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89화 (89/247)

<-- 89 회: 4-4 -->

@

난처한 문제가 셋 생겼다.

첫째는 당장 청주목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왜구 놈들이 데리고 있었는 여남은 명의 여자들이다. 다들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단다.

“이미 몸을 더럽혀 이혼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왜구에게 당한 여자를 받아주겠습니까? 나리.”

묵이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여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셋째는 내 본가라 할 수 있는 청주목 인근에 있는 이가다.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입어 가문의 수장 이세존을 비롯한 다수의 이들이 죽었다. 아울러 왜구들 때문에 가문의 존립이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무사히 피난을 가긴 갔다는데.

“나리. 본가이신데 한 번 가 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묵이 놈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안 가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가서 뭘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도 않고.

처치곤란도 이런 처치곤란이 없다.

‘만약에 이가의 맥이 끊기면.’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에 난 모골이 송연했다.

나는 분명 이가를 본관으로 하는 먼 후손이다. 자칫 지금의 피해로 이후의 이가 자손들이 사라진다면.

그럼 나도…….

그런 불안 때문인지 밤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내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점을 감안하면 어떻하든 이가의 맥을 이어둬야 할 것 같은데.

그런 한편으로 이세존을 비롯한 이들이 죽어 내가 미래에서 온 이가의 자손이라는 점을 감출 수 있을 것도 같아, 앞으로도 이가의 식솔로 위장할 수 있을 것 같아, 저어기 안심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그 분들은 내게는 먼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인데.

쩝.

@

난 탁자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세 상인을 보았다. 우측에는 묵이가 앉아 내 눈치를 보았다.

“이 아이가 모든 거래를 맡을 것입니다.”

난 말하며 눈짓으로 묵을 가리켰다.

묵이를 키울 생각이다. 상인으로서의 소질이 있어 보이니깐. 잘 키워 나중에 확 잡아먹어야지.

‘크크크크.’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세 상인은 흠칫흠칫거리며 묵을 보았다.

꺼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제 17, 8쯤 되어 보이는 묵이가 자신들의 상거래 상대라는 것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난 태연하게,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세 상인을 보았다.

“나리.”

“나이가 조옴.”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세 상인이 날 쳐다보았다.

다들 내 신색神色을 살피며, 묵이와 거래하기 어렵다는 속내를 살며시 내비쳤다.

“내가 지켜볼 것 입니다.”

세 상인은 움찔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려 서로 쳐다보았다. 무언의 눈짓이 오갔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후후. 난 손해 볼 것 없으니깐.’

까짓 개경으로 몽땅 올려 보내버려도 무방하다. 나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

최우에게 생색을 낼 수 있고,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는데 내게 상을 안 내릴 리 없으니깐 말이다.

조금 께름칙한 것은 가병들과 혹두가 이끄는 뒷골목 인간들에게 보너스(?)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최충헌의 집사 이호에게 건네받은 백금 3천 냥 중 남은 것을 몽땅 다 털면 기존에 약속했던, 주기로 한 것은 줄 수 있다.

내가 빈털터리가 돼서 탈이지만.

슬쩍 우측에 앉은 묵을 보았다.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얼굴이 굳어 있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빠르게 오르내리는 것이 연방 마른침을 삼키는 눈치다.

은연중에 날 힐긋거리는 것이 심중 꽤나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큭큭.’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장사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하나둘 경험이 쌓이면 나중에는 큰 상인이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묵이에게 장사에 대한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고려 상계를 좌지우지하는 큰 상인이 될 것이고, 내게 돈을 갖다 바치는 봉이 될 테니깐 말이다.

내가 훗날을 생각하는 동안, 세 상인이 지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지, 고개를 돌려 나직이 대화했다.

그런 후, 날 보며 고갤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리께서 지켜보신다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시작하지.”

거래를 최대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난 일부러 말을 놓아, 세 상인보다 내가 위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

거래는 조금 불만족스럽지만 원활하게 끝났다. 의외로 묵이 제법 잘했다.

