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97화 (9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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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목 곳곳에서 접전의 흔적이 물씬 풍겼다.

“으으.”

“끄, 끅.”

여기저기에서 고통이 배인 신음이 들렸다.

우람한 기와지붕이 돋보였던 가옥들은 무너지고 허물어져 황폐화되었다.

검은 연기들이 광주목 곳곳에서 쉼 없이 피어올랐다.

도처에 다친 왜구들이 즐비했다.

건장한 체구의, 고풍스런 갑주를 걸친 무장 미나토 타치바나는 호위병 역할을 하는 여덟 명의 료닌을 대동하고 광주목 곳곳을 돌아다녔다.

“괜찮으냐?”

타치바나는 다친 왜구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정성껏 하얀 천으로 상처를 감싸주며 다독였다.

“잠시만 고생하거라.”

“네에. 감사합니다. 타치바나님.”

료닌들은 평상시 제대로 얼굴도 쳐다보지 못할 타치바나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는 것에 크게 감복했다.

타치바나는 호위병들을 돌아보았다.

“의원들은 어찌 되었느냐?”

“네. 지금 광주목을 이 잡듯이 뒤져 찾고 있습니다.”

“다친 료닌들을 간병할 자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네. 지금 끌고 오는 중입니다.”

호위병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광주목에 있는 의원과 사람들이 다친 료닌들을 위해 강제로 끌려오고 있다는 것을 타치바나에게 알렸다.

타치바나는 고개를 바로 하며 다친 한 료닌을 보았다.

“곧 나을 테니. 잠시만 고생하게.”

“네, 타치바나님. 감사합니다.”

타치바나는 일어나며 조금 전 대답했던 호위병들의 우두머리를 쳐다보았다.

“양식을 아끼지 말고, 다친 료닌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타치바나님.”

예의 우두머리의 대답을 들으며 타치바나는 우측으로 돌아섰다.

묵묵히 걸어가는 타치바나의 얼굴에 근심아란 옅은 감정이 살며시 드리워졌다.

휘하에 있는 료닌은 300여 명이다.

광주목 밖에서 포위한 고려군은 파악하기로는 못해도 1천여 명에 육박했었다.

광주목 내부로 적을 끌어들여, 적 병력을 분산하여 방어 거점을 통해 상대했지만 희생은 불가피했다.

상당한 숫자의 사상자와 중, 경상자가 나와 가용 병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최대한 사상자와 중상자를 줄이고, 경상자를 급히 치료하여 전장에 다시 투입, 운용 병력을 최대한 높이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어, 난감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처지다.

걸어가는 타치바나의 주변으로 호위병들이 따라붙었다.

호위병들은 눈을 번득이며 주위를 엄중히 살폈다.

타치바나는 걸음을 떼며 섬기는 주군 요시미츠 다카요시의 명령을 생각했다.

‘최대한 버텨줘야 한다. 타치바나. 이번 출정의 성공 여부는 네가 광주목에서 얼마나 버텨주느냐? 에 달렸다.’

타치바나의 얼굴빛은 차츰 어두워졌다.

‘주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타치바나의 눈동자와 얼굴에 두려움이란 옅은 감정이 깔렸다.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타치바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도 알 수 없어 매우 답답했다.

‘주군. 지금 상태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제가 죽을 자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요시미츠 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길.’

타치바나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심중 죽을 각오를 다지며 충직하게 섬기는 주군 다카요시에게 충성을 다하려 하였다.

그것이 무사의 미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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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최우의 군막.

최우는 군막으로 들어서는 이민호를 보고는 무척 반가워했다.

“어서 오게.”

“그간 별래 무양하셨습니까? 부사 어른.”

난 정중하게 말하며 머리 숙여 인사했다.

“자, 이리로.”

최우는 군막 중앙에 있는 큼지막한 탁자로 날 이끌었다.

난 탁자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시종으로 보이는 묵이와 비슷한 또래가 들어와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고 군막을 나갔다.

난 최우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있는 곳이 전장이다 보니 주고받는 대화 역시 전장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최우는 광주목의 상황을 입에 올리며 골치 아프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아무리 꾀어내도 도통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네. 이끄는 가병을 반 넘게 교대로 광주목 내부로 들여보냈다가 큰 피해를 입고 말았네.”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싸울 수 있는 자가 겨우 300여 명에 불과하네.”

“네에!”

난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예상 밖의 피해다.

최우는 민망한 듯 얼굴빛을 흐리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네. 나 나름 한다고 하였으나 군병을 지휘하는 병학兵學에 서툴러 공연히 희생자만 많이 내고 말았네.”

말끝을 흘리는 것이 낯이 뜨거운 모양이다.

‘이런.’

여기서 최우를 궁지에 모는 듯한, 면박을 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난 재빨리 말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부사 어른의 책임이 아닙니다. 누가 가병들을 지휘하였다고 해도 그런 피해는 응당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반쯤은 진심이다.

시가전 개념 자체가 없는 고려에서 시가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술을 상대할만한 무장은 없으니깐.

