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99화 (99/247)

<-- 99 회: 4-14 -->

“한데. 자네가 말한 그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네.”

좌중에 서 있는 이들은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체. 시가전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막 입을 떼려고 하는데.

“자, 자.”

최우가 나보다 먼저 말하고 나섰다.

일순.

좌중의 모든 이목이 최우에게 쏠렸다.

최우는 부드러운 얼굴로 서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간 왜구들과 싸우면 적잖은 피해를 보았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 중에서 왜구들의 병술에 관해 이 사람처럼 속 시원히 설명해 준 이는 없었소이다.”

최우가 말하며 날 보았다.

빙그레.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최우의 미소에서 나에 대한 호의가 엿보였다.

난 고개를 까닥여 최우의 미소에 대해 화답했다.

최우는 시선을 돌려 좌중에 서 있는 이들을 보았다.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다른 공략법이 있다면 말해 보시구려. 내 들어보고 타당하다 싶으면 얼마든지 공략법을 바꿀 용의가 있으니.”

은근히 좌중에 서 있는 이들을 압박했다.

내가 내놓은 공략법 이상의 공략법을 내놓지 못하면 입 다물어라!

최우의 말에는 그런 의중이 담겨 있었다.

…….

좌중은 고요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눈동자를 굴려 좌우에 서 있는 다른 이들을 힐끔거렸다.

서로 눈치를 보았다.

‘큭.’

난 좌중에 서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하여간.’

남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자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늘 있기 마련이다.

‘일단은 이것으로 됐어. 최우가 저리 나온 이상 다른 자들은 뭐라 말할 수 없을 테니깐.’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서풍을 보았다.

인사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나와 거리를 두려는 눈치가 보여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속 시원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는 난감함을 느꼈다.

가능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개경에서 최우의 서녀와 혼인이 거론된 이후 은연중에 자꾸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옅고 작은 꺼림이라는 감정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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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바빴다.

이민호가 모종의 명령을 내려 남경으로 향했다. 그 때문에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

가병들 역시 바빴다.

이민호가 광주목으로 데리고 온 1,000여 명. 최우가 데리고 있는 즉각 싸울 수 있는 가병 300여 명. 서풍과 호족들이 데리고 온 가병 500여 명.

도합 1,800여 명이라는 병력은 최우를 통한 이민호의 명령에 어리둥절했다.

대동한 1,000 명은 이민호를 신뢰하는 까닭에 불평은 거의 없었으나, 최우가 데리고 있는 가병과 호족들이 데리고 온 가병들은 그들과 달랐다.

“이게 다 무슨 짓이냐고?”

“광주목에 있는 왜구들이 불과 300여 명이라며? 그 동안의 싸움으로 그 놈들도 죽거나 다쳤을 거 아냐?”

“수가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거야? 광주목에 있는 왜구 놈들이 300이라고 치자고. 그래도 우리 모두 합치면 1, 800이잖아. 거의 6배 차인데. 이게 다 무슨 짓인지 몰라.”

“그냥 확 밀고 들어가면 될 텐데. 왜 미적거리며 주변 산과 숲에서 굵고 긴 튼튼한 나무를 베어오라니.”

최우와 호족들의 가병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몇몇은 반발하려 했으나, 최우가 이민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탓에 별말 하지 못했다.

가병들의 불만을 대변하던 호족들을 최우가 가볍게 눌렀기 때문이다.

최우는 최양백의 당부를 십분 염두에 두고 이민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청주목에서 단시일 내에 왜구들을 별 피해 없이 섬멸한 것을 크게 상찬賞讚하며 이민호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다.

무엇보다도 희생을 최소화했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자신이 광주목에서 700이란 피해를 입은 것에 심중 적잖게 낙담한 까닭에 이민호에게 전권을 부여하다시피 했다.

무엇보다도 광주목을 자신이 점해야 동생 최향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터라, 다른 것은 제쳐두고 승리. 그 하나만 바라보았다.

그런 최우의 심중 한구석에 서서히 경계라는 작은 심마가 숨어들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수하는 늘 상급자의 불안 요소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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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와 함께 온 장인들은 밤늦도록 횃불을 피워놓고 석포를 만들기 바빴다.

청주목에서 사용하던 중소형 크기의 석포였다.

성인 남자 두어 길 높이를 상회하는 석포는 구조가 단순했다.

뒤에서 대여섯 명이 밧줄로 끌어내려 고장한 후, 돌이나 술동이를 올려놓고 튕기는 방식이었다.

하나, 이민호가 알고 있는 현대 지식이 적용된 까락에 동일한 고려의 석포와는 위력이나 사정거리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장인들은 기존의 석포 기술 외에 전혀 다른, 색다른 기술이 적용된 것에 큰 흥미와 충동을 느꼈다.

