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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씨 부인은 호감을, 김 씨 부인은 강한 거부감을, 이세연은 뭔가 모를 들뜸을.
남자라고는 난 혼자다.
상대는 세 여인이고.
밥상인지 술상인지 정체가 매우 애매모호한 상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 영 아닌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지 몰라.’
현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내게 이런 자리는 별 대수롭지 않지만, 세 여인은 어떨지 모르겠다.
‘에이. 설마 조선 시대처럼 무슨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그런 것은 없겠지. 있다면 이런 자리가 말이 안 되잖아,’
고려 시대가 조선 시대보다는 여러모로 자유로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조선 시대는 유교로 인해 남녀 사이가 엄격히 통제받았지만, 고려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조선 시대에 이혼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이혼이 가능했다.
게다가 과부의 개가도 허용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최우의 후처 대 씨 부인이다.
혼인하여 현대로 따지면 청소년인 아들이 있는 과부로서 최우와 혼인하였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자세를 고친 다음, 탁자에 빈 잔을 놓자.
“한 잔 더 하시게.”
기다렸다는 듯이 오 씨 부인이 말하고 나섰다.
“아, 아닙…….”
내가 미처 다 말하기도 전에.
“뭐 하느냐? 한 잔 더 쳐 주지 않고서.”
오 씨 부인이 손자며느리인 이세연을 채근했다.
“네. 할머님.”
이세연은 얼굴을 살포시 붉히며 그새 놓인 술병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헐.’
난 황당함에 오 씨 부인을 쳐다보았다.
“저기…….”
“부담 갖지 말고 드시게. 다 같은 집안 식구 아닌가?”
“그래도.”
“받으세요.”
내가 대답하는데 이세연이 말하며 술병을 내밀었다.
슥.
난 이세연과 오 씨 부인 그리고 김 씨 부인을 번갈아보았다.
‘뭔가 있어!’
확실히 이상해.
“어서 받게.”
난 오 씨 부인의 채근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예에.”
난 심중 의문을 느끼며 빈 잔을 들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술을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내, 내가 이렇게 술이 약했나?’
필름이 나가버렸다.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탁자에 그만 엎어지고 말았다.
와장창.
그 때문에 탁자에 있던 그릇들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어졌다.
자잘한 파편이 방 여기저기로 튀었다.
흐릿한 의식 사이로 김 씨 부인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들렸다.
“어머님. 이건 아니에요.”
“어허어어어.”
오 씨 부인이 며느리인 이 씨 부인을 크게 나무라는 소리를 끝으로 난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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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내 몸은 경이로울 정도로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그 탓에 난 빠르게 술에서 깼다.
누구의 방인지는 모르겠다.
푹신한 비단 요가 깔린 침상에 누운 채 의식이 돌아왔다.
일반 양민은 방바닥 생활을 하지만 상류층은 침상에서 생활하는 고려 특유의 양식이 그대로 반영된 방은 정갈했다.
반쯤 엎드린 자세로 누워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을 가다듬었다.
바로 그 때.
드륵.
방문이 열리면 한 여인이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누구?’
난 가늘게 눈을 뜨며 들어서는 여인을 흘낏거렸다.
‘흑.’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가슴까지 오는 긴 장옷을 걸치고 소매가 풍성한 옷을 입은 여인은 이세연이었다.
이세연은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린 궁장을 하고, 몸에는 전형적인 고려 여인의 옷을 입었다.
상체에 비해 하의가 길고, 소매가 넓으며, 몇 가지 화사한 문양으로 입은 옷을 장식했다.
‘왜?’
난 이유를 몰라 심중 큰 혼란을 느꼈다.
비록 일가라고 하나 촌수로 따지면 적잖은 차이가 나는 내 방에 이가의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다니.
이세연은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걸어왔다.
사르르.
긴 장옷을 걸친 탓에 늘어뜨려진 옷자락 끝이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난 급히 자는 척하며 온 신경을 침상으로 걸어오는 이세연에게 모았다.
최대한 소리 죽인,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렸다.
꿀꺽.
부지불식간에 이는 옅은 긴장감에 속으로 침을 삼켰다.
그 사이.
이세연이 침상에 이르렀다.
‘뭐야!’
난 속으로 투덜댔다.
난감해도 이만저만 난감한 것이 아니다. 눈을 떠야 할지, 이대로 잠이 든 척을 계속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아니 뭔 여자가 남자가 자는 방에 혼자 들어와서 뭘 어쩌겠다고.’
