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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이 이상했다.
머리 숙인 유송절은 전장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무장인 탓에, 자신에게 열과 성을 다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최측근이기에, 어느 정도는 허용(?)하고 있었다.
“흠.”
최향은 낮은 외마디를 흘렸다.
유송절은 귀에 들린 최향의 외마디에 머리를 들어, 사견 私見을 피력했다.
“주군. 어차피 여강을 건너려면 배를 수배하여야 합니다. 게다가 1천여 명의 가병이 여강을 건너려면 적잖은 시각이 소요되니. 이참에 가병들에게 잠시 쉴 말미를 주시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사료됩니다.”
“참. 그러고 보니 내 잊고 있었구만. 그래. 배를 알아보라한 것은 어찌 되었는가?”
유송절은 최향의 물음에 일순 난색의 얼굴빛을 띠었다.
‘이런.’
기실 가병들에게 쉴 수 있는 휴식을 주자는 것은 배를 구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하는 잔 수였다. 그런데 최향이 뜻밖에도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틈(?)을 찔러, 유송절은 내심 당황했다.
유송절은 조심스레 최향의 안색을 살피며 대답했다.
“실은 왜구가 충주목 인근의 여강에서…… 배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유송절은 말끝을 흐리며 배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밝혔다.
대번에 최향의 낯빛이 변했다.
“자네!”
언성이 높았다.
유송절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주군.”
속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내가 몇 번씩이나 머리를 숙이는 건지.’
유송절 심중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
최향은 머리 숙인 유송절을 노려보며 목청을 돋웠다.
“아무리 왜구의 배가 여강을 오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사치들의 배는 있을 것이 아닌가?”
여강은 광주목과 남경, 나아가 벽란도와 황도 개경으로 이어지는 수운의 요충이라, 평소에 상선이 자주 오간다.
그와 같은 최향의 지적에 유송절은 머리를 들어 자신이 알아본 바를 자세히 설명했다.
“주군. 여강에 왜구의 배가 나타났다는…… 여강을 오가는 배들은 너나없이 왜구의 배에 공격받아…… 죄다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나마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사공마저.”
죄다 왜구를 피해 도망치거나 피난 갔다. 배도 배지만 배를 움직이는 사공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 등등.
유송절은 몇 가지 이유를 입에 올리며 최향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익!”
최향은 성냈다.
마음 같아서는 앉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유송절에게 뭐라 한 소리하고 싶었다.
하나, 유송절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최측근이라는 점을 감안했다.
유송절은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과 함께, 자신을 추종하는 군부 지지 세력의 기반이 되는 까닭에 내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부친 최충헌의 후계자로서 권력을 넘겨받기 전까지, 이후 충분한 권력 기반을 다지기 전까지는 함께 손을 잡고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최향은 그 점을 감안해, 치솟는 화기를 눌렀다.
말없이 유송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가 보통 매서운 것이 아니었다.
유송절은 움칫거리며 시선을 숙여 앉은 탁자를 보았다. 민망하고 어색해 차마 최향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최향은 이민호가 염려했던, 피하려 했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맡은 충주목이 광주목이나 청주목에 비해 멀다는 것에 연연해 무리수를 둔 결과가 예상 외로 적잖은 장애 요인들을 유발했다.
그럼에도 최향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왜구들을 경시하는 오만이라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
어서 빨리 충주목으로 가, 단번에 왜구들을 쓸어버리려는 강한 욕구에 찼다.
빨리 전공을 세워 자신이 형 최우의 머리 위에 있음을, 자신이 온당하고 적법한 후계자라는 것을 부친 최충헌에게 보이려하였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간단한 말이 가진 의미조차 되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최향은 냉철함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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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퍼퍼퍽.
수십여 명의 가병이 사로잡아 포박한, 야스하루를 비롯한 28여 명의 왜구들을 무참히 두들겨 팼다.
“죄 죽여 버려.”
“이런 개상놈의 시끼들은 무조건 다 죽여야 해.”
“이놈들 때문에 우리 고려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어.”
기병들은 왜구들에게 분노와 증오를 쏟아냈다.
왜구들은 고려 말을 모르는 탓에, 굵은 줄에 꽁꽁 묶인 터라, 속절없이 맞기만 했다.
어떻게 할 수 없어, 가병들이 패면 왜구들은 그대로 얻어맞으며 비명만 질러댔다.
“으아아악.”
“크악.”