최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가 지휘했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최우는 고갤 조금 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크게 낙담하여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그리 위로하지 않아도 되네. 난, 내가 지은 죄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일세.”

“잘못 생각하고 계신 듯 합니다.”

“응? 무슨 말인가?”

최우는 날 쳐다보며 반문했다.

“부사 어른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네. 지금 날 위로하고자 그리 말하는 것인가?”

최우는 성내려 하였다.

난 고개를 가로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그리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천천히 최우에게 왜 그렇게 많은 피해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 손을 들어 설명해주었다.

이리저리 손을 놀려, 광주목으로 다수의 가병이 들어가면, 각 방어 거점 때문에 크고 작은 여러 무리로 나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입에 올렸다.

“적은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 아측의 희생을 강요하는 병술兵術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공격하는 측은 공성전처럼 수비하는 측보다 적어도 5배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적의 병술에 그대로 녹아나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난 최대한 최우가 알기 쉽게 시가전을 풀어, 이해시키려했다.

최우는 이해한 듯 크게 놀란 기색을 띠었다.

“세상에 그런 병술도 있는가?”

“네. 제가 있던 대식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병술에 크게 당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패배가 뼈에 사무쳤던지, 그 장군이 죽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그 병술을 깨기 위한 새로운 병술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장성하여 전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적국에서 해당 병술로 공격해와, 아들이 부친이 남긴 파병술로 그 병술을 깨트려 부친의 오랜 한을 풀어준 닐이 있었습니다.”

내게 사기꾼 기질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그럴싸하게 시가전에 대처할 방법이 있음을 최우에게 넌지시 내비쳤다.

대번에 최우의 안색이 밝아졌다.

“오오. 다행이로세. 다행이야. 내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광주목을 깨트리나 적잖게 고심하고 있었거늘. 하하하. 내 이제야 알겠네. 양백이가 왜 그리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라 했는지. 내 이제야 알겠어. 하하하하하.”

난, 기뻐하는 최우의 말에 흠칫했다.

‘최양백.’

머리에 그 이름이 떠올라, 황급히 최우에게 물었다.

“부사 어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에게 서간을 보낸 것이 그럼.”

최우는 내 물음에 웃음을 멈추고 날 보았다.

“몰랐던 모양이로군.”

슬쩍 잔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난 일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최우가 그간의 자조지정을 언급했다.

“실은…….”

최양백과 김인준이 번갈아가며 적잖은 수의 가병들을 데리고 광주목으로 들어가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한다.

그 과정에서 김인준이 큰 중상을 입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최양백 또한 교전 도중에 다쳐 지금 위중한 상태에 놓여 있다.

최양백이 병문안을 온 최우에게 간곡히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라 하였단다.

달리 길이 없던 최우는 부랴부랴 전령을 내게 보냈다.

“하면. 두 사람이 다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그 말씀이십니까?”

난 크게 놀라 반문했다.

“휴. 그렇다네. 남경에서 제일 용하다하여 데려온 의원의 말은 며칠 넘기기가 어렵다고 하네.”

최우는 말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뜨악!

난 속으로 기절초풍할 듯 크게 놀랐다.

‘맙소사!’

뭔가 크게 틀어졌다.

지금은 김인준과 최양백이 죽을 때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내가 아는 향후의 역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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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의 임종 직전, 모든 권력을 거의 다 손에 쥔 김인준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최양백이 김인준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최우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후의 우봉 최 씨 가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딸까지 내친 탓에 사실상 최 씨 정권은 끝장이 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두 아들 만종, 만전이 있지만 김인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우의 선택은 대세에 순응하여 김인준. 즉, 김준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넘기고. 아들 최항을 명목상 수장으로 한 최 씨 정권의 연장이었다. 하여, 애첩 안심을 김준에게 하사 형식을 빌려 내준다.

김준이 애첩 안심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그렇게 함으로서 김준을 최 씨 정권하에 묶어두는 패로서 애첩 안심을 이용했다.

이후, 김준은 최항을 허수아비로 만들며 모든 정권을 장악, 새로운 고려의 집권자로 부상하게 된다.

최향의 사후, 최양백이 우봉 최 씨 가문과 최 씨 정권의 연장을 위해 오랜 친우인 김준과 목숨을 건 권력 투쟁을 벌인다.

최우의 손자 최의를 집권자에 올리려 동분서주 하는 사이, 김준은 재빨리 유송비와 송준길을 비롯한 최 씨 정권하에서의 실력자들을 포섭 및 회유하여 굳건한 세勢를 다졌다.

또한 전격적으로 삼별초를 중심으로 무장 봉기하여 사실상 최 씨 정권을 무너뜨린다.

그 과정에서 김준에게 최양백이 목숨을 잃는다. 물론 최의도.

김준이 고려의 집권자로 부상하는 시기가 사실상 고려 무신 정권 말로, 이후 권력은 잠시 고려 황실로 갔다가 원에 충성하는 문벌 귀족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문벌 귀족이 바로 기 황후의 친정인 기 씨 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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