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83화 (83/247)

<-- 83 회: 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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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걸으며 줄을 선 가병들을 둘러보았다.

“왜 떫어.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나리.”

“먼저 드십시오.”

가병들은 날 대하며 쩔쩔맸다.

난 장난스레 웃었다.

씨익.

그리고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게 바로 수장의 특권이야. 알겠어.”

“네에. 나리.”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 덕분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게 되었습니다.”

난 가병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내심 미소 지었다.

이윽고 솥에 이르렀다.

슥.

목기를 내밀며 솥 앞에 서 있는 두 가병을 보았다.

“잘 익은 걸로다가 그득 담아봐.”

“예에. 나리.”

“제일 실한 부위로 금방 드리겠습니다요.”

두 가병 중 한 가병이 목기를 받아들었다. 잽싸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잠시 후.

난 고기를 담긴 목기를 받아들며 뒤돌아섰다. 걸음을 떼며 줄을 선 가병들을 향해 고함쳤다.

“내일 잘들 싸워. 죽지도 말고, 다치지도 말고. 알겠어.”

“예에에에.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걱정 콱 붙들어 매십시오. 왜구 놈들 모조리 다 쳐 죽여 버리겠습니다.”

사기충천한 가병들의 대답에 난 히죽거렸다.

전쟁도 잘 막고 잘 자면 할만 것이다.

단 내가 죽지도 다치지도 않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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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 떨어진 곳에 오용섭과 황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가병들이 마음을 먹을거리로 잡다니.”

황곤은 기막혀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저 나리, 여느 사람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오용섭은 살짝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공성전인데. 가병들을 너무 풀어주는 것 아닙니까? 술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황곤은 염려스럽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괜찮을 거다. 가병들 모두 바보는 아니니깐. 죽기 싫으면 적당히 술을 마시겠지. 그런데 저 나리 말이다.”

“네. 용섭 형님.”

“도대체 뭘 얼마나 준비했기에 돼지고기까지 나오는 거냐?”

“말도 마십시오. 수백여 개가 넘는 수레를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실린 물품들이 엄청납니다. 집사 어른의 말로는 백금 3,000냥을 가져갔다고 하더니. 그 돈을 몽땅 다 쏟아 부은 모양입니다.”

“그래. 참으로 모를 나리구나. 내 저런 나리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오용섭은 말하며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쩔레쩔레.

황곤은 오용섭을 곁눈질하며 슬며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쁘지 않아.’

이민호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이 이제까지 겪어본 그 어떤 무장보다도 살가웠기 때문이다.

‘저런 양반이 군령을 세우기 위해 본보기로 가병을 몇 죽이려고 했다니.’

안 믿겨진다.

여타의 무장은 전과를 중요시할 뿐, 가병들의 의식주에는 무관심하다.

가병들의 잠자리와 입는 옷 그리고 먹는 것은 교전을 위해 무조건 빠르고 간단해야 한다.

그런데 이민호는 달랐다.

편한 잠자리와 풍족하고 넘치는 음식을 세심히 살펴주었다.

전장에서 닭고기나 돼지고기라니. 예전 같으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당대 고려의 집권자 최충헌의 가병이지만 고기는 귀한 것이라 그리 자주 먹지 못한다.

최충헌의 배려나 연회 등.

일련의 계기가 없는 한 고기구경은 좀처럼 구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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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목사의 거처.

드르렁드르렁.

시노다 야스하루는 대자로 뻗어 심하게 코를 곯았다.

왼쪽에는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몸을 웅크린 자세로 가로누워 있었다.

밤새 야스하루에게 시달림을 받아 피로한 듯 여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콰, 쾅.

돌연 천둥이 치는 듯한 다수의 고음이 들렸다.

고음은 괘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바람에 야스하루와 여인은 잠에서 깼다.

“으응.”

야스하루는 몸을 뒤척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뭐야?”

짜증어린 중얼거림을 흘렸다.

