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68화 (6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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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최충헌을 쳐다보는 나경필의 시선에서 격한 감정이 물결쳤다.

그 모습에서 왜구를 매우 낮추어보는, 경멸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우러났다.

그것은 탁자에 앉은 조정 문무 대소 신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왜구는 천민보다 더 못한 자들이었다.

“…….”

최충헌은 말없이 왼손을 들었다 내렸다.

앉으라.

그런 무언을 담은 손짓에 나경필은 의자에 착석했다. 신료들은 모두 최충헌을 쳐다보며, 그의 신색을 살폈다.

죄다 최충헌에게 짓눌려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권력에 머리 숙여 굴종하는 조정 문무 대소 신료들의 모습이 실로 가관이다.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피력하는 이가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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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지랄들을 하세요.’

난 탁자 우측 끝, 말석에 앉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만히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보니 문무 대소 신료들은 대체적으로 대동소이했다.

왜구의 수가 천여 명 어림 같으니 6위에서 2천을 차출하자.

2천여 명의 군병을 양광도로 보내 단숨에 왜구들을 섬멸하자.

두 번 다시 왜구들이 오지 못하도록 크게 경을 쳐 놓자.

죄다 말만 많을 뿐,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의견은 전혀 내놓지 못했다.

‘중학교 애들을 갖다 앉혀 놓아도 당신들보다는 낫겠다.’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살을 찡그렸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하긴 뭐.

요즘 중학교 애들이 예전 고등학생 뺨칠 수준이긴 하지.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최충헌은 잠시 앉은 신료들을 응시하며 입을 한일자로 굳게 내버려두었다.

신료들을 방치하는 듯한 태도였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난 최충헌을 힐긋거리며 심중 의아해했다.

왜구를 상대해 본 경험이 풍부한 무장을 보내 섬멸하게 하면 되지 않는가?

그게 일반적인 대처 방안인데.

내 눈에 보이는 최충헌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가만!’

내가 뭔가 놓친 것은 아닐까? 시선을 바로 하며 생각했다.

‘이상한데. 내가 아는 그 어디에도 지금 시기에 왜구가 전례 없이 크게 준동했었다는 기록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달라 심중 의문이 인다.

‘설마 내가 이 시대에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역사의 변이성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 존재함으로서 기존의 모든 것이 뒤틀리고 엉켜버린다. 그 여파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그 질서가 향후 모든 역사를 움직인다.

그와 같은 특이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역사적 변화를 역사의 변이성이라고 한다.

특정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의 여파로 인한 결과물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특정 사건을 ‘정’ 이라 하고 결과물을 ‘반’ 이라 하면, 정과 반이 일종의 ‘합’ 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적 질서를 생성된다.

‘그나저나.’

너무 빠르다.

나도 모르게 얼굴빛을 흐렸다.

왜구가 다시 올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내가 채 준비도 갖추지 못한 지금 쳐들어올 줄이야.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난 왜구의 준동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한편으로 행여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발언이 역사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라는 불안에서 자유롭다는 상념에 조금 들떴다.

마음 놓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해도 될 것 같아 심중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작년 겨울이었지.’

이름을 모르는 왜구의 수뇌. 다카요시의 왼쪽 눈에 화살을 박아 넣은 것을 생각했다.

‘지금은 초봄이니. 빠르긴 엄청 빨라.’

납득이 되지 않았다. 긴가민가하며 머릿속으로 조금 전에 들었던 나경필의 설명을 상기하며 나름 정리했다.

‘광주목과 청주목이 떨어지고 대원이라 불리는 충주목이 함락 직전이라면.’

내가 아는 지식을 몽땅 다 머리에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고려 말이었다. 왜구가 한반도에서 개 염병 지랄을 떤 것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삼국 시대 무렵부터다.

가장 기승을 부린 것은 고려 말이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며 뜸해졌다.

‘이건!’

단순한 약탈이나 노략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개경 바로 밑에 남경이 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남경 아래로 광주목과 청주목이 있고, 충주목은 양광도와 경상도를 잇는 관문이자 요충지다.

전하는 기록을 보면 고려 시대에 충주목에는 세곡이 장기간에 걸쳐 보관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왜구들이 세곡을 탐낼 것은 불문가지다.