장인으로서의 기질이 자극받아, 가장 연장자인 노인 나식이 날 찾아와 제안했다.

“나리. 석포를 보다 크게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난 거절했다.

“안 됩니다. 크기가 크면 움직이는 데, 이동에 있어 장애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석포를 맡아야 하는 병력의 수가 많아지게 됩니다.”

“나리. 석포를 조금 더 크게 하면 지금보다 더 멀리, 더 큰 돌을 쏠 수 있는 뎁쇼.”

노인 나식은 만들고 싶은 강한 욕구를 내비쳤다.

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지금은 현재 만들고 있는 석포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식은 어리둥절했다.

“창날 말입니다.”

“아, 예. 급히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물이라 그리 튼튼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식은 우려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강도나 내구성보다는 생산성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만드는 장인들도 태부족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식은 말끝을 흐리며 궁금하다는 기색을 띠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손에 쥔 망치로 쇠를 두들겨 형태를 잡는 것을 단조鍛造라 한다.

제철 공학에서 단조란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필요한 형체를 만드는 것이다.

주물은 흔히 거푸집이란 형태에 쇳물을 부어 필요로 하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질이란 척도로 판단할 경우 단조가 좋다. 하지만 생산성을 감안하면 주물이 의외로 매력적이다.

단기간에 필요로 하는 양 만큼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장인들과 함께 석포를 비롯, 내가 생각하는 신 병기 아닌 신 병기에 매달렸다.

당장 만들어 써 먹을 수 있는 것 외에 장래를 염두에 두고 장기간에 걸쳐 연구, 개발해야 하는 병기를 장인들과 논의하였다.

따로 미리 묵에게 말을 해두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현재 우리와 함께 하는 장인들은 앞으로도 쭈욱 함께 가야 한다. 그러니 장인들을 각별히 살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최우선적으로 조달해주고 품삯도 넉넉히 챙겨주어라. 그리고 장인들에게 만약 무슨 작은 일이라도 있으면 재깍 내게 달려와 말해라. 우리가 가진 가장 크고 중한 재산은 바로 장인이라는 점을 단 한시도 잊지 마라!”

단단히 엄명을 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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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난 동원 가능한 모든 가병을 몽땅 주변 산과 숲으로 보내 나무를 벌목하게 하였다.

“길이는 세 길 이상, 굵기는 니들 손목 굵기의 2배.”

무조건 많이 나무를 베어오라 명했다.

처음에는 제법 가병들이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불평하는 가병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리. 대체 저희들이 왜 나무를 해 와야 합니까?”

“저희는 싸우러 왔습니다. 나무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병들의 불만이 적잖아, 난 고심했다.

불평하는 가병들에게 왜 나무를 해 와야 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불평하는 가병들을 군령으로 눌러, 날 무섭게 여기도록 만들어줄까?

전자가 매력적이긴 하다. 하지만 나중에 적과 아군 모두 적잖은 충격을 주어 내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인지도를 높이는 매력(?)적인 상항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

마음속으로 혼자 잠깐 고민하다 결정했다.

“이것들이!”

일부러 험한 인상을 썼다.

불평하는 가병들은 죄다 최우와 호족들의 가병들이었다.

즉, 지금 불평을 받아들이면 차후에 내가 그들을 지휘하는데 상당한 애로 사항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굴러온 돌이라고 할 수 있는 나다.

그런 내게 지휘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병들이 날 우습게 볼 경우 원활한 지위는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한 마디로 말해 최우와 호족들의 가병을 한 번쯤 휘어잡아, 기를 꺾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로 난 가병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내가 너희들에게 일일이 명령에 대해 설명해야 하느냐? 난, 너희들에 대한 모든 명령 및 지휘권을 최 부사 어른으로부터 위임받았다. 감히! 수하된 놈들이 지휘자에게 명령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 어디서! 상관이 내린 군령에 불평을 해.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불호령에 불평을 토로하던 가병들은 움찔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다들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눈치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난 달려와 면전에 서는, 날 따르는 예닐곱 명의 가병들에게 명했다.

“당장 이놈들을 끌고 가서 태형 20대를 쳐라. 죄명은 상관의 군령에 불복, 불평한 항명죄다.”

“네, 나리.”

예닐곱 명의 가병은 대답하며 내게 머리를 숙였다.

“히익.”

“나, 나리. 왜 이러십니까?”

“저희들이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내게 불만을 토로한 몇몇 가병은 예닐곱 명의 가병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훗.”

난 끌려가는 몇몇 가병을 보며 슬며시 실소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숙영지 외곽에서 떡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메아리쳤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아아악.”

“아퍼. 아프다고.”

한동안 숙영지가 꽤 시끄러웠다.

난 미처 몰랐다.

태형을 치라고 한 명령이 나와 지방 호족들 사이에 감정의 틈을 만들어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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