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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보렴.”
“가문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생각합니다.”
“불가피하다?”
“네. 지금처럼 양광도의 모든 호족들이 움직이는 상황에서 저희 서가가 중심 역할을 하며, 향후의 모든 것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최 부사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서양헌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
가만히 차자 서풍을 쳐다보았다.
“풍아. 나는 가문의 미래보다는 너의 행복이 중요하다. 그리 생각한다.”
서윤은 최우와 남동생 서풍의 혼사가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행여 네가 권력 다툼에 휩싸여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서윤의 목소리에서 남동생 서풍에 대한 형으로서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형…… 님.”
서풍은 형 서윤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을 흘렸다.
서양헌은 두 아들을 보며 심중 미소 지었다.
싱긋.
든든하다.
자신이 없더라도 두 아들이 서로 힘을 합쳐 가문을 잘 이끌어나갈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윤아.”
“네, 아버님.”
서윤은 부친 서양헌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어지러운 때다. 조정은 최 상국이 쥐고 있고, 만약 지방에서 근심거리가 될 무장 세력이 태동한다면 필시 없애려할 것이다. 하지만 최 부사 댁과 우리가 혼사를 맺으면 그와 같은 일은 피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문은 명실공히 양광도를 좌지우지하는 대 호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 양광도의 모든 호족을 아우르는 호족들의 수장이 될 수만 있다면.”
서양헌은 형형한 안광을 번득였다.
기대라는 감정이 서양헌의 두 눈동자에서 일렁거렸다. 서양헌에게서 열정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물씬 풍겼다.
야망!
그리 불러도 무방하리라.
“…….”
서윤과 서풍은 입을 다물었다.
부친 서양헌의 심중을 오래전부터 다소 엿보아왔던 터라, 부친이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라, 자식으로서 부친을 거스르려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덜컥.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라버니!”
큰 외침이 들렸다.
서양헌은 눈에 보이는 딸 서혜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딸 서혜는 갑주를 몸에 걸치고 허리에 검을 찼다. 딱 출전을 앞둔 무장의 모습이라 심중 절로 혀를 찼다.
‘쯧쯧.’
딸을 잘못 키웠다는 상념을 지울 수가 없다.
서윤, 서풍 형제는 그 사이 걸어오는 여동생 서혜를 돌아보았다.
“어이쿠.”
“하하하하. 혜아야.”
서윤, 서풍 형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동생의 성정을 잘 아는 터라 굳이 탓하지 않았다. 그저 막내 여동생의 모든 것이 귀엽기만 했다.
서혜는 서풍의 왼쪽에 이르러 섰다.
“그런데 이 공은요?”
이민호를 언급하며 두리번거렸다.
서풍은 싱긋 미소 지으며 설명해주었다.
“이 공은 지금 청주목으로.”
출전 중이다.
서혜는 서풍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말했다.
“그럼. 우리도 속히 출전해야죠.”
“가만히 있거라. 아버님이 각 호족 분들에게 연통을 넣으셨으니. 조만간 각 호족 분들이 가병을 이끌고 오실 것이다. 그 때 출전해도 늦지 않다.”
서윤은 가만히 서혜를 타일렀다.
“그래도.”
서혜는 고집을 피웠다.
속히 참전하고 싶다는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서풍은 넌지시 여동생 서혜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버님이 계신 자리다.”
서혜는 둘째 오빠 서풍의 말에 흠칫하며 부친 서양헌을 쳐다보았다.
“아버님.”
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부친을 부르며 살며시 웃었다.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실례(?)한 것을 은연중에 무마하려하였다.
서양헌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딸 서혜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당장 혼례를 올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이거늘.”
나지막이 책망했다.
서혜는 흠칫거리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부친을 어려워하는 속내가 엿보였다.
서윤과 서풍은 그런 여동생 서혜를 돌아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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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목을 도보로 하루 거리에 둔 초지.
1천여 명은 내일 있을 공성전에 대비해 밤늦도록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초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모닥불에는 몇몇 사람이 둘러앉았다.
남향에는 내가, 북향에는 황곤이, 서향에는 오용섭이, 동향에는 혹두가.
황곤은 침착하게 그간 파악한 정세를 설명했다.
나와 오용섭 그리고 혹두는 황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뒤.
황곤의 설명이 끝났다.
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200여 명쯤 된다고 하니. 애초 예상한 것과 얼추 비슷해.”
오용섭이 날 보았다.
“어찌 공격하실 요량이십니까? 나리.”
난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모닥불이 청주목을 에워싼 토성이라고 가정하고.”
양손을 들어 모닥불을 감싸는 시늉을 했다.
“정문인 남문에 공성 병기와 공색 가병들을 집중 배치하여…… 오용섭, 자네가 남문을 맡아줘.”
난 손을 놀려 공성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설명이 끝나자마자 혹두가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리.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용섭과 황곤은 혹두를 쳐다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기색을 띠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무식하게 이민호의 말에 반응하는 혹두가 내심 기가 막혔다.
‘나, 참.’
‘어찌 저런 자를.’
이민호가 끌어 모은 개경의 악소 배들.
오용섭과 황곤은 이민호가 왜, 무엇 때문에 악소배들을 고용했는지 심중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꼭 물어보리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난 혹두를 쳐다보았다.
“그래 결정했나?”
“허, 허엄.”
혹두는 오른손을 들어 주먹 쥐며 입에 대더니 헛기침했다.
“대가만 확실하다면야.”
난 혹두의 대답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니들이 별 수 있어. 돈을 벌려고 살인강도에다가 도둑질까지 하는 놈들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목숨이 아깝다고 걷어찰 리가 없지.’
난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대가는 확실히 챙겨주지. 서문을 맡아. 공성병기와 공색 가병 일부를 지원해 줄 테니. 잘 해봐. 전공을 세우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줄 테니깐 말이야.”
“하하하하. 잘 알겠습니다. 나리.”
혹두는 호방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난 맞은편에 있는 황곤을 보았다.
“황곤.”
“네, 나리.”
“동문을 맡아.”
황곤은 날 보며 주저했다.
“나리. 저는 말을 잘 타는 것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는…….”
“알아.”
난 황곤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말을 이었다.
“가병들을…… 최대한 깃발을 많이 만들어서 가능한 많은 수가 동문을 공격하는 척만 해. 왜구 놈들의 시선을 오래 동안 동문에 묶어두는 것이 자네 임무야.”
“그러시다면.”
황곤은 맡겠다는 속내가 밴 어조로 대답했다.
난 눈을 반짝였다.
“공격하는 척해서 왜구 놈들에게 믿게 해야 해. 어설프게 공격하는 시늉을 하면 왜구 놈들이 역으로 성문을 열고 치고 나올 수도 있어.”
“나리. 그럼 더 좋은 거 아닙니까?”
혹두가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난 혹두를 돌아보았다.
“좋긴. 개뿔이 좋아. 다른 성문들은 그럼 어쩔 거야. 놈들이 황곤이 이끄는 가병들을 짓밟은 후, 배후에서 다른 성문을 공격하는 가병들을 친다면 혼란은 필연이고 패배는 당연지사야.”
난 다소 화난 목소리로 혹두에게 핀잔을 주었다.
황곤은 전령으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지휘자로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자칫 잘못 지휘했다가는 공성전을 파토를 낼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그냥 주의만 끌라 명했다.
“매복했다가 열린 성문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오용섭이 의견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