 야금야금 서풍의 심신을 갉아먹으며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한다 했다.

·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와 같은 말이 있고 보면 서풍의 변심도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우애가 깊은 형을 제치고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고, 가문은 형의 몫이라는 생각에 아예 처음부터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 서풍의 마음에 심라라는 씨앗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최우다.

보현원의 난 이후, 강대한 무력을 가진 무신들이 앞다투어 손아귀에 권세를 쥐고 마구 휘두르니.

· 힘만 있으면 누구나 권세를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의민이다.

아버지 이선李善은 소금과 체를 팔아 생계를 잇는 장사치였고, 어머니는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그런 이의민이 고려 천하를 호령하였으니, 누군들 그리 생각하지 않겠는가?

무신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힘으로서 손아귀에 권력을 틀어쥘 수 있는 능력 본위의 세상을 연 셈이 되고 말았다.

그로인한 혼란은 국력 소모와 내분으로 이어졌고, 그런 고려는 훗날 쳐들어온 몽골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권력을 서로 차지하고자 하는 내부 분열로 북방과 주변 각 국이 돌아가는 사정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해, 몽고가 강대한 제국으로 일약 성장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다.

권력을 다투는 지배층과 달리 양민과 천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러났다.

훗날 쿠빌라이가 외손자 충선왕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원은 동과 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이 되었다. 그런 우리 원의 역사에서 고려만큼 격렬한 저항을 한 나라를 일찍이 찾아볼 수 없다. 태조이신 칭기즈 칸을 분노케 한 호라즘도, 저 노서아露西亞도, 페르시아도, 천축도 너희 고려만큼은 아니었다. 한데, 이제 너희 고려가 우리 대원의 부마국이 된 이후 그 때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기 그지없구나.”

한 마디로 말해 우리 몽고에 너희 고려처럼 질기디 질기게 저항한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몽고에 이처럼 고분고분하게 순응할 수가 있느냐?

도대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그와 같은 물음에 충선왕이 이렇게 답했다.

“원은 저에게는 어머니의 나라요, 외할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남이라 할 수 없는데. 어찌 옛적 감정에 연연하오리까?”

충선왕의 답변에 쿠빌라이아가 매우 기꺼워하며 웃었다고 한다.

“껄껄껄. 맞구나. 맞는 말이로다.”

고려의 왕 중 그 시호에 충忠 자가 들어가는 왕은 죄다 원의 부마였다.

거란의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수장시키기도 했던 고려의 진취적이고 독자적인 행보는 몽골 침략이후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가 무너지고 새로이 조선이 한반도에 건국된 것은 몽고가 그 시발始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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