이유를 모르겠다.
‘설마?’
난 머리에 떠오른 상념에 마음속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미친!’
남편 이문홍이 죽은지 며칠이 안 된 여자다. 과부긴 하지만.
‘아닐 거야. 그런 건 말도 안 돼!’
난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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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연은 잠시 침상에 누워 있는 이민호를 내려다보며 갈등의 얼굴빛을 띠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세연의 마음속에서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중의 감정이 갈팡질팡하듯 혼미했다. 머릿속에 죽은 남편 이문홍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애하듯 서로 좋아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가문 대 가문의 결합으로 웃어른들이 주선하여 부부가 되었다.
자신에게 잘해주었다.
그런 남편이 죽은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세연은 외간 남자라면 남자라고 할 수 있는 이민호가 있는 방에 들어온 것에 죄책감과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파르르.
눈꺼풀이 심하게 위아래로 떨렸다.
이건 아니야.
마음속에서 그런 외침이 들리는 듯, 이세연은 환청에 멈칫거렸다.
강한 거부라는 감정이 이는 순간.
‘내가 택할 것은 둘 중 하나다.’
머릿속에서 시조모 오 씨 부인의 당부 아닌 당부가 떠올라 가만히 맴돌았다.
시모 이 씨 부인과 적잖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시조모 오 씨 부인이 말하기를.
‘남편을 잃은 네가 남은 평생을 홀로 사는 것을 이 할미는 원치 않는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 다시 개가하는 것이 흉이 아니니…… 네 삶이니 네가 선택하도록 해라. 이대로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지, 아니면 새 남편으로 그 아이를 택해 우리 이가의 사람으로 남아, 남은 생을 살아갈지.’
시조모 오 씨 부인의 그와 같은 결정에 시모 이 씨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다.
“어찌 둘째가 죽은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며느리로 하여금 다른 남자에게 일신一身을 의탁하라.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정말 너무 하십니다. 어머님.”
시조모 오 씨 부인은 시모 이 씨 부인을 엄히 꾸짖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 아이를 평생 홀로 살게 할 참이냐? 어차피 정을 떼야 할 아이임을 네 몰라. 이리 말하느냐? 정을 뗄 것 같으면 일찌감치 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법.”
“어머님!”
시모 이 씨 부인은 시조모 오 씨 부인에게 강하게 불만을 피력했다.
오 씨 부인은 단호했다.
“전날 세존이 그 아이가 여주 서가에서 돌아와…… 그 아이에게 우리 일가 아이를 붙여 서로 부부지연을 맺게 하여 우리 서가의 가솔로 받아들이기로 하였었다. 한데 불운하여 세존이와 문홍이가 그리 되고 말았다. 내 듣자니 그 아이가 상국 합하의 가병을 거느렸다 하니 이는…… 세존이가 없는 우리 서가의 앞날을 위해서는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둘째 아이를 그 아이와 짝을 지어 가문의 후대를 도모코자 하는 내 마음을 네 정녕 몰라 이리 반대하는 것이냐?”
시모 이 씨 부인은 시조모 오 씨 부인의 그와 같은 질타에 며 몇 번 항변하다, 종국에는 입을 다물며 머리를 숙이고 말았었다.
“하아아아.”
이세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친정으로 돌아가면 다들 왜구에게 몸을 버려 시댁에서 내쫓김을 받았다.
그리 여길지도 모른다.
친정에서 과연 자신을 받아줄지도 알 수 없다. 설혹 받아준다고 해도 다시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하다.
십중팔구는 인생이 크게 바뀔 것이 틀림없다.
졸은 방향보다는 안 좋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또한 친정에도 적잖은 유무형의 부담을 줄 수 있다. 개가하는 여인에게 적잖은 지참금을 딸려 보내야 하니깐.
‘남편을 잃은 여인이란…….’
이세연은 서글펐다.
이가에 남아 있고자 하였으니 시조모가 감당하기 어려운 명 아닌 명을 내리니.
그 명에 시모까지 머리를 숙이고 말았으니. 자신의 입지가 좁아듦이 눈에 훤히 보였다.
‘휴우우우우.’
머릿속에서 시조모 오 씨 부인의 말이 다시금 맴돌았다.
‘내가 택할 것은 둘 중 하나다.’
시조모 오 씨 부인이 노리는 바는 시부 이세존과 남편 이문홍 등 다수가 죽음으로서 크게 기운 이가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발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