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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뭐냐?”
난 성이 가라앉지 않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오용섭에게 대꾸했다.
“가병들이 나리께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 자.’
여느 가병과 다르다. 뭔가 있는 것 같다.
날 쳐다보는 오용섭의 눈이 반짝였다.
“가병들은 태생이 무인입니다. 강한 자에게 복종하지요.”
“하면.”
“나리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병들의 복종.”
“…….”
“이래 봬도 저는 가병들 사이에 적잖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싸우시죠. 절 이기시면 가병들이 승복할 겁니다. 단!”
“단?”
나는 오용섭의 말에 반문했다.
“제가 나리를 이기시면 가병들의 지휘권을 저에게 주십시오.”
“훗. 지휘권을 달라?”
난 가볍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오용섭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서 자신감이 엿보였다.
‘믿는 것이 있다?’
오용섭은 일개 가병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세게 나오는 것은 뒷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아닌 말로 내가 오용섭의 무례를 꼬투리 잡아 목을 베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누구도 오용섭을 죽인 날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리.”
오용섭이 생각하는 날 불렀다.
난 상념에서 벗어나 오용섭을 보았다.
“지휘권을 가지면 무엇을 할 참인가?”
내 물음에 오용섭은 싱그레 웃었다.
“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가병들은 가노입니다. 다들 종의 신분을 벗어나 관직에 나가고 싶어 합니다. 능력만 있으면 가노라고 할지라도 공후장상 못지않은 삶을 살 수도 있는 시대를 상국 어른께서 열어주셨습니다. 무신들 중에는 가노의 신분으로 일어서서 이 나라 고려를 호령한 이가 몇 있습니다.”
“흠.”
낮은 침음을 흘렸다.
“나리.”
오용섭은 날 쳐다보며 형형한 눈빛을 번득였다.
“우린 출세하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전공은 필수지요.”
“…….”
“나리에 대한 감정은 별로 없습니다. 상국께서 저희들을 나리 밑으로 보내셨다는 것은 그 만큼 나리를 신뢰한다는 것이니. 나리를 부정하면 상국 어른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난 오용섭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뭐하던 자지.’
대체적으로 무술을 익힌 자는 머리 회전이 빠르지 못하다. 대세를 읽는 것도, 남을 승복시키는 설득력도 약하다.
한데. 나와 마주한 오용섭은 전후 사정을 읽는 안목이 있을 뿐더러 자신의 말에 집중하게 만드는 달변이었다.
‘후후.’
난 속으로 실소했다.
‘물건 하나 건졌군.’
그 사이 오용섭은 잔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출세하자면 나리의 지휘를 따를 수는…….”
오용섭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오른손에 쥔 검을 들어 오용섭을 겨눴다.
“문답무용. 검을 들어라. 내가 네게 패한다면 네 말대로 지휘권을 넘겨주마.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감히 명에 불응한 가병들의 죄를 물을 것이다. 내 명을 듣지 말라 가병들을 선동하였을 것이 뻔한 십인 장들의 목을 이 자리에서 베고 말 것이다.”
나는 최하위 지휘자라 할 수 있는 십인 장들을 언급했다.
오용섭과 뒤에 서 있는 가병들은 내 말에 흠칫하더니 몸을 양쪽으로 미미하게 움직였다.
죄다 불안한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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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이.
오용섭이 내게 짓쳐들며 검을 내쳤다. 난 오른손에 쥔 검을 거리낌 없이 마주 내쳤다.
오용섭의 검과 내 검이 맞부딪쳤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친 충격이 검신과 검병을 쥔 손아귀로 흘러들었다.
손목이 시큰거리며 찌릿한 느낌이 일었다.
‘우욱.’
상당한 힘이 실린 검격이었다.
오용섭은 두 자루 검이 부딪치자 그 반동을 이용해 튀는 검을 재빨리 가슴으로 당겼다.
오용섭은 검을 돌려, 내 왼쪽 허벅지를 베려했다.
난 재빨리 왼쪽으로 돌아서며 오용섭의 검을 바깥으로 밀쳤다.
따앙.
오용섭은 내 검에 실린 힘에 몸을 휘청거렸다.
“흐헉.”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난 오른발을 게처럼 옆으로 크게 벌리며 우측 어깨를 내밀었다.
어깨로 휘청거리는 오용섭의 가슴을 쳤다.
텅.
오용섭은 내 어깨가 주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아악.”
여느 사람이 따를 수 없는 힘을 가진 나다.
오용섭은 마른 땅바닥으로 쓰러져 떼구루루 굴렀다. 난 자세를 바로 하며 구르는 오용섭을 향해 다가갔다.
주위에서 나와 오용섭을 지켜보는 가병들이 너나없이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아…….”