왜구들은 몸을 모로 땅바닥에 뉘고 새우처럼 말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최대한 고통을 덜려했다. 죄다 줄로 서로 이어져 있어 한두 사람에 땅에 몸을 뉘자, 다른 이들 역시 땅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도우가 이놈들 때문에 다쳤잖아.”
“맹포는 어떻고?”
가병들은 다들 크게 화냈다.
전장에서 희생자,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이번 공성전에서 사상자가 3, 중상자 6, 경상자가 11명이 나왔다.
그런 이유로 가병들은 사로잡은 28명의 왜구들에게 분풀이를 하려 하였다.
그것을 그 누구도 막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한다고 말하며 부추겼다.
“아예 죽여 버려.”
“이놈들 먹일 쌀도 아까워.”
“아주 아작을 내버려.”
동료 가병들은 왜구들을 두들겨 패는 몇몇 가병에게 그렇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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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묵이와 전장 정리를 위해 이곳저곳 살피다가 난데없는 다수의 비명에 놀라 뛰었다.
그런 내 눈에 가병들이 왜구들을 집단 폭행하는 광경이 보였다.
“멈춰어어어!”
난 크게 고함치며 가병들을 향해 황급히 내달렸다.
“나리.”
묵이 날 부르며 뒤따라 달렸다.
내 고함에 가병들이 흠칫흠칫거리며 왜구들을 두들겨 패던 일련의 행동을 멈췄다.
다들 날 돌아보며 어리둥절했다.
“이 자식들아. 멈추란 말이야.”
난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왜구들의 몸에 상처가 생길까? 퍼런 멍이 생길까? 염려했다.
내게 얼마나 소중한(?) 놈들인데.
2 장
당황!
28명의 왜구를 두들겨 패던 몇몇 가병들은 물론 묵이까지 죄다 그 감정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난 땅바닥에 모로 쓰러진 28명의 왜구와 가병들을 번갈아보며 일장 훈시했다.
“마아아! 분풀이하려면 몽땅 다 죽여. 그게 속이 확 풀리잖아. 안 그래.”
“나, 나리.”
가병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속내를 얼굴에 띄웠다.
난 눈을 부라렸다.
“저 세키들을 죽이면 속이야 시원하게 풀리겠지. 그런데 죽은 시체들은 어떻게 할 거야.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이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알아 몰라. 힘들게, 땀 뻘뻘 흘려가며 질질 끌고 가서, 역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땅을 깊이 파서 죽은 왜구 놈들 시신을 파묻어야겠지. 안 그래.”
“…….”
“그럼. 니들이 얻는 게 뭐야? 뭐냐고?”
난 목청을 돋웠다.
가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돌려 서 있는 동료의 얼굴을 보았다.
묵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괴변을 늘어놓으시려고?’
불안, 불안하다.
우려대로였다.
귀에 들리는 이민호의 외침은 황당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얻는 게 없잖아. 이 자식들아. 힘 써. 용도 써. 땀 흘려. 비싼 밥 먹고 귀찮고 힘든 일을 해, 손에 쥐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헛짓을 왜 해. 이 자식들아.”
“…….”
“하려면 뭔가 손에 쥐는, 좀 생산적인 일을 해. 저 세키들을 팔면 두당 못해도 백금 다섯 냥은 나와.”
난 가병들에게 고함치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포로로 잡은 왜구들은 지금 당장 손에 검이나 창을 쥐어주고 전장에 세우면, 싸울 수 있는 몸값이 아주 비싼 놈들이다.
현재 중원은 남송과 금 그리고 몽고로 인해 전쟁이라는 혼란이 극심하다.
노예로 왜구들을 팔아버리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왜구들을 그냥 죽여 버리면 아무 것도 손에 쥐는 것이 없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먹이고, 몸에 상처가 없어야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 상인들이 더 값을 쳐준다. 그럼, 가병들에게 쌀 한 되라도 더 손에 쥐어줄 수 있다.
굳이 우리 손으로 왜구들을 죽이지 않더라도, 중원의 전장에서 다른 놈들 손에 어차피 뒈진다.
난 그 점을 가병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허어어어얼!
가병들은 죄다 그런 속내를 얼굴에 나타냈다.
얼빠진 듯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왜구를 팔아먹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태연히 하는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뜨악!
묵은 이민호를 바라보며 그런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을 잃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이민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전리품을 삥 치겠다는 것도 모자라 이젠 포로로 잡은 왜구들을 개경으로 보내지 않고 그냥 팔아먹겠다니.
사람을 무슨 물건으로 여기는 이민호가 과연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묵은 허무맹랑해 이민호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