‘만약 충주목이 왜구에게 떨어지면.’

왜구들이 장기간 양광도에 있을 수 있는 군량미가 확보된다.

단순히 상륙하여 몇몇 마을을 노략질한 후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특정 지역에 상주하면서 대대적으로 약탈할 수 있다.

임란.

사람들에게 임진왜란이라 불린 것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비슷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은 충분히 물리칠 역량이 있다. 하지만 전례 없이 1,000여 명에 가까운 왜구들이 양광도에 상륙, 현재 분탕질을 치고 있다.

만약 적극적으로, 원활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왜국 놈들이 고려를 만만히 볼 수 있다.

‘가만 지금이 무로마치 막부 초기지.’

내가 알고 있는 역사를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무로막치 막부 초기에 외척인 호조 가가 막부의 2대 수장인 외손자를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천황 가는 무로막치 막부 내부의 권력 투쟁에 정권을 가져올 수 있는 호기로 간주, 대대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막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여자 쇼군이란 불린 초대 막부의 부인 마사코가 불문에 출가한 승려의 몸으로 나타나 막부를 일치단결시킨 후, 천황 가와 일대 결전에 들어간다.

최종 승자는 무로막치 막부로, 이후 막부의 권력 체계는 탄탄한 기반에 놓이게 된다.

중앙 정권이 막부와 천황 가의 권력 쟁투로 시끄러운 사이 지방은 지들 맘대로 세력 쟁탈을 벌리며 혼란을 야기한다.

각 지방 번들이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그 와중에 막부를 위협하는 큰 세력이 태동하게 된다.

그런 혼란기에 고려는 전비와 식량 그리고 노동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주요 약탈지로 각광 받을 수 있다.

난 그 점을 우려했다.

‘지금 왜구들을 강력하게 진압, 평정하지 못한다면.’

이후, 얼마나 많은 왜구들이 고려로 몰려올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안 돼! 왜구들에게 시달렸다가는 몽고가 치고 들어올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아.’

군사력의 낭비는 곧바로 국방 약화로 이어진다. 아울러 군이라는 것이 가만히 있어도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그런데 움직인다면, 왜구와 장기간에 걸쳐, 다수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전비의 소모가 막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의 고려는 왜구에 이어 몽골까지 감당할 경제력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가뜩이나 오랜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군이 움직인다면 모든 비용과 관련 부담들이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백상과 국가 전반에 깊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아닌 말로다가 농사짓는 양민들을 징병하고, 양민들이 가진 식량을 군량미로 징발하여…… 모든 것을 양민들이 감당해야 해. 전후 복구까지 말이야. 징병된 양민들이 대거 죽거나 다쳐,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부족하게 되면 농업 생산력이 극도로 저하되고…… 그렇다고 문벌 귀족들이 나서서 그들의 가병을 내놓거나 군량미를 내놓는 것도 아니고.’

눈살을 찡그리며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서윤, 서풍 형제를 보았다.

서윤, 서풍 형제는 얼굴을 굳히며 긴장했다.

“…….”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어, 돌아가는 눈치를 보며 진한 안타까움을 얼굴에 내비쳤다.

난 최충헌을 곁눈질했다.

최충헌은 막 뭐라 말하려고 하는지 상체를 내미려했다.

번쩍.

왼손을 머리 높이 들었다.

“합하!”

내가 소리쳐 최충헌을 부르자.

순간.

“응?”

“누구지?”

탁자에 앉아 있는 신료들이 날 보았다.

넌. 뭐야?

생전 처음 보는 놈이 예가 어디라고.

날 쳐다보는 신료들의 시선에서 그런 감정들이 엿보였다. 깔끔하게 무시하며 앉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스윽.

최충헌이 날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날 응시하는 시선에서 마음에 안 든다는 속내가 드러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는 겐가?”

좌측 제일 앞에 앉은 최향이 날 쳐다보며 고함쳤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최우가 나섰다.

“아우님. 아버님께서 참석을 허락하신 이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하니 일단 들어나 보세.”

“형님.”

최향은 최우를 돌아보았다.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자리에 배석한 이들은 모두 조정의 고관들입니다. 관직도 없는 자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최충헌이 날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들어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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