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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섭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입을 따악 벌렸다.
“서, 석포.”
한 길 어림의 석포들이 일렬로 자리했다가 순식간에 해체 되었다.
몇몇 장인이 서서 손을 들어 석포를 다루는 공색 가병들에게 마구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놈 아야. 그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허이고, 잡것들. 생전 처음이구마. 니들 석포 다뤄본 적 없자.”
“아주 지랄을 해라. 이 빙신들아. 석포가 어디 하루 이틀 갖고 다룰 수 있는 줄 아냐?”
“내가 고마 확 미쳐뿔것다. 저런 놈들을 뭔 수로 며칠 내로 석포를 다루게 맹그노.”
“그 놈의 돈만 아니 모. 내사 마 이런 일은 안 할 낀데.”
장인들은 툴툴댔다.
오용섭은 자신이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석포보다 규모가 작은 소형 석포에 크게 놀랐다.
나무와 밧줄만 있으면, 석포를 만드는 설계도면만 있으면 얼마든지 석포를 만들 수 있다.
단지 사정거리와 돌을 날려 보내는 일련의 미묘한 각도 등.
계측학과 연관이 있는 몇몇 부분이 완비되어야 한다는 선결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고려는 석포를 가지고 있지만, 공성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석포를 비롯한 공성 장비들이 발달하지 못했다.
“대관절.”
오용섭은 냉정을 되찾으며 고갤 돌려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이민호를 보았다.
“석포를 만들 줄 알다니.”
당혹이란 감정이 배인 중얼거림.
자신이 아는 무장은 말을 타거나 검술이 뛰어나거나 병법에 능통하거나 등. 몇몇 부문에 출중한 능력을 보인다.
이민호처럼 공성 병기에 재주를 보이는 무장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오용섭은 고개를 돌려 몇 장의 거리에 있는, 한창 공색 가병들이 조립하고 있는 나무 계단을 보았다.
보나마나다.
저 계단을 타고 성벽을 오르려 할 것이다.
오용섭은 부지불식간에 머리에 떠오르는 공성 병기에 흠칫했다.
충차라 불리는 공성 탑, 헌차라 불리는 망루 차, 적정 관찰용 소차, 성벽을 오르는 운제, 해자를 메우는 전호 차,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분온 차 등등.
공성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자신이 아는 일반적인 공성 병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엉뚱한 것들만 잔뜩 눈에 보여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다.
“새로운 공성법!”
오용섭은 미심쩍었다.
이민호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공성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용섭은 가슴이 서늘했다.
홱.
급히 이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 자!
머릿속에 그 상념이 퍼뜩 떠올랐다.
그간 옆에서 지켜본 이민호는 매사 장난치듯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보니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어. 뒤로는 철두철미하게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허허실실!’
오용섭은 눈을 부릅떴다.
허 속에 실을 감춘 자.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민호는 그런 유형의 인간 같았다.
“이번 출전이 아니었더라면.”
오용섭은 얼굴빛을 흐렸다.
어쩌면 이민호는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모종의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뭘까?
이민호가 허술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무엇을 노리는 걸까?
오용섭은 눈을 반짝이며 이민호와 그 곁에서 움직이는 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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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잘 받쳐줘.”
“중심 잘 잡으라고.”
200여 명의 가병이 동시다발적으로 고함쳐, 주위는 매우 시끌벅적했다.
성벽이 연상되는 가파른 고 경사의 언덕을 50여 명의 가병이 발을 놀려 빠르게 차고 올라갔다.
그들의 몸은 사다리 앞부분에 꽉 끼었고, 사다리 끝부분에는 8명의 가병이 서 있었다.
8명의 가병은 양손으로 사다리를 꽉 움켜쥐고는, 앞으로 힘껏 밀었다.
사다리에 끼인 가병은 미는 힘을 이용해 신속하게 언덕을 올랐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우측에 서 있는 묵을 힐긋 보았다.
“묵아.”
“네, 나리.”
묵이 날 돌아보았다.
“고생 많았다.”
내 말에 묵이 흠칫하더니, 힘들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듯 지친 기색을 띠었다.
“나리께서 말씀하신 것을 구하기 위해 장인들과 목재를 구하느라…… 게다가 시일이 촉박해…… 그나저나 백금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나리.”
묵은 고용한 뒷골목 사람들과 1천여 가병에게 주기로 한 백금이 염려스러운 눈치였다.
난 씩 웃었다.
“걱정하지마라.”
오른손을 들어 묵의 등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모자라면 왜구들이 노략질 한 것을 전비로 충당하면 되니깐.”