여인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허리쯤에 있는 요를 당겨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

“흑.”

여인은 은연중에 옆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야스하루를 힐긋거렸다.

그 모습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콰, 콰, 쾅.

그 사이에도 고음은 계속 들렸다.

“이!”

야스하루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며 인상 썼다.

밤새 여인을 데리고 그 짓(?)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데 달게 자던 자신의 잠을 고음이 방해해 성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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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하루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뜰에 서 있는 호위병 역할을 하는 네 명의 료닌이 우왕좌왕하다가 야스하루를 돌아보았다.

“고려군이 지금 공격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에 전령이 왔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뭐?”

야스하루는 깜짝 놀랐다.

고려군이 공격하고 있다?

고려군이 이동 중이라는, 광주목 인근에 이르렀다는 보고는 들은 바가 없다.

도착했다면 군진을 치고 하루나 이틀 뒤에 공성에 나설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격적으로, 기습적으로 공성에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반 상석에 어긋나는 고려군의 공격에 야스하루는 놀라 뛰었다.

후다닥.

야스하루는 눈에 보이는 작은 솟을대문으로 향했다.

“야스하루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네 료닌이 황급히 목청을 돋우며 야스하루를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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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우우우우.

석포가 쏘아올린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이 크게 휘어진 포물선을 그렸다.

돌은 토성 남문 성벽 우측에 떨어졌다.

쿠앙.

성벽 상부가 잠깐 들썩였다. 작은 흙무더기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숙여.”

누군가의 외침에 성벽에 서 있던 왜구들은 너나없이 몸을 숙였다.

그 사이 성벽으로 다수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으아악.”

“끄악.”

미처 몸을 숙이지 못한 몇몇 왜구가 화살에 적중 당했다. 왜구들은 성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바닥으로 쓰러졌다.

석포는 쉴 새 없이 성벽으로 예의 돌을 쏘아 올렸다.

석포 하나당 공색 가병 여섯이 달라붙었다.

두 명의 공색 가병은 끙끙거리며 돌을 날랐고, 나머지 네 공색 가병은 석포에 연결되어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텅.

한 공색 가병이 석포에 가지고 온 돌을 내려놓으며 줄을 손에 쥔 네 동료를 돌아보았다.

“야아아. 잘 좀 맞춰라. 응.”

“누군 맞추기 싫어서 안 맞춰?”

“잘 안 맞아. 마!”

“니가 한 번 쏴 바.”

네 공색 가병은 돌은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 자신들에게 타박을 공색 가병을 보았다.

“마아아! 돌을 나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어제 밤을 새워가며 돌을 주워 모았다고.”

공색 가병을 뒤돌아서며 핀잔을 던졌다.

“썩을 놈.”

“체.”

네 공색 가병은 옅은 인상을 쓰며 손에 쥔 줄을 더 바짝 잡아당겼다.

한편.

성벽 가까이 이른 곳에는 활을 손에 쥔 가병들, 궁병들이 이열횡대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궁병들은 자세를 갖추고서 성벽에 서 있는 왜구들을 향해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렸다.

휘, 휘, 휘이익.

다수의 화살이 날아가며 긴 파공을 흘렸다.

그 사이 성벽에서는.

“빨리. 올라가.”

“서둘러.”

나무 계단이 성벽에 걸쳐지자, 활과 창 그리고 검을 든 가병들이 계단을 차고 올라갔다.

타다닥.

활을 든 가병은 계단을 오르며 눈에 띄는 왜구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창을 쥔 가병은 아깝지 않다는 듯, 창을 높이 들어 성벽에 서 있는 왜구들을 향해 던졌다.

그 한쪽에서는 사다리에 몸을 끼운 가병들이, 사다리를 미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성벽을 발로 찼다.

토성 남문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와아아아아.”

천지를 떨어 울리는 함성들이 그치지 않았다.

“크아아악.”

비명이 줄을 잇듯 계속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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