세 상인이 나간 후, 묵에게 지시했다.

“가병들과 뒷골목 사람들에게 애초 약속한 것을 지급해줘라.”

“네. 나리.”

“그리고 남은 돈은 따로 10냥, 50냥, 100냥 단위로 전낭을 만들어두고.”

“네?”

묵은 어리둥절했다.

난 툭 말을 던졌다.

“나중에 다 쓸데가 있어.”

“아, 예에.”

“그리고 내일 본가를 갈 테니. 미리 사람을 보내 전갈을 해두고, 진중에 있는 여자들도 함께 갈 수 있도록…… 적당한 예물도 준비해둬라.”

“네. 나리.”

묵이 대답한 후 돌아갔다.

“후우.”

난 길게 숨을 내쉬며 다리를 들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상체를 뒤젖히자 앉은 의자가 천천히 뒤로 기울어졌다.

“이곳 고려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면.”

눈을 반짝이며 머릿속으로 향후를 생각했다. 이왕이면 크게 노는 것이 좋지 않은가?

“쿡쿡. 까짓 왕 한 번 해봐.”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니지 이왕이면 칭기즈칸을 능가하는 일대 영웅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중얼거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맘대로 한 번 멋들어지게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

“끄아아악.”

비명이 메아리쳤다.

최양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있는 몇 명의 십인장이 당황했다.

별 문제 없이 수월하게 성벽을 넘었다. 곧장 광주목 내로 진입한 것이 불과 이각二刻 전이다.

가병들이 광주목 곳곳으로 흩어져 왜구들을 뒤쫓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령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다들 자신에게 와서 하는 말이.

“기습입니다.”

“지원을 해 주십시오.”

“포위당했습니다.”

그 말을 입증하듯 주변에서 비명들이 끊이지 않고 들렸다.

“끄아아아악.”

“으아악.”

최양백은 전황 戰況파악이 되지 않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십인 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나토 타치바나가 쳐놓은 덫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기어들어왔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이가.

고풍스러운 정경이 곳곳에 배어 있는 중소 규모의 장원은 멋스러웠다.

왜구에게 크게 당한 듯 곳곳에 타다만 잔해가 남아 있었다. 담은 허물어져, 너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집안 곳간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잿더미만이 그득 남아 있었다.

아주 제대로 당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대부분 피난 갔다고 하더니 날 마중 나온 이들은 소수였다.

어이없게도 대부분 늙은 노인들이었다.

난 이가의 대문 앞에 말을 세우고 안장에서 내렸다.

대동한 황곤과 묵을 비롯한 10여 명의 가병이 재빨리 내려, 후미에 있는 끌고 온 몇몇 대의 수레로 향했다.

그 중 두 대의 수레에 예의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묵이 놈이 예물을 준비하라고 했더니 아주 바리바리 실었다. 내심 아까웠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 없어 속으로 끙끙거렸다.

‘저게 다 얼마야.’

묵이 녀석이 보기보다 손이 큰 것 같다. 단속 좀 해 둬야지.

대문을 등지고 선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입은 옷이 비싸 보이는 노파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민호라고 합니다. 일전에 작고하신 이세존 어른을 통해…… 인사를 드리러 왔어야 했는데. 그만 이리 늦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말하며 땅에 닿도록 머리를 깊이 숙였다.

“반갑네. 세존이에게 말을 들었네. 난. 세존이의 어미가 되는…… 내 옆에 있는 이는 세존이와 부부의 연을 맺은…….”

이세존의 모친 나주 오 씨, 이세존의 부인인 예천 김 씨 부인 등.

머리를 들어 내 일가라 할 수 있는 이들과 인사했다.

환대 받았다.

이가 내로 들어가자, 없는 살림에 무리한 흔적이 역력한 잔칫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부담스러운데.’

그 사이 황곤과 묵이 예물을 집안으로 들였다. 늙은 남녀 종들이 그들을 거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