“예에에.”
묵은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래?”
“나, 나리. 주인에게 안 돌려주시고요. 아니, 교정도감에 바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묵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거리낌 없이 대꾸했다.
“뭐가 있어야 바치지.”
“나리. 그러시다가 큰일 납니다. 전리품을 나리 맘대로 처분하시면.”
난 묵이 말을 끝내기 전에 먼저 말했다.
“괜찮아. 쥐도 새도 모르게 뒤로 빼돌리면 누가 알겠어. 나와 너 그리고 몇몇 관련자만 입을 꾹 다물고 있음 아무도 몰라.”
“그래도요.”
묵은 불안해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하지 말고. 멀찍이에서 우릴 뒤따라오는 상인들이나 잘 챙겨. 그리고 장인들도.”
공성전에 있어 공성 장비를 만들고 다루는 장인들은 귀중한 인적 자원이다.
아닌 말로 나무는 주변에 지척으로 깔려 있다.
인근 산에는 울창한 숲이 그득해, 유사시 목재 조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녀석.’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선을 바로 했다.
묵이는 상인 기질이 다분했다.
난 그 점을 십분 이용, 다수의 포석을 깔아놓았다.
군사력은 곧 경제력이다!
최충헌의 집사 이호에게서 받은 백금 3천 냥 중 무려 2천 냥을 개경을 떠나오기 전에 써버렸다.
애초부터 남길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몽땅 다 써버릴 생각이었다. 더불어 왜구들이 노략질 한 재물 역시 뒤로 빼돌려 전비로 쓸 것이다.
남겨둬 봐야, 조금 전 묵이가 말한 것처럼 주인에게 돌려주든지 교정도감으로 보내든지 둘 중 하나다.
주인을 찾아주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가장 현실적인 처리 방안은 교정도감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충헌의 통치 자금이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아마 100%일 것이다.
‘그럴 바에야.’
날 따라 출전한 이들에게 몽땅 다 나눠주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내 평판이 올라갈 것이고, 이후 내가 다시 출전할 때 다들 군소리 없이 날 따를 테니깐 말이다.
수하들에게 현실적인 이득을 쥐어주어야 한다.
적당한 탐욕은 조절하기에 따라서는 강력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며,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난 눈에 보이는 일련의 공성 전술 수련을 지켜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능한 희생자나 중경상자를 최소화 하고 싶다.
불필요한 희생은 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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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서가는 분주했다.
인근에 있는 광주목을 왜구들이 점령했기 때문이다. 일백여 명에 이르는 가병들은 중무장하고 언제든지 출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
가병들은 사투가 벌어질 전장으로 곧 투입된다는 것에 적잖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얼굴을 경직하며 조금은 들뜬 숨을 내쉬었다.
긴박한 분위기가 가병들 사이에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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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헌은 양광도의 거의 모든 지방 호족들에게 연통하여, 각 호족들의 가병을 한 자리로 불러 모으려하였다.
양광도의 호족들 대부분이 전령을 보내 수락의 뜻을 나타냈다.
정신없이 일련의 일들이 휙휙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개경에서 서윤, 서풍 형제가 서가로 돌아왔다.
“어서 오너라.”
서양헌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아들을 보고는 반색했다.
서윤, 서풍 형제는 한일자의 탁자에 앉은 부친 서양헌에게 다가가 섰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그간 무량하셨습니까?”
서윤, 서풍 형제는 탁자에 서서 부친 서양헌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그래. 너희가 무탈해 보이니 내 마음이 놓이는 구나.”
서양헌의 얼굴빛은 밝았다.
두 아들이 아무 탈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에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아버님. 이번에 풍이가 최 부사 어른의 눈에 들어.”
서윤은 말하며 왼쪽에 서 있는 동생 서풍을 힐끔거렸다.
“흠.”
서양헌은 나직한 침음을 흘리며 장자 서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서윤이 말을 멈추자, 서양헌은 차자 서풍을 쳐다보았다.
“풍아.”
“네, 아버님.”
“이번 혼사와 관련하여 내 생각은 어떠냐?”
“…….”
서풍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서윤은 그런 남동생 서풍을 돌아보며 내키지 않는 속내를 은근히 내비쳤다.
“풍아. 나는 네가 행여 권력 다툼이 횡행하는…… 네가 휩쓸리지 않았으면 한다.”
서풍은 형 서윤을 향해 고갤 돌렸다.
“형님. 형님께서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풍은 말하며 앉은 부친 서양헌을 돌아보았다.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