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회: 4-5 -->
@
난 오 씨 부인과 김 씨 부인, 두 여인과 탁자에 앉아 잠시 정담을 나눴다.
“군무가 있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정담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자 넌지시 자리를 뜰 명분을 세우며, 데리고 온 여인들에 관해 설명했다.
“달리 둘 곳이 없어 데리고 왔습니다. 다들 혈기 왕성한 사내들이라 불민한 일이 생길까? 우려도 되고, 여인들을 데리고 왜구들과 싸울 수도 없어 부득불 …… 여인들이 생활하는데…… 매달 정기적으로…… 가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묵에게 달리 백금을 챙기라 하였다. 그 백금이 예물 중에 있음을 언급하며 도움을 청하는 형식을 띠었다.
가능한 두 여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부쩍 썼다.
“자네 마음은 알겠으나 우리도.”
아니나 다를까?
김 씨 부인이 반대하고 나섰다. 어렵다는 속내를 내비치자, 옆에 앉은 오 씨 부인이 말하고 나섰다.
“에미야. 불쌍한 여인들이 아니더냐? 이 사람은 우리 이가의 혈손인데. 어찌 모른 척 하겠느냐?”
“어머님.”
김 씨 부인이 시어머니인 오 씨 부인을 돌아보았다.
오 씨 부인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레절레.
김 씨 부인은 오 씨 부인의 고갯짓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난 무슨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무안했다.
‘이거 참.’
하긴.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입은 집안에 덜컥 군식구들을 맡겼으니. 그것도 죄다 여자들이니 난감해할 만도 하다.
그 사이 오 씨 부인은 고개를 방문으로 돌렸다.
“밖에 누가 있느냐?”
“네에. 할머님. 저 세연입니다.”
문밖에서 대답하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족보를 가져오고, 사당을 깨끗하게 청소해 두어라. 그리고 조촐하나마 상도 보고.”
“예에.”
밖에서 다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흠칫하며 서둘러 오 씨 부인을 보았다.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오 씨 부인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겐가? 비록 경황 중이긴 하나 자넨 분명 우리 이가의 식솔일세. 하니, 온 김에 본가의 족보에 이름도 올리고, 응당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도리일세.”
오 씨 부인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는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난 순간 당황했다.
‘어?’
말이야 맞는 말이다. 게다가 오 씨 부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명분에서 내가 밀렸다.
‘이 할머니가 의외로 고단수네. 허어.’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을 아주 가볍게 지르밟아주신다.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오 씨 부인이다. 그런데 오 씨 부인 왼쪽에 앉아 있는 김 씨 부인이 날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이해되지 않아, 난 어안이 벙벙했다.
@
내가 촌수로 죽은 이세존의 먼 조카뻘이었다.
족보에 이름과 간략한 이력을 쓰고, 곧바로 후원에 있는 사당으로 가 향을 피웠다.
경황 중이라 간소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사당에 이가 식솔로서 인사드리는 일련의 행사 아닌 행사가 이루어지는 주변에 이가에 남아 있는 이들이 대거 모였다.
젊은 사람은 서너 명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여인이 날 뚫어지게 보면 알게 모르게 내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에 유독 신경 쓰여 나도 모르게 여인을 힐끔거리고 말았다.
‘누구지. 왜 자꾸 날 봐?’
의아했다.
‘이크!’
좌측에 서 있는 이 씨 부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흘겨보았다.
‘윽.’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상당히 적대적이라 난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오늘 생전 처음 만났는데.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사당에 인사한 후 돌아가려는 날 오 씨 부인이 잡았다.
“하루 밤 자고 가게. 가문의 혈손이 돌아왔는데 밥 한 끼 먹여 보내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이가가 야박하다 할 게야.”
“아닙니다. 군무를 단 한 시도.”
난 핑계를 대며 빨리 이가를 벗어나려 했다.
“아니네. 이리 떠나는 경우는 없네. 오늘 밤 예서 묵고 가시게나. 내 자네에게 따로 할 말도 있으니.”