“저, 저.”
“형님.”
귀에 들리는 가병들의 음성에 난 속으로 비웃었다.
‘어림없어.’
그 사이 오용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것이 느끼는 통증을 무리하게 참는 눈치다.
팟.
난 땅을 박차며 오용섭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다.
삽시에 몇 걸음의 거리를 지나 오용섭에게 다다랐다. 착지와 함께 오른발을 힘차게 걷어 차올렸다.
빡.
오른 발끝이 정확하게 오용섭의 턱에 닿았다.
“…….”
오용섭은 뭐라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턱에서 이는 강력한 발차기가 주는 충격과 통증을 느끼는 순간, 오용섭은 머리가 아찔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통이란 원초적인 감정이 오용섭의 심신心身을 휘감았다.
오용섭의 다리가 지면에서 떨어지며 몸이 뒤로 날아갔다.
난 착지하며 잽싸게 왼발을 크게 내디뎠다.
그 사이 오용섭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척尺의 거리를 스쳤다.
오용섭은 딱딱한 맨땅바닥에 부딪치며 힘없이 쓰러졌다.
난 맨땅바닥에 드러누운 오용섭에게 다가가, 오른손에 쥔 검으로 오용섭의 목을 겨눴다.
척.
오용섭은 통증 탓인지 얼굴을 찡그리더니, 목을 겨눈 내 검이 주는 촉감에 흠칫했다.
“승복하나?”
내 물음에 오용섭은 포기한 듯 사지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죽이시오.”
“말한 대로 십인 장들의 목을 벨 것이다.”
가병들은 정규군이 아닌 최충헌의 사병인 까닭에 정규군의편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오용섭은 내말에 움찔거리더니 급히 날 올려다보며 사정했다.
“꼭 그리 죽여야겠습니다. 나리.”
난 흠칫거렸다.
오용섭은 사정조로 말을 이었다.
“나리의 의도대로 십인 장들을 가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이시면, 가병들은 잠시 나리의 명을 따르겠으나 진심으로 나리를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병들의 불만을 잠시 동안 억누르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굳이 죽이셔야겠습니까? 수하는 공포가 아닌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오용섭은 살며시 눈을 내리감으며 중얼거렸다.
“덕자사업지기德者事業之基 유기불고이동우견구자未有基不固而棟宇堅久者.”
난 오용섭의 중얼거림에 움칫거렸다.
‘제법.’
덕은 사업의 기초요.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건물은 견고하지 못하며, 오래가지도 못한다.
사람을 진정 복종시키는 것은 덕이다.
그 뜻이다.
난 사학과 출신이라, 한자나 한학 관련 지식이 꽤 많다.
‘훗.’
심중 호감이 일었다.
단순히 검만 아는 무인이 아닌 글을 아는 자 같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좋아. 내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난 오용섭의 목에 겨눈 검을 치웠다.
오용섭은 내 말에 눈을 뜨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올려다보는 오용섭에게 툭 말을 던졌다.
“당신이 날 도와준다면 십인 장들은 죽이지 않겠다. 아울러 가병들의 불만에 대한 답도 주겠다.”
“나, 나리.”
오용섭은 이민호의 말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안다. 가병들이 출세하자면 전공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
“하지만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세우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사상자들이 나올 수도 있다. 생각해 봐라. 가병들이 내 지휘를 무시하고 지들 마음대로 전장에서 날뛰는 것을.”
오용섭은 내 말에 잔떨림을 흘렸다.
머릿속에 내가 염려하는 상황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체계적이고 정연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다. 저마다 공을 세우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천방지축으로 전장을 내달리며 휘저었다.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축구 경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공을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선수들.
제각기 맡은 포지션대로 서서 상황에 따라 공수를 주고받으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선수들.
어느 쪽의 승산이 높겠는가?
“천하 없는 강병이라고 해도 지휘를 따르지 않고 제 맘대로 움직인다면 오합지졸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이라면 그걸 잘 알 것이다.”
“…….”
“다들 왜구의 수가 적다고 방심하고 자만에 빠져 있다. 수적으로, 훈련에 있어 고려 최강의 병사라고 할 수 있는 합하의 가병들이 왜구에게 질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사상자를 최소화 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싶다. 아울러 왜구들에게 처절한 응징이 무엇인지도 보여주고 싶다. 백성들이 왜구에게 시달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두 번 다시 이곳 고려 땅으로 왜구들이 기어들어오지 못하도록, 몸서리가 쳐질 그런 응징을 나는 왜구들에게 주고 싶다.”
난 누워 있는 오용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
오용섭은 말없이 날 보더니 손을 들어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난 오용섭이 내민 손을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