“네?”
난 당혹스러워 반문했다.
오 씨 부인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졸지에 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돌겠네.’
말발에서 당할 수가 없다.
오 씨 부인에게 농락당하는 듯한, 손바닥 위에서 내가 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능한 앞으로 이가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이가와 거리를 둘 필요를 느꼈다. 결국 그 날 밤 나는 이가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
밤늦도록 잔치 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왜구에게 큰 피해를 당한 집안에서 어떻게 이렇게 술과 음식을 장만했는지 모르겠다.
황곤과 묵 그리고 함께 온 가병들과 여인들은 이가가 마련한 술과 음식에 포식했다.
나는 오 씨 부인, 김 씨 부인, 그리고 사당에서 유독 날 보았던 이 씨 부인과 함께 저녁을 같이 했다.
“다 같은 일가인데. 무에 내외를 하겠는가?”
꺼리는 내게 오 씨 부인이 그렇게 대꾸했다.
이세연.
경주 이 씨로 죽은 이세존의 둘째 며느리라고 한다. 상당히 미인이었다.
스물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청초한 미가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눈이 여느 여인들보다 예뻤다.
‘서혜와 최송이와는 다른 느낌인데.’
나도 모르게 내가 알고 있는 두 여인과 이세연을 비교하고 말았다.
서혜가 장미라면 최송이는 국화였다. 이세연은 수선화 같다고나 할까?
큰 아들 내외는 처가에 가 있다고 했다.
이세존과 차자가 소수의 몇몇 가병과 함께 가문을 지키겠다고, 약탈 나온 왜구들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단다.
왜구들이 그 보복으로 이가에 막심한 피해를 안겼다고 한다.
다행히 이세존을 비롯 가병들이 왜구들과 싸우는 사이, 여인들은 주변 산으로 달아나 무사할 수 있었다고 오 씨 부인이 전후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세존이 그 아이와 문홍이가.”
오 씨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기야 아들과 손자를 비롯한 가솔들을 왜구들에게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더욱이 자신과 며느리를 비롯, 가문의 여인들이 그 사이 도망쳤으니. 죄책감이 꽤나 깊을 것이다.
“한 잔 하시게.”
눈을 훔치던 오 씨 부인이 내게 술을 권했다.
“아, 예.”
내가 대답하는 사이, 오 씨 부인은 이세연을 쳐다보았다.
“뭘 하느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우리 일가인데. 어서 술을 쳐주지 않고서.”
“아, 네에. 할머님.”
이세연은 멈칫거리더니 공손히 대답했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띠는가 싶더니, 탁자에 놓여 있는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때.
“어머님!”
이세연의 시모이자 오 씨 부인의 며느리인 이세존의 처 김 씨 부인이 말하고 나섰다.
힘주어 말하며 안색을 흐리는 것이 뭔가 좀 이상하다.
“어허!”
오 씨 부인은 왼쪽에 앉은 김 씨 부인을 돌아보며 나무랐다.
역정의 얼굴빛을 띠었다.
김 씨 부인은 잔떨림을 흘리며 얼굴을 굳혔다.
가만히 입술을 꼬옥 깨물며, 은근히 날 쏘아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대체 뭐야? 왜 저래?’
난 심중 의문을 느꼈다.
그 사이.
이세연이 술병을 들며 날 보았다.
“받으세요.”
“아, 예에.”
나는 귀에 들린 이세연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앞에 놓인 빈 잔을 들었다.
쪼르르.
잔에 술이 찼다.
난 술병을 내려놓는 이세연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후, 오 씨 부인과 김 씨 부인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무언의 양해를 구했다.
오 씨 부인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갤 까닥였다.
난 우측으로 돌아앉으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쭈우우.
고개를 젖혀 술잔을 비웠다.
그런 나를 오 씨 부인, 김 씨 부인, 이세연이 각기 다른 표정과